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6화
집사가 환호성을 질렀다. 그는 진심으로 기뻤다.
아무리 레이나를 존경한다지만, 홀로 그녀의 기백을 받아 내기에는 힘이 들고 살짝 무서웠다.
“잘 부탁드립니다! 베로니카!”
“나도. 그런데 말이야, 인사 전에 빨리 가져온 모종들을 옮겨야 하지 않겠어?”
“아아!”
최대한 온기를 잃지 않게 잘 가져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추운 날씨에 이 이상 모종들을 밖에 방치할 순 없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인지한 집사가 베로니카와 함께 온실 안으로 모종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행히 베로니카가 보온에 신경을 썼고, 저택 주변에 촘촘하게 설치해 둔 불꽃들 덕분에 피해는 없었다.
일에 몰두한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던 레이나가 천천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일을 맡기자마자 저렇게나 열심히 하는데, 급여로 얼마를 줘야 적당할까 고민하면서.
‘양손은 이미 써서 없고, 가족을 잃고 북부에 떨어진 집사보다 많이 줄 수도 없고.’
그렇다면 남은 것은.
쨍그랑!
레이나의 손짓과 동시에 초대 공작의 황금 동상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왔다.
그것을 주워 든 레이나는 이제 겨우 모종을 다 나르고 쉬고 있는 베로니카에게 다가갔다.
“수고했어. 네 몫의 선금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베로니카.”
툭, 무언가를 주기에 반사적으로 받았는데, 시선을 내려 확인하니 황금으로 만든 귀였다.
“……?!”
아니, 잠깐만. 이거 진짜 황금이야? 정말로? 진심으로? 이게 보수라고?
베로니카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황금 귀와 레이나를 번갈아 보았다.
이 정도면 평생을 레이나의 밑에서 온실을 관리해도 모자란 양이었다.
“왜, 부족해?”
“아니요! 그럴 리가요!”
오히려 넘쳐서 탈인데!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건가.
반의 반의 반만 가지고 나머지는 돌려드리겠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 탓에, 땀까지 흘리며 고민하는 베로니카의 어깨에 거친 손이 닿았다.
돌아보자 집사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은은한 미소를 지은 얼굴에는 자애로움이 가득 차 있었다.
마치 ‘그냥 줄 때 받아 둬.’라는 뜻이라도 담은 것처럼.
“자! 그럼 다시 일을 시작해 봅시다, 수석 정원사 베로니카.”
수, 수석 정원사라니……!
그저 작은 온실 하나를 관리해 줄 뿐인데, 명칭이 너무 과했다.
“그거 좋네. 수석 정원사.”
하지만 그딴 명칭 붙이지 말라고 하기에는 레이나까지 동조한 상황이었다.
머쓱하고 민망하기는 했지만,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흠, 흠. 여,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제게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녀님.”
얼굴을 붉힌 베로니카가 시선을 내리깔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특별한 기대를 가지고 고용한 것은 아닌데 생각보다 성격도, 능력도 괜찮은 것 같았다.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에 레이나가 흐뭇한 미소를 짓는데, 집사가 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아! 공녀님. 그러고 보니 돌려드리는 걸 깜빡했습니다. 이건 남은 황금입니다.”
“응? 이렇게나 많이 남았어?”
거의 처음 줬던 그대로였다. 새끼손가락 일부가 사라졌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물은 것인데, 집사가 허리를 170도로 굽혀 서둘러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환경이 환경인지라, 공녀님께서 사 오라고 말씀하신 농장까지는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농장을 사 오라고 한 적 없다고. 농장을 사서 뭐 하냐고.
집사가 너무나도 송구스러워하는 탓에 눈치를 보던 베로니카가 한마디 거들었다.
“여기 사람들은 식물을 키우지 않아서…… 농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선한 채소가 고기보다 비쌀 정도니까요.”
지시도 하지 않은 농장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다른 마을도 찾아보기는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러니 농장을 구하시는 거라면 외부에 따로 주문을 하셔서 직접 차리시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농장을 산다는 말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건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농장을 구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머리를 숙이는데, 이제 와서 그런 적이 없다고 하면 더 불편한 상황이 될 것만 같았다.
‘……근데 농장을 직접 만든다는 생각, 괜찮지 않나?’
게다가 뜻밖의 솔깃한 정보도 있었다. 외부에 따로 주문을 넣어서 농장을 차리라는 정보 말이다.
“주문하면 가져다주는 거야? 외부에서? 뭐가 되었든?”
“예.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가격만 맞으면 가능합니다. 처음 주셨던 황금 정도면 농장을 차리고도 남겠지요.”
