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17화
대신관이 구할 수 없는 것도 있구나. 하긴, 이렇게나 맛있는 차이니 그럴 법도 했다.
어쩌면 재배하는 것이 엄청나게 힘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는 구할 수 없어진 상황인 걸지도.
알아서 스토리를 만들어 납득한 성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 대신 성녀님께선 언제든 마음껏 드셔도 됩니다. 그 정도의 찻잎은 있으니까요.”
언제 분노했었냐는 듯 대신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성녀는 마음이 놓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대화가 통하지 않아서 막막했는데, 정말 대신관이 자신의 말을 믿을 모양이었다.
안심한 성녀는 차를 몇 모금 더 마셨다. 차에 진정 효과라도 있는 모양인지, 몸과 마음이 나른하게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상태가 진정된 걸 확인한 대신관이 그럼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며 운을 뗐다.
“죄송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 주십시오. 이해는 했습니다만,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천천히 한 번 더 듣고 싶거든요.”
“아.”
꽤 많은 이야기를 쏟아 낸 것 같은데 다시 말해 달라니. 한참이 걸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대신관과 그만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
“성녀님의 귀한 목이 망가지면 곤란하니 적당히 차도 마시면서요.”
대신관이 차를 성녀 쪽으로 밀며 말했다. 배려해 주는 마음이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감격한 그녀는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차를 한 잔 깨끗하게 비웠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대신관이 그녀의 찻잔에 다시 차를 따라 주었다.
자상하기 그지없는 행동에 성녀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일이 잘 풀릴 모양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곤 다시 레이나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레이나는 원래 저랑 같은 세상에서 살던 사람이고……. 어, 사람이고……. 사람, 이고……?”
하지만 어째서인지 제대로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아니, 기억이 흐릿하고 잘 떠오르지 않는 것에 가까웠다.
‘어째서……?’
방금 전까지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것들인데.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성녀가 당혹스러워하자, 대신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괜찮냐고 물었다.
“어디 아픈 건가요? 안색이 좋지 않은데.”
그러면서 차라도 마시라며 찻잔을 건네주었다.
기억이 사라진 충격 때문인지 목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기에 성녀는 대신관이 내민 찻잔을 받아 서둘러 모두 마셨다.
그럼에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목이 마른 게 아니라 기억을 잃은 충격 때문에 초조한 것이었기 때문에 차를 마신들 해소될 리가 없었다.
“괜찮아요? 한 잔 더 마셔 봐요.”
성녀가 여전히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자, 대신관이 차를 한 잔 더 권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성녀가 다시금 차를 들이켜려는데,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시스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상태 이상에 걸렸습니다!]
[회복을 시작합니다!]
상태 이상……?
성녀가 눈을 끔뻑였다. 상태 이상이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왜 상태 이상에 걸린 건지 의문이었다.
성녀가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자, 대신관이 괜찮냐며 재차 그녀의 안부를 확인했다.
성녀는 자신이 상태 이상에 걸렸다는 말을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닫았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 내게 상태 이상을 걸 수 있는 사람은…….’
대신관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왜?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어떤 상태 이상에 걸렸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성녀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괜찮습니까? 차를 조금 더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대신관이 차를 마시라며 다시 권했다. 그의 표정에 걱정이 역력했다.
‘그, 그래. 설마 대신관님이 내게 이상한 짓을 했을 리가…….’
그는 그간 낯선 세계에 떨어진 자신을 보살피고 돌봐 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해를 끼칠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대신관의 말대로 차를 조금 더 마셔 머리를 맑게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반사적으로 차를 조금 더 들이켜자, 시스템 창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상태 이상에 걸렸습니다!]
[회복 중입니다!]
[심각한 상태 이상으로 회복에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 순간, 성녀가 들고 있던 찻잔을 놓쳤다.
쨍그랑-!
대리석 테이블 위로 떨어진 찻잔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원인은 차였던 모양이다. 더는 구할 수 없다는 귀한 찻잎을 넣은, 대신관이 손수 만들어 준 차.
왈칵. 성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떻게, 어떻게 대신관이 자신에게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아니, 대신관님이 내게 뭘 어쩌셨지……?’
하지만 뒤늦게 퍼지는 독 때문에 점점 기억이 흐려졌다. 차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이었다. 회복보다 독이 퍼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성녀님?”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성녀에 놀란 대신관이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물론 그러는 척만 하는 것이었다.
우는 것은 예상 밖이었지만, 상태가 퍽 나빠 보여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걱정하는 표정을 유지한 채 제 차를 성녀에게 권했다.
“일단 차를 마시며 정신을 차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쥔 성녀가 그대로 차를 마시려다가 행동을 멈췄다.
