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50화
“공작님! 서둘러서 지우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사이 하인이 세척액을 가지고 돌아왔다.
“무엇이든 잘 지워지는 용액이라고 하니 금방 지울 수 있을 겁니다.”
“아니, 됐어. 자연스럽게 사라질 때까지 내버려 둬.”
“예? 정말이십니까? 그렇지만, 엉망진창에 의미도 불명한 글자인데…….”
마치 아이가 낙서라도 한 것처럼.
“괜찮아. 나가 봐.”
“아, 예…….”
하인은 의아했으나, 로스틴이 그러라고 하니 어리둥절해하며 집무실을 떠났다.
루카의 글씨를 물끄러미 보던 로스틴은 이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로 돌아가 밀린 업무를 시작했다.
*
저택에 개조할 곳이 많았는지, 에일린은 며칠 동안 저택에 머물면서 견적을 냈다.
개중 가장 시급히 만들 필요가 있다고 한 것은 금고나 주방이 아닌 감옥이었다.
사실 벌써 두 번의 습격을 당한 뒤라 늦은 감이 있었다.
레이나의 능력이 특별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운 좋게 침입자를 잡아도 제대로 구속하지 못해서 바로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에일린은 레이나의 저택에 그럴듯한 감옥부터 만들곤, 나머지 재료들을 구하러 북부를 떠났다.
때문에 그때까지 단식 투쟁을 하며 반항하던 아덴은 심연의 저택 최초의 수감자가 되었다.
아덴의 식사 담당은 여전히 케일란이었다.
그는 미아에게서 받은 음식을 들고 감옥 안으로 들어가 다짜고짜 아덴의 입에 밀어 넣었다.
“야! 너 이게 얼마나 귀한 음식인 줄 알아? 왜 자꾸 안 처먹는 거야! 너 때문에 내 몫이 줄었다고!”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며칠째 음식에 손도 안 대는 아덴 때문에 케일란은 분노한 상태였다.
“아오! 차라리 날 주지. 배가 터져도 먹을 수 있는데.”
갑자기 음식 공격을 당한 아덴이 당장 입에 든 것을 뱉어 내며 화를 내려고 했다.
아니, 그러고 싶었는데 불행히도 혓바닥에 감도는 맛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덴은 일단 입에 있는 음식물을 삼켰다. 뱉으면 더러우니까 그랬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한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
“마왕의 부하가 만든 음식 따위, 먹지 않겠다.”
이미 먹었지만.
사실 이따위 음식은 먹지 않겠다고 하려고 했는데, 맛을 보자 감히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쯤 되니 케일란은 현타가 왔다. 그가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야, 공녀가 마왕은 아니지만, 어쨌든 마왕을 지지든 볶든 하려면 뭘 처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 이대로 죽으려고? 마왕의 저택에서 굶어서? 역사에 길이 남겠네. 아주 훌륭하다, 훌륭해. 멋지십니다요.”
“네가 뭘 안다고!”
“너는 뭘 아는데? 나라고 처음부터 이러려고 여길 왔는 줄 아냐? 나라고 마왕을 해치웠다는 타이틀을 달고 싶지 않았겠냐고.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해라. 머리카락이 날아가면서 생각도 같이 날아갔냐? 으이구, 답답해.”
아덴과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았던 케일란이 거칠게 문을 닫고 잠금까지 야무지게 채웠다.
어차피 감옥 주변에 레이나의 불꽃이 둘러져 있어서 도망가지 못하겠지만, 자신이 감옥 담당이기에 확실하게 해 둬야 했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 아덴의 발악 소리가 들렸다.
케일란이 그랬듯, 아덴 역시 머리카락이 사라진 것에 대한 후유증이 컸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큰 충격일 것이 분명했다.
“자, 그럼 이제 저택을 깨끗하게 닦을 시간이군.”
청소는 하찮은 하인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다 보니 꽤 취향에 맞았다.
더러운 걸 치우고, 반짝반짝 광이 나게 닦으면 어째서인지 마음이 개운해졌다.
식사를 하고 와서 배도 부르고, 방금 스트레스도 해소했고.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처엉소르을-해 볼까아-”
케일란은 추측 불가능한 노래를 흥얼대며 걸레를 손에 꼭 쥐고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그사이 레이나는 미궁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동행할 로스틴도 무장을 하고 저택에 도착했다.
“공녀님, 배가 고프실 수도 있으니 이거 가져가세요.”
미아가 정성스럽게 싼 도시락을 건넸다. 로스틴의 몫도 함께였다.
“처음 가는 거라서 대충 훑기만 하고 금방 올 건데, 뭐. 그래도 고마워. 잘 먹을게.”
“고맙군. 감사히 먹도록 하지.”
