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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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케일란이 열심히 삽질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디저트를 음미하는데, 에일린이 도착했다.
“뭐야, 이게 다……?”
커다란 짐마차가 총 열 대에 사람은 스무 명 정도였다.
‘저택이 저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으려나……?!’
당황한 레이나가 마당에 꽉 들어찬 마차와 사람들을 살피고 있자, 에일린이 그녀에게 인사했다.
“아! 공녀님 나와 계셨군요. 마침 디저트 시간이었나 보네요.”
“에일린!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다급한 레이나의 물음에 에일린이 걱정하지 말라며 웃었다.
“대부분은 짐을 내려 주고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몇 명만 저와 함께 일할 거예요.”
정확히는 에일린을 포함한 다섯만이 저택에 남아 작업을 할 예정이었다.
“아아,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
깜짝 놀랐네. 손볼 곳이 많다 보니 재료를 잔뜩 들고 와서 이렇게 된 모양이었다. 곧 돌아갈 사람들이라니 마음이 놓였다.
이들이 여기서 전부 지내게 된다면 식사 담당인 미아는 물론이고, 청소 담당인 케일란마저 죽음의 노동에 시달려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다들 와서 인사하세요. 레이나 루벨라이트 공녀님이세요. 윈터스노우 공작님께서 친히 소개해 주신 아주 멋진 분이시죠.”
에일린의 손짓에 거리를 두고 쭈뼛거리던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다가와 정중히 예를 갖췄다.
검은색 불꽃 때문에 식겁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로스틴을 언급하니 인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녀님께서 멋진 분이시라는 걸 용케 아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북부 미궁을 손수 정리하셨지 뭡니까.”
지척에 있던 체이스가 대화에 끼어들며 레이나를 추켜세웠다.
“네에? 그 미궁을요?”
“예, 그렇습니다. 거기다가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등불을 밝히고 따뜻한 불꽃까지 선물해 주셨습니다. 다들 무척 감사해하고 있죠.”
앞으로 나서서 레이나의 변호를 열심히 하는 체이스에 에일린이 웃었다.
공작의 기사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레이나를 더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오다가 본 불꽃이 그건가 보네요. 그렇지 않아도 눈이 다 녹아서 오는 길이 한결 편해졌더라고요. 다들 그렇게 생각했죠?”
“예?! 예, 예……!”
“미궁을 정리하셨다니……! 세상에.”
“아니, 그게 가능한 거였어? 북부의 미궁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4대 악몽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체이스의 열변 덕분에 분위기가 제법 누그러졌다. 모두의 눈에 두려움과 공포보다는 경외감이 깃들었다.
“자, 자. 그럼 빨리 일을 시작하죠. 무거운 짐이 잔뜩이니, 어서 옮기고 쉬도록 해요. 내일 아침 일찍 돌아가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에일린의 신속한 지시로 사람들이 서둘러 짐을 옮겼다. 누군가는 말을 옮기고 여물을 먹이기도 했다.
늘 농사만 짓는 풍경에 익숙해져 있다가, 새로운 장면을 보니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이에 레이나가 사람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열심히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미아가 조금 이른 저녁 식사를 알렸다.
“출출하실 텐데 식사 먼저 하세요. 지금 식당만으로는 좁아서 따로 음식 드실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센스 있는 대처에 인부들의 표정이 더없이 밝아졌다.
심지어 식사도 무척이나 호화로웠다. 재료나 종류가 풍부한 것은 물론이고, 맛도 단연코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 중에 최고라고 손꼽을 수 있을 만큼 훌륭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아는 인부들을 위해 다음 날 아침 일찍 식사를 준비했으며, 가면서 먹으라며 도시락까지 만들어 주었다.
“한참은 걸리실 텐데 드시면서 가세요. 간식도 함께 넣어 두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정말 감사합니다!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인부들이 감동의 눈물을 삼켰다. 식사도 식사였지만, 잠자리도 무척 훌륭했다.
두려움의 상징이었던 검은색 불꽃이 내내 몸을 따뜻하게 데워 준 것이다.
지금까지 귀족가에서 일을 꽤 했었지만, 이렇게 좋은 대접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이에 허리를 185도로 숙여 감사를 표한 인부들이 기분 좋게 저택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레이나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다들 잠깐만. 급여 안 받지 않았어?”
“아, 공녀님. 제가 차후에 정산해서 지급할 예정입니다.”
“어차피 내가 줘야 하는 돈 아니야? 그냥 여기서 줄게. 일 끝내고 바로 받는 편이 낫지.”
얼마야? 레이나가 묻자, 에일린이 귓속말로 조용히 속삭였다.
