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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37화

대신관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것참, 같잖은 상황이군요.”

레이나나 트리버는 어차피 없앨 적이니 자신을 공격을 하든 말든 상관이 없는데, 로스틴은 달랐다.

“벌레만도 못한 금수들은 이해가 가는 바이지만, 윈터스노우 공작. 당신은 조금 의외입니다. 제가 그동안 얼마나 아끼고 잘해 드렸는데요.”

로스틴은 신의 가호를 받은 가문의 장남으로서 원래 강하게 태어나긴 했으나, 신탁과 마물을 이용하여 명성을 떨치게 해 준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힘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신관인 자신이 만들어 준 배경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리도 배은망덕하게 자신에게 대들다니.

‘이럴 줄 알았다면 아무리 부모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지식은 습득할 수 있도록 하는 거였는데.’

가뜩이나 마물이 들끓는 영지의 주인이 되어 관리하는 데만도 바쁠 것 같아 내버려 두었더니, 이렇게나 멍청한 성인이 되어 버렸다.

머저리 같은 인간들 중에서 나름 쓸모가 있어 마음에 들어 했는데, 아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미련을 떨치자, 로스틴이 치를 떨며 분노했다.

“금수는 네놈이겠지, 대신관. 우리 가문에 저주를 내린 것 또한 너일 것이고.”

대신관에게 겨눈 칼끝이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베어 버릴 듯 빛을 반사했다.

그에 대신관은 더는 변명하지 않고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모두 대의를 위한 신의 뜻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한낱 인간인 당신은 모를 깊은 뜻이죠. 머지않아 다 끝날 참이었거늘…….”

“이 자식!”

로스틴이 대신관에게 달려들었다. 뭘 어떻게 해서든 그의 가슴에 검을 꽂아 버리겠다는 강렬한 기세였다.

하지만 곧장 대신관이 제 주위에 검은 장벽을 만들었기에, 로스틴의 공격은 이를 뚫지 못했다.

그러자 레이나가 공격에 가담했다.

날카로운 검은 창을 수십 개나 만들어 낸 그녀가 대신관의 장막에 연신 공격을 퍼부었다.

절반 이상의 힘을 빼앗긴 탓에 버거웠는데, 다행히 곧 트리버까지 합세하여 대신관이 만들어 낸 장벽에 점차 금이 갔다.

깨어나자마자 마물을 소환한 탓에 그 역시 힘이 부족했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대신관이 후퇴했다. 정말이지 짜증 나는 조합이 아닐 수 없다는 듯 그의 표정에도 금이 가 있었다.

“버러지 같은……!”

그런 그의 뒤를 로스틴의 검이 쫓았다. 레이나와 트리버의 불꽃도 마찬가지였다.

공격에 성공할 때까지 계속 따라붙겠다는 의지에 혀를 찬 대신관이 하필이면 구석에 숨은 신관의 바로 뒤로 이동했다.

그에 반사적으로 공격을 하려던 로스틴이 몸을 틀었다. 레이나 역시 내던진 검은 불꽃을 서둘러 꺼뜨렸다.

개중 공격을 멈추지 않은 것은 트리버뿐이었다. 무고한 신관이 있든 없든 트리버가 날린 마법이 신관의 복부에 정통으로 꽂혔다.

“으아아아악!”

끔찍한 고통에 배를 움켜잡은 신관이 바닥을 나뒹굴자, 대신관은 다시 새로운 신관의 뒤로 몸을 숨겼다.

“아아아악!”

연이어 따라붙은 트리버의 공격에 새로운 신관도 쓰러졌다.

돌연 죄 없는 사람들을 방패로 삼아 미친 행동을 반복하는 대신관에 당황한 레이나가 이를 갈고 있자, 그 틈을 노린 대신관이 그녀를 공격했다.

다행히 로스틴의 검이 이를 갈랐고, 레이나도 재빨리 장벽을 만들어 무마시켰다.

뭘 어떻게 해도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대신관이 여전히 혼돈에 빠진 상태의 성녀를 힐끗 보았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제 편이 되어 줄 사람이니, 뭘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게다가 어차피 신탁대로라면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었다.

이세계의 소녀인 성녀만이 검은 힘을 다루는 마왕을 물리칠 수 있다니, 멍청하게 얼이 빠진 저 여자를 어떻게든 해야 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꿈에서 보았던 신탁의 마지막 선택지였다.

‘희생.’

그래, 희생이었다.

마왕과 성녀, 그리고 이를 도울 존재들이 한곳에 모일 때마다 늘 누군가를 희생하라는 신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지금은 성녀가 레이나를 이길 만큼의 힘을 키우지 못했기에 모두가 희생해야 한다는 신탁을 따라야 했다.

