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30화
“공작, 대체 저게 무엇이지요?”
못 볼 것이라도 보았다는 듯 대신관이 눈을 비비며 물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손을 꼭 붙잡고 있었던 탓에 그의 물음을 똑똑히 들은 공작이 눈을 끔뻑이며 대꾸했다.
“……밀? 아니, 코, 콜리플라워?”
혹은 루꼴라와 바질 등등의 푸른 잎 작물.
왜 저런 것들이 마왕의 저택 앞마당에 심어진 걸까. 그것도 마왕의 검은 불꽃 속에서.
대신관은 홀린 듯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손을 맞잡은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본 게 진짜인지 직접 만져 보며 확인했다.
“……진짜네요. 진짜 작물이네요.”
뭘 하려고 이런 걸 심은 걸까. 그것도 꽤 정성스럽게 온실까지 지어서.
혹시 잘못 찾아온 건 아닐까. 아니, 검은 불꽃이 사방에 깔린 걸 보면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데.
보면 볼수록 의문만 커졌다.
그렇게 대신관과 공작이 온실을 돌아보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덜컹.
저택 본관 쪽에서 육중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정말 멋진 저녁 식사였습니다! 북부에서 이런 대단한 음식을 맛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제 딸이지만 정말 음식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만들지요.”
“흠, 흠. 필요한 재료가 있다면 말만 해. 작물에 관한 건 공녀님께서 내게 맡기셨으니, 뭐든 구해다가 심어 줄게. 향신료도 가능하고.”
“작물이나 향신료는 괜찮은데, 신선한 육류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잘 손질해도 신선한 것만큼 좋은 건 없으니까요.”
“음, 신선한 육류라……. 어려울 것 같지만 노력해 보도록 하지.”
“정말? 나 마침 스테이크 썰고 싶었는데 잘됐다. 구경만 해 봐서 궁금했거든.”
여러 개의 목소리였다. 마지막은 대신관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레이나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본 공작이 파드득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대신관의 손에 이끌려 온실 밖으로 나온 공작은 저택을 떠나는 베로니카와 체이스에게 작별 인사하는 레이나를 보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그러다가 눈에 띈 것이 한 중년 남자였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에 잠시 고민하던 공작은 그가 레이나를 북부까지 태웠던 마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야, 왜 살아 있지? 분명 다 처리했다고 했는데.”
설마 거짓이었나.
설마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명을 달리한 집사는 일을 끝내지도 않고 끝냈다고 보고한 상태였다.
대체 그놈이 제대로 처리한 일이 있기는 한 것인지.
이제는 뭘 끝내고 뭘 끝내지 못했는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공작이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역시 죽이기를 잘한 듯싶었다.
그렇다고 분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공작은 그의 가족들과 친척들 역시 가만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가 뜻밖의 진실을 마주하고 분개하는 사이, 베로니카와 체이스가 저택을 떠났다.
배웅을 끝내 레이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이만 쉬기 위해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온실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린 레이나가 정확히 대신관과 공작이 있는 곳을 향해 불꽃을 던졌다.
휙-!
“……?!”
“으, 으아아아악?!”
대신관이 공작을 방패로 삼아 날쌔게 뒤로 물러섰다.
때문에 홀로 불꽃에 휩싸인 공작이 고통을 호소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으악! 으아아악! 아악!”
마물들에게 사용했던 마법과 같은 종류였던 모양인지, 공작의 붉은 머리카락이 점점 사라져 갔다.
옷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신관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점차 초라해지는 공작을 신기한 듯 지켜보았다.
잠시 뒤, 불꽃이 사라져 퍽 민망한 모습이 된 그를 마주한 레이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사람이었잖아? 누구야, 넌?”
대답은 그를 알아본 레이나의 집사에게서 나왔다.
“루, 루벨라이트 공작님……?!”
뭐야, 공작이었어? 어쩐지, 얼굴이 좀 익숙하더라.
“빨리 말하지. 그럼 털이랑 옷만 태우지 않고 피부까지 다 태워 버렸을 텐데.”
레이나의 싸늘한 눈이 공포로 바싹 웅크린 공작의 몸을 훑었다.
“쫓아낼 땐 언제고, 왜 찾아온 거야? 잘 사는지 확인하고 싶었어? 아니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려고?”
공작에게서 대답은 없었으나, 레이나는 후자일 가능성이 크리라 생각했다.
그 누구도 살 수 없는 극지로 보냈으니 어지간한 사람은 잘 살 수 없었을 테고, 길드 의뢰를 통해 자신을 암살하려고까지 했으니까.
“입을 태운 것도 아닌데 왜 대답이 없어?”
“……나, 나, 나는, 나, 나는……!”