그녀는 곧장 돈을 가져와 인부들에게 지급했다. 에일린이 말했던 것보다 정확히 2배 많은 금액이었다.
“추웠을 텐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무슨 일이 생기면 또 도와줬으면 해.”
“다, 당연합니다!”
“물론입니다, 공녀님!”
하루 만에 인부들은 레이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은 레이나의 불꽃까지 하나씩 손에 들고 처음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돌아갔다.
“아! 죽는 줄 알았네!”
그들이 떠나자마자 케일란이 마당에 뻗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밀린 주방 일에 그가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설거지와 정리 정돈을 도운 것뿐이지만, 양이 너무 방대하여 꽤나 고생을 한 참이었다.
“고생했어, 케일란. 오늘은 좀 푹 쉬어.”
레이나가 그의 짧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그러자 케일란의 얼굴이 머리카락만큼 빨갛게 물들었다.
그가 갑자기 심각하게 말을 더듬으며 소리쳤다.
“아, 아, 아, 아, 아니! 내, 내가 쉬면 미아는 어, 어떻게 하라고! 안 쉬어!”
“그래, 알겠어. 그럼 쉬지 말고 계속 열심히 일해.”
쉬라고 해도 싫다네, 웃기는 놈.
계속 일하라고 해서 투덜거리거나 화라도 낼 줄 알았거늘.
뜻밖에도 케일란은 씩씩하게 주방으로 뛰어가 열심히 남은 뒷정리를 했다.
정말이지 특이한 놈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레이나가 베로니카를 불렀다.
“베로니카, 혹시 마을에 주방 일 도와줄 사람 없어? 사람이 꽤 늘어서 미아 혼자서는 힘들 것 같아서.”
생각해 보니 미리 구했어야 마땅했다. 지금까지 미아가 혼자 감당한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베로니카 역시 동감한 모양인지, 찾아보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걸 어쩌나 싶었는데. 허드렛일이라도 도울 사람이 있다면 미아도 좀 편해지겠죠.”
다행히 레이나의 이미지가 좋아진 탓에 다음 날 바로 주방 보조 일을 할 사람이 출근했다.
식당에서 잡무를 담당했던 경험이 있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미아와 나이 차이가 꽤 있어서 잘 지낼까 걱정했는데.
잡일이 체질이라며 환하게 웃은 그녀는 설거지는 물론, 간단한 재료까지 깔끔하게 다듬으며 싹싹하게 일했다.
‘아니, 이게 또 이렇게 되네.’
역시 행운 1,000의 위력이었다. 행운이라는 게 이렇게 좋은 것이었다면 그냥 고민하지 말고 행운을 찍을걸.
홀로 아쉬워하고 있는데, 하녀장 안나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저어, 공녀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옷감이 모자라서 그런데, 새로 들일 수 있을까요?”
레이나의 옷뿐만 아니라, 하루가 멀다 하고 쑥쑥 자라는 ‘마물 아이’의 옷, 저택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옷과 이불, 커튼 등등에 들어갈 재료가 필요했다.
“공녀님, 사실 저도 재료가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언제 온 것인지 미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집사와 케일란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부족하고 저게 부족하다며 다들 한마디씩 늘어놓았다.
“흠, 하긴. 상주 인원이 늘었으니 지금처럼 물건을 가져오는 건 조금 빠듯하긴 하겠다.”
현재는 일주일에 한 번, 아이스베리 마을 사람들이 물건을 들여올 때 함께 주문을 넣는 상태였다.
하지만 더 많은 물건이 필요할 예정이었기에, 단독으로 주문을 넣고 빠르게 물건을 가져다줄 사람을 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저택과 도시를 오갈 짐꾼이 필요한 거지? 좋아, 알겠어. 자! 그럼 누구 아는 사람 있으면 말해 봐.”
“……?!”
무슨 소리지? 뜬금없는 말에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그 사이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신디가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손을 들었다.
“공녀님! 제 동생이 부모님과 함께 수도 시장에서 장사를 했었어요!”
지금은 부모님께서 귀농하여 마침 쉬는 중이라는 설명이 덧붙었다.
“좋아, 합격! 데려와.”
“……야, 너 진심이야? 뭘 보고 바로 합격시켜? 다른 것도 아니고 돈을 주고 물건을 사 오게 하는 일인데?”
케일란이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뭘 보고 합격시키긴.
“내 엄청난 행운?”
당당한 대답에 그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진짠데. 보면 믿을 텐데.’
불행히도 보여 줄 수 없는 항목이라 안타까울 뿐이었다.
‘부디 레벨을 1,000 찍은 여주가 행운을 올리지 말아야 할 텐데.’
미궁을 없애서 레벨을 올리지 못하게 막기는 했지만, 혹시 또 모르는 거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