로스틴이 도시락 가방을 대신 받았다.
그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가져가서 레이나는 뒤늦게 뻗은 손으로 괜히 머리카락을 만졌다.
첫날이고, 염탐하러 가는 것이라 큰 준비는 필요 없었다.
그리 멀지 않은 데다가, 소형 이동석을 사용해 오갈 예정이라 오래 걸리지도 않을 테고.
“좋아, 그럼 가 볼까?”
소형 이동석을 꺼낸 레이나가 로스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레이나의 손을 잡았다.
“조심해서 잘 다녀오십시오!”
“공녀님! 무리하시면 안 돼요!”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하들의 인사를 받은 레이나가 이동석을 깨뜨렸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바뀌었다.
*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무쇠 문이었다. 문은 미궁의 입구를 막고 있었다.
아무나 출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전처럼 혈기 왕성한 자들이 괜한 호기심에 들어갔다가 다시는 나오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지하로 이어지는 미궁의 문을 신기하다는 듯 구경하고 있자, 잡은 손에 가볍게 힘을 준 로스틴이 물었다.
“몸은 괜찮나?”
“응? 몸? 아무렇지도 않은데, 갑자기 왜?”
문에서 이상한 기운이라도 나오나?
의문을 표하자, 로스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소형이라고는 하지만, 이동석을 사용하면 상당한 마나가 소모되어 보통은 힘들어하지. 짐작은 했지만 공녀의 마력이 생각보다 더 대단한가 보군.”
그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나름 레벨이 999나 되고, 마력 몰빵인 캐릭터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칭찬은 레이나를 춤추게 했다. 그녀가 그걸 이제 알았냐며 로스틴의 옆구리를 찔렀다.
간지러웠으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한 로스틴이 잠금장치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그러자 철컥대는 요란한 소리가 수차례나 반복되더니,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럼 이제 들어가지.”
혹여나 바로 무언가가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긴장한 그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위험하니 내 뒤에 바싹 붙어.”
“응, 알겠어.”
로스틴의 말을 따라 레이나는 그의 뒤에 꼭 붙어서 미궁 안에 발을 디뎠다.
- 킬킬킬…….
그 순간,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뭐지?’
레이나가 멈칫했다. 로스틴이 뒤를 돌아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공녀, 괜찮은가? 무슨 일이지?”
다행히 착각이었던 모양인지, 더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레이나가 대충 변명했다.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좀 어두워서.”
“아아.”
확실히 지하라서 그런지 안이 암흑 그 자체였다.
레이나는 허공에 소량의 빛을 뿜는 불꽃을 띄웠다. 그제야 시야가 조금 확보되었다.
그녀는 로스틴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인위적인 구조군.”
미궁은 잘 만들어진 현대의 복도 같았다.
위도, 아래도, 옆도 모두 칼로 반듯하게 자른 듯 깨끗한 회색의 벽이었다.
좋게 말하면 걷기 편했고, 나쁘게 말하면 어디가 어디인지, 얼마나 온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는 분기점마다 불꽃을 띄워서 길을 잃지 않게 표시했다.
‘처음부터 꽤 강한 마물이 나왔던 것 같은데.’
레벨을 상당히 많이 올리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버거워서 여주가 한참이나 헤맸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마물과 조우하게 되었다.
“크르르릉!”
성인 남성만 한 크기의 마물은 새카만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표적을 발견한 놈의 새빨간 눈이 빛났다. 마물은 당장이라도 공격할 듯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잠깐이었다. 곧장 자리를 박찬 로스틴이 단 한 번의 움직임만으로 마물의 몸을 두 동강 내 버렸다.
“뭐야……? 왜 이렇게 세?”
여기 고난이도 던전 아니었어? 왜 적을 한 방에 죽이는데?
레이나가 눈을 끔뻑이자, 로스틴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마물들을 꽤 오래 상대했으니까. 그리고 생각보다 강하지 않군.”
“강해 보이는데…….”
그리고 꼭 ‘안 바쁘다.’, ‘쉽다.’라고 하면 큰일이 일어난단 말이야.
역시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음 마물이 나타났다. 방금 전에 로스틴이 해치웠던 놈과 같은 종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로스틴은 단번에 마물을 해치웠다. 연이어 나타난 다음 마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재빨리 적의 위치를 파악하여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목표물을 처리했다.
뒤늦게 전투에 가담하려 레이나가 손을 뻗기도 전에.
‘……마법보다 빨리 마물을 해치우다니, 인간이 맞는 거야?’
동체 시력이 대단했다. 레이나가 새로운 마물을 발견했을 땐, 이미 로스틴이 검으로 베어 버린 뒤였다.
검으로는 마법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만약 로스틴과 맞붙는다면 이길 가능성이 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꽤 멋있는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