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0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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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루카의 방문으로 조금 늦게 곡창 지대에 도착한 터라, 이미 일꾼들은 작업을 시작한 상태였다.
소문이 점점 더 퍼지고 있는 모양인지 아침부터 곡창 지대 근처가 인산인해였다.
돈을 받고 초상화를 그려 주는 화가까지 보였다. 완벽한 관광지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어제 펠릭스와 함께 열심히 음료를 팔던 대머리도 미리 물을 길어 와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냉큼 달려간 펠릭스가 어제 번 돈의 반을 전해 주었다.
“공녀님께서 주라고 하셨어요!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니까 반씩 나눠 가지래요.”
“이렇게나 많은 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나 진짜냐고 물어본 대머리가 감격을 금치 못했다.
“그냥 막 때리며 부려도 되는 내게 이런 큰돈을 주시다니……!”
용병 일을 하며 근근이 먹고살던 그였기에, 하루 만에 생긴 막대한 돈에 레이나에 대한 충성심이 수직으로 상승했다.
세간에 어마어마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레이나의 밑에서 실력을 키운 뒤, 그녀의 이름을 팔아 멋지게 독립하려고 했거늘.
이렇게 인성까지 훌륭하다니, 레이나의 이름을 앞세울 계획만을 꿈꿨던 스스로가 수치스럽고 창피했다.
“금방 마을에 다녀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힘들게 먼저 장사 시작하지 말고!”
무언가를 결심한 대머리가 서둘러 마을로 향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궁금한 마음이 든 펠릭스였으나, 주위의 모든 걸 신기해하는 루카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느라 금세 궁금증이 사라졌다.
루카가 동년배의 친구를 만난 게 처음이듯, 펠릭스 역시 또래의 친구는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같이 무언가를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꽤 재미있었다.
“이렇게나 넓은 땅에 전부 작물을 심는다는 거지?”
“네! 그렇다고 하셨어요! 여기서 수확할 작물들이 북부 사람들의 식량을 책임질 거라고 하셨어요!”
펠릭스는 레이나에게서 들은 정보를 루카에게 모두 설명했다.
북부에 식량을 수출하고 있던 동부에 큰 타격이 온다는 걸 알면서도, 제 누이가 하는 일이 자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진짜 대단하다……!”
새삼 감탄한 루카가 눈을 반짝였다. 그저 따뜻한 불꽃을 만드는, 소문만 무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저택 앞마당에 온실을 만들더니, 미궁을 없애고, 던전도 없애고, 이번에는 북부에 곡창 지대까지 만들었다.
“북부에서도 작물을 키울 수 있는 거였어…….”
이제 북부는 더 이상 마물만이 들끓는 버려진 영지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렇게나 활기차게 일하며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공녀가 마음에 들어.”
루카가 갑작스럽게 선언했다. 레이나는 북부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있어서 축복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요! 저도 누이-아, 아니, 레이나 공녀님이 좋아요!”
펠릭스가 뒤를 따랐다. 고작해야 이틀밖에 보지 못한 누이였으나, 다정하고 친절했으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강하기까지 했으니 당연했다.
그런 말이 오가기가 무섭게 레이나가 레벨 1,000의 힘이 담긴 바위 격파술을 펼쳤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루카와 펠릭스도 활짝 웃으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사이, 마을에 갔던 대머리는 엄청난 양의 과일과 함께 돌아왔다. 사과, 오렌지 등이 그가 타고 갔던 마차에 잔뜩 실려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눈이 휘둥그레진 펠릭스가 과일들을 살피며 물었다. 그에 대머리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오늘은 과일 주스를 팔아 볼까 해! 어제 번 돈으로 샀지!”
레이나에게 받은 돈이 어찌나 많았는지, 심지어 과일을 잔뜩 사고도 남은 상태였다.
마침 부모님이 과수원을 하고 있던 참이었기에 어느 과일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이 ‘오오오!’ 감탄을 내뱉자, 대머리가 야무지게 조리용 장갑을 손에 꼈다.
“그간 고된 시련과 훈련을 견딘 것은 모두 오늘을 위해서였지!”
그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과일을 쥐어짜 즙을 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레이나의 바위 격파술이 끝이 나고, 과일 짓뭉개기 쇼가 시작되었기에 구경꾼들의 이목이 음료대로 쏟아졌다.
일반 과일 주스 장사꾼과는 다르게 한 손으로, 단번에 사과의 즙을 왕창 짜내는 모습에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검은 마법이 깔린 평야를 보러 온 건데, 이래저래 볼거리가 너무 많았다.
그냥 쥐어짜도 될 터인데 대머리가 괴성까지 지르며 과일즙을 내고 있자, 레이나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돈을 받아서 기분이 좋은가 보네.’