이미 대부분의 기억이 지워져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이 차를 마시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다.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생겨 성녀는 서둘러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제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했다.
“기억이, 기억이 없어요……!”
독이 퍼지는 속도를 회복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기억은 점점 더 사라져 갔다.
대신관이 준 차 때문에 상태 이상에 걸렸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레이나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공작 성의 성인식에서 어떻게 웃고 떠들며 즐거워했는지까지.
혼란스러워하는 성녀의 바로 옆에 대신관이 자리했다. 그는 사색이 된 성녀의 손을 꼭 붙잡고는 괜찮다며 그녀의 기억을 되찾아 주겠다고 위로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제가 다 알려 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결코 웃을 상황이 아닌데, 그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듯 웃고 있었다.
당장 기댈 곳이 없는 성녀는 저도 모르게 대신관의 손을 맞잡았다.
[상태 이상에 걸렸습니다!]
[회복 중입니다!]
어째서인지 자꾸만 눈앞에 나타나는 시스템 창을 대신관에게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며.
*
레이나는 성인식을 한껏 즐겼다.
로스틴과 발이 아플 때까지 춤을 추고, 속이 쓰릴 때까지 모킹주도 실컷 마셨으며, 미아와 공작 성의 주방장이 함께 만든 음식도 배가 불러 더는 먹지 못할 때까지 먹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인이 된 레이나에게 축하의 말을 아끼지 않았고, 그녀 역시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렇게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저택에 돌아와 막 잠이 들려는 레이나의 방문을 누군가가 똑똑 두드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6시. 아니, 아침 6시인가.
누군가는 하루를 시작할 시간이니 아침이 맞을 것이다.
‘지금까지 놀았다니.’
시간이 이렇게나 흐른 줄 몰랐는데, 누군가와 놀며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거였구나.
태어나 처음 맞닥뜨린 진귀한 상황에 눈을 끔뻑이던 레이나가 이내 방문객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기척을 냈다.
“누구야?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펠릭스였다. 새벽까지 신나게 논 레이나와는 다르게, 미성년자인 펠릭스는 열 시가 지나기 전에 먼저 저택에 돌아가 취침한 참이었다.
그래서인지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피부도 보송보송했다. 잠을 아주 잘 잔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깨끗하고 단정한 펠릭스의 옷차림까지 확인한 레이나가 웃는 얼굴로 방문한 까닭을 물었다.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야?”
“저……. 이만 집에 돌아가 보려고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펠릭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집에 돌아가려고 저렇게나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양이었다.
10살밖에 안 된 아이였기에 집에 돌아간다니 다행이기는 한데, 과연 10살짜리 아이가 가출하게 만드는 집으로 돌려보내도 되는지 걱정이 되었다.
“집이 어디라고 했지?”
“아, 동부예요!”
“아, 그렇지, 참. 너 루벨라이트 공작이 두고 갔었지.”
뒤늦게 레이나는 펠릭스가 공작의 하인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동부의 공작저는 말을 타고 한참이나 가야 했다. 하루로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기에 10살 아이에게는 퍽 먼 여정이 될 것이다.
“공작저로 돌아갈 생각이야?”
따로 집이 있냐는 뜻이었다. 그에 펠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겠어?”
“네. 이제 괜찮아요. 제가 해야 할 일도 있고요.”
여기서 지내는 동안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할 일이 있다니 보내 줘야 마땅했다.
침대에서 일어난 레이나는 주섬주섬 외투를 챙겨 입고, 이동석을 찾아 손에 쥐며 말했다.
“내가 데려다줄게.”
“네? 아니에요! 혼자 가도 돼요.”
“어허, 10살이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어른 말 들어. 나 오늘부터 어른이야.”
허리에 손을 얹고 꾸짖는 레이나에 펠릭스가 배시시 웃었다. 역시 자신의 누이는 좋은 사람이었다.
눈을 곱게 접은 아이가 그럼 부탁하겠다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내 손 잡아.”
“네!”
펠릭스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누이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풍경이 휙, 휙 바뀌며 순식간에 동부 공작저 근처에 도착했다.
“자, 봐. 금방 왔지?”
“네.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빨리 이동한 탓에 조금 비틀거린 펠릭스가 다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레이나가 그런 아이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북부로 와. 곡창 지대까지는 멀지 않으니 일단 그쪽으로 와서 도움을 청해. 알겠지?”
작게 웃은 펠릭스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품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레이나에게 건넸다.
“이거, 받으세요. 제 선물이에요.”
가문의 문장 같은 모양이 새겨진 반지였다. 아이가 착용할 법한 반지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