불행히도 사교성이 좋지 못한 성녀는 자신 외의 그 누구도 제 편으로 만들지 못했기에 희생을 할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 문제였지만.

생각을 이어 가는 사이에 날아온 공격을 피한 대신관이 구석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신관의 뒤로 재빨리 이동했다.

조금 아까 로스틴과 성녀에게 대신관은 죄가 없다며 악을 쓰던 자였다.

신에 대한 신앙심과 자신에 대한 믿음이 굳건한 자였기에 얼굴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자라면 시키는 대로 말을 들을 것이 분명했다.

다시금 비겁하게 신관의 뒤에 숨었다며 이를 가는 레이나와 공격하려 몸을 트는 트리버의 위치를 확인한 대신관이 빠르게 귓속말했다.

“당장 남부와 동부에 연락을 취해 최대한 많은 인원을 이동석으로 이동시키라고 하십시오.”

똑똑히 말을 전했음에도 상대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자, 정신 차리라며 대신관이 그의 뺨을 때렸다.

“히, 히익!”

대답은 형편없었으나, 다행히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신관이 헐레벌떡 홀을 빠져나갔다.

그사이, 대신관은 몇 번이나 더 신관들을 방패 삼아 트리버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했다.

제발 그만 좀 하라며 레이나가 잔뜩 흥분한 트리버를 검은 밧줄로 구속하기 전까지 계속.

“그만해! 다 죽일 셈이야?! 왜 죄 없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거야!”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대신관의 만행과 트리버의 활약으로, 신전 홀에 부상을 당한 신관들이 상당수 널브러져 있었다.

“으, 으아아악! 내 다리!”

“사, 살려…….”

그들은 하나같이 트리버의 불꽃 공격을 받고 끔찍한 화상을 입은 채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개중에는 목숨이 위험한 자들도 있었다.

그때, 돌연 대신관이 무방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온 힘을 다해 레이나의 밧줄을 끊은 트리버가 그를 공격했다.

지금까지 비겁하게 사람들을 방패 삼으면서 공격을 피했던 대신관이었기에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까 싶었거늘.

“윽!”

어째서인지 대신관은 트리버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았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갑자기 날린 공격이었기에 아쉽게도 위력은 그리 세지 않았지만, 더는 얍삽하게 공격을 피하거나 도망치지 못하도록 만들 수는 있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레이나가 대신관과 트리버를 단단히 포박했다. 이 이상 손을 더럽히며 죽일 필요는 없었다. 아니, 죽이면 안 되었다.

그가 자백한 것을 들은 사람이 기십이었고, 정황마저 완벽했기에 법의 심판에 맡기면 그만이었다.

레이나가 검을 쥔 로스틴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

“만인에게 이놈의 죄를 공개해서 그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하자.”

그는 아까부터 대신관을 죽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이런 놈의 피로 네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어. 법의 심판을 받게 하면 돼.”

대신관은 그간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받고 존경을 받던 위인이었다.

그런 자일수록, 지금 당장 여기서 죽는 것보다 모두의 입에 그간의 악행이 오르내리고 모욕을 당하며 죽는 것이 천만 배는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레이나의 말을 이해한 로스틴이 검을 꽉 쥔 손의 힘을 천천히 풀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대신관의 사지를 분리해 버리고 싶었으나, 그래서야 그를 편하게 해 줄 뿐이었다.

“그래, 맞아. 공녀의 말대로 여기서 이렇게 끝내 주기에는 놈의 죄가 너무 크다.”

구속해서 황성으로 데려간다면 그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죗값을 치를 방법이 수두룩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대신관의 처분이 얼추 결정지어지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대신관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아니, 모든 계획이 무산되고 죽음의 길만이 남아 있거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이었다.

그런 그의 표정이 돌변한 것은 뜻밖의 사람들이 들이닥쳤을 때였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구분도 하지 못한 신관이 대신관의 지시에 따라 동부와 남부에 연락을 넣어, 그들이 신전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이게 대체 무슨……!”

“헉?!”

“대신관님?!”

공격을 받고 쓰러진 무수한 신관들과 상처를 입은 채 포박까지 당한 대신관.

하필이면 그의 의복이 하얀색이라서 불꽃 공격을 당한 것이 너무나도 도드라져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준비를 하라는 연락을 받아 용병들을 한데 불러 모으고 있던 참이었는데, 돌연 빨리 와 달라는 말에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생각보다 상황은 더 심각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신전이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레이나, 루벨라이트!”

다쳐 쓰러진 사람들 사이에 꼿꼿하게 서 있는 레이나. 저 여자가 신전을 공격한 것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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