오호라. 레이나의 머릿속에 아주 괜찮은 생각이 스쳤다. 성공만 한다면 일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좋아, 베로니카. 수석 정원사인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레이나가 베로니카에게 황금 손을 내밀었다.
“이걸로 최대한 비싸고 키우기 어려운데, 수요는 많은 모종이나 묘목을 들여와 줘. 가능하다면 맛도 있는 걸로.”
“……예?”
세상에 그런 게 있을 리가, 는 아니고 사실 있긴 했다.
고온 다습한 환경에서만 자라는 희귀한 향신료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 주지 않으면 금방 죽어 버리는 달콤한 과일.
혹은 엄청난 양의 물을 필요로 하는 독특한 풍미의 채소라든가.
건강과 피부에 탁월한 효과가 있지만, 사람이 버티기 힘든-건조하고 추운 곳에서만 자라는 약재도 있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니?”
몹시도 많았다. 일단 그런 것들은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환경을 맞추기도 너무 어려웠다.
‘근데 공녀님께서 주신 황금 손이라면 구하지 못할 것도 없기는 하지.’
문제가 있다고 대답하기에는 레이나가 내민 황금의 가치가 너무 컸다.
“……아닙니다.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지만, 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제 능력으로 그것들을 관리할 수 있을지 조금 의문이라서.”
그렇다고 돈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돈만 있다고 잘 자란다면 이 세상에 희귀하고 값비싼 작물은 없을 것이다.
돈 이상으로 작물을 관리하는 사람의 능력도 중요했다.
베로니카는 자신이 그런 것을 해낼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온도와 물만 맞춰 주면 자라는 작물 말고는 재배해 본 적도 없었고.
그러한 걱정과 더불어 괜한 자기 비하까지 하는데, 레이나의 대답은 간결하기 그지없었다.
“괜찮아. 죽으면 다시 사서 심으면 되니까. 될 때까지 해. 그사이에 뭐라도 열리겠지. 안 그래?”
돈? 많아. 뭐가 문제야?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이며 대답하는 레이나의 눈에 걱정일랑 없었다.
베로니카를 전적으로 신뢰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하다 보면 되겠지, 그만큼의 돈도 있는데 왜? 라고 생각해서였다.
‘아니, 그렇게까지 말하면 더는 변명거리가 없는데…….’
“그렇다고 그런 귀한 작물들만 심으라는 건 아니야. 무난하게 매일 먹을 과일이나 채소, 약초 같은 것도 종류별로 같이 심어 줘.”
레이나가 광활하게 펼쳐진 저택 앞마당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매번 심부름시키기도 귀찮고, 다녀올 사람이라고는 집사밖에 없어서 갖가지 종류를 다 키워서 먹을 생각이거든. 일단은 우리끼리.”
이름하여 자급자족. 남은 것은 마을에 팔아도 좋을 것이다.
물론 이제 막 심는 단계고 자급자족하기도 바쁠 테니, 마을에 파는 건 작물이 너무너무 잘 자라서 흘러넘칠 때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흘러넘칠 때까지 아주 가지가지로 부려 먹겠다는 뜻이었다.
종류별로 갖가지 작물들을 심고, 관리하고, 사 오고, 또 심고, 관리하고, 무한 반복.
그런 속뜻이 뻔히 보이는 베로니카였으나,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이렇게나 필요로 해 주니 기쁘기까지 했다.
결혼하여 북부로 온 뒤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직장이나 업무 같은 건 없었으니까.
심지어 남편과 하나뿐인 아들마저 추우니 집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등장에 베로니카의 얼굴이 사뭇 진중해졌다.
비전문가인 자신이 이 일을 언제까지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만두라고 할 때까진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한시라도 빨리 작물이 자라도록 다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베로니카가 온실 안쪽에 옮겨 둔 모종 하나를 주워 들었다. 바로 심을 모양이었다.
레이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동료가 생겨서 기뻐하고 있는 집사를 빤히 응시했다.
“달리 할 일 있어? 없지 않아? 난 이제부터 쉴 예정이라 시킬 일도 없는데.”
한가하지? 그런고로 오늘은 베로니카와 함께 모종을 심도록.
라는 뜻을 제대로 읽은 집사의 표정이 아주 살짝 어두워졌다.
그렇다고 불만을 표하기엔 급여로 받은 돈이 너무나도 많았다.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잠조차 자지 않고 일해도 과분할 정도로.
“예, 알겠습니다. 공녀님…….”
묵묵히 제 운명을 받아들인 집사가 베로니카의 작업에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