대충 해도 될 일인데 과일까지 사서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꽤 재미있는 광경이기도 했기에, 레이나는 그를 조금 도와주기로 했다.
그녀가 손을 뻗으니 막 뽑아낸 주스가 든 통에 자그마한 검은 불꽃들이 무수히 생겼다.
“……헉?!”
화들짝 놀라 쥐고 있던 사과를 놓친 대머리가 레이나를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대체 무엇이냐며 놀란 그들에게 그녀가 살짝 웃으며 설명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불꽃이야. 오늘이 지나기 전에 사라지겠지만, 주스 한 잔 정도는 시원하게 만들어 주겠지.”
그러니 잔에 하나씩 넣어서 드세요. 미지근하고 따뜻한 주스라니, 쳐다보기도 싫었다.
자고로 주스는 냉장고에서 갓 꺼내 시원하게 마셔야 하는 법이었다. 혹은 얼음과 함께 갈아서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주스는 차가워야 한다는 레이나의 철학 아래, 그렇게 검은색 불꽃을 첨가한 신묘한 주스가 탄생되었다.
“나, 나 한 잔 줘!”
“저도요!”
“저도 한 잔 주세요!”
“난 두 잔!”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주문이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구경만 하던 불꽃을 먹을(?) 수 있다니, 이런 귀한 기회를 놓칠 수야 없었다.
대머리가 초인의 힘을 발휘하여 주스를 만들어 냈기에, 덩달아 펠릭스도 바빠졌다.
“돈은 마음만큼 넣어 주시면 돼요!”
“도, 돈은 마음만큼…… 여기에…….”
어쩌다 보니 옆에 있던 루카도 함께 일하게 되었다. 아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접객 행위라는 것을 해 보았다.
귀족은 노동을 하여 돈을 벌면 안 되는 법인데. 필시 제 형이 본다면 거품을 물고 쓰러질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좀 재미있었다. 어색하고 창피했던 것은 처음 잠깐뿐이었고, 곧 펠릭스를 따라 사람들에게 돈을 돈통에 넣으라고 열심히 설명했다.
그리하여 두 명의 어린 공작 영식들의 열띤 접객으로 돈통에 돈이 넘칠 만큼 들어찼다.
어제처럼 이따금 펠릭스를 알아보는 이들이 있긴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말도 걸지 못하고 떠밀려 사라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세가 멈춘 것은, 누군가의 혈육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마부에게서 소식을 전해 받고 온 로스틴이 할 말을 잃고 음료대 앞에 서서 제 동생을 빤히 보았다.
그에 루카는 몹시도 부끄러워졌지만, 로스틴을 모르는 펠릭스는 해맑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돈은 여기에 마음만큼 넣어 주시면 돼요!”
“…….”
기가 찼으나, 로스틴은 별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꽤 즐겁다는 듯 접객하는 루카를 본 탓이었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었다. 그 까칠하고 붙임성 없는 루카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말을 트고 웃다니.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린 로스틴이 주스 한 잔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지갑을 꺼내 가진 돈을 모두 돈통에 털어 넣었다.
금화 수십 개가 통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펠릭스와 대머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잘 마시도록 하지.”
그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루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레이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는 땅을 열심히 일구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중간중간 레이나가 마법으로 어려운 일을 처리하였기에, 꽤 많은 땅이 일구어진 상태였다.
“전문가만 오면 바로 심겠는데…….”
“그렇지 않아도 내일 올 거다.”
레이나의 혼잣말에 로스틴이 답했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닌 터라 깜짝 놀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스틴을 보았다.
“로스틴?”
손에 주스 잔을 든 그를 확인한 레이나가 쓰게 웃었다.
“미리 말해 두는데, 내가 시킨 거 아니야.”
“알아. 시킨다고 할 만한 성격이 아니니까 의심하지도 않았어.”
“그래? 꽤 착해 보이던데. 부끄러움을 타서 그렇지.”
“……루카가? 부끄러워한다고?”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나 싶어서 로스틴이 미간을 찌푸렸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모두를 까칠하게 대하는 루카가 부끄러움을 탄다니.
어이가 없어진 로스틴이 픽 헛웃음을 흘렸다.
그에 레이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응. 그렇지만 금방 친구를 사귀어서 저렇게 재미있게 놀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상태가 안 좋아 보이면 내가 바로 그만두게 할게.”
그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부탁한다는 듯 로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나는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성인식 초대장 보내 줘서 고마워. 꼭 참석할게.”
‘그래.’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살짝 표정을 굳힌 로스틴이 잠깐의 침묵을 거치곤 입을 열었다.
“……그 건 말인데, 오지 않아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