공포에 질린 공작은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관과 함께인데 설마 이런 상황이 닥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볼품없이 말을 더듬으며 허공을 헤맸다.
이럴 거면 대체 왜 온 건지. 레이나가 혀를 찼다.
그러다 공작의 뒤에 서서 쓰러진 그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대신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쩔 수 없지. 네가 대답해. 여긴 뭐 하러 온 거야?”
눈을 끔뻑인 대신관이 여전히 투명한 제 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 제가 보이십니까?”
갑자기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집사와 그의 가족들이 기겁했다.
레이나가 대신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보여. 꼭 유령처럼 흐릿하지만. 혹시 유령이야?”
혹시 말 걸면 안 되는 거였나.
진심으로 물은 것이었는데, 일순 굳어 있던 대신관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뇨, 그럴 리가요. 멀쩡히 살아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에 걸려 있던 투명화 마법이 사라졌다.
뜬금없이 등장한 젊은 청년에 집사 일가가 사색이 되었다.
“공녀님께는 제 마법이 안 통하나 봅니다. 하긴, ‘지금’은 당신을 당해 낼 자가 없으니까요. 아무리 저라고 해도요.”
어딘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지금은, 이라니? 설마 나중에는 생기기라도 한다는 뜻이야?”
“글쎄요.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대답은 그러했으나, 아무래도 이세계의 소녀를 뜻하는 모양이었다.
노가다로 레벨을 1,000까지 올려서 마왕인 자신을 해치울 여자 주인공.
맞는 말이기는 했고, 그런 세상이기는 한데…….
지금은 네가 짱일지 모르겠지만, 곧 별거 아니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굳이 면전에서 할 필요는 없었다.
‘뭘까, 이 무례한 놈은.’
남의 집에 유령 상태로 들어와서 재수 없는 말까지 해 대고.
인상착의가 어딘가 익숙한데, 정확히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금발에 푸른 눈, 그럭저럭 괜찮은 얼굴까지 줬을 정도면 아주 비중이 없는 인물 같지는 않았다.
레이나가 다시금 그의 정체를 물었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넌 뭐고?”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대신관 테오도르라고 합니다.”
대신관이라면, 설마 여자 주인공의 PT 선생님?
실제로 그런 명칭은 아니었지만, 레이나를 비롯한 유저들은 대신관을 PT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게임 속에서 대신관은 여자 주인공을 만날 때마다 임무를 주었기 때문이다.
일을 해결하고 돌아오면 잘했다는 칭찬과 함께 다음 임무를 또 주었다.
계속 그랬다. 그는 늘 임무를 주며 여주를 강과 산, 들과 바다, 그리고 설원으로 보냈다.
네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다는, 나름 용기를 북돋는 말과 함께.
남주 후보가 아닌 데다가 매번 신전에서 후광에 휩싸인 모습만 보았기에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몰랐는데.
‘……비중이 있다 보니 나쁘게 만들어 놓지는 않았네.’
선한 인상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제법 혹할 법한 얼굴이었다.
‘난 아니지만.’
역시 남자는 여리여리하고 부드러운 인상보다는 강하고 차가운 인상인 편이 좋았다.
싸늘한 얼굴과는 다르게 은근히 챙겨 주는 그런 남자. 반전 매력이 있는 남자 말이다.
거기에 키도 크고, 체격도 좀 있어야 하며, 힘도 세 보여야 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대신관이 레이나의 취향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무려 대신관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여긴 왜 온 건데? 그것도 날 손수 이곳으로 내쫓은 놈과 함께.”
레이나의 눈이 바닥에 납작 엎드린 공작을 훑었다. 경멸이 담겨 있었다.
대신관이 곱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별건 아닙니다. 그저 공녀께서 신탁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계셔서 왜 그러시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직접 보고 싶기도 했고요.”
‘데헷’이라도 넣어 줘야 할 것처럼 청량한 웃음이었다.
“그래서, 만나 보니 궁금증은 해소됐어? 감상은?”
“불행히도 궁금증은 더 늘기만 했네요. 그리고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답게 자라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뭐야, 뜬금없이. 비아냥댄 거였는데 대신관의 눈빛이 퍽 진지했다.
괜히 거부감이 느껴져 레이나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됐지만 내 취향이 아니라서.”
“앗.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니었는데, 조금 마음이 아프긴 하네요.”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사람과의 영양가 없는 대화도 재미가 없었고.
때문에 이만 저 벌거숭이 아저씨를 데리고 돌아가 줬으면 했다.
아니,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 저택에 찾아온 로스틴을 발견하기 전까지.
서둘러 다가온 그가 대신관의 시야에서 레이나를 차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