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김사범, 그리고 쿨몽둥이(1)
[5년 총 합 8천만 달러, 전 구단 상대 트레이드 거부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옵션이 붙어 있었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저 조건이 구단에서 폴리에게 제시한 조건이다.
‘1년 천육백만 달러. 나쁜 조건은 아니네. 오히려 폴리를 최고 수준의 클로저로 보지 않았으면 나올 수 없는 조건이야.’
채프먼이나 잭 브리튼, 캔리 젠슨 등 리그를 대표하는 클로저들이 보통 저 정도의 대우를 받는다.
‘그럼 일단 금액적인 면은 아니라는 거고……. 다른 이유가 있나?’
[에이전트와의 지속적인 대화 도중, 갑자기 협상 불가 통보. 사유는 고객의 변심.]
고객의 변심이라…….
[불펜 코치 및 심리 상담사와 의견 교환, 불펜 코치의 코멘터리 - ‘조금 장난기가 많긴 하지만, 워크에씩이 뛰어난 선수였는데 요즘 들어 그런 모습이 희미해져 가고 있다.’, 심리 상담사는 직업 윤리상 상담 내용을 밝힐 수 없다고 말함. 비공식적으로 추적한 결과 주 원인은 ‘권태로움’인 걸로 보임.]
어…… 권태…….
그러니까…… 질렸다는 거지? 아니, 재미가 없다는 건가?
* * *
디트로이트, 단장실.
“쓸 만한 매물이 없습니다. 트레이드를 하고 싶어도 거의 모든 팀의 팜이 황폐해요.”
“이 시점까지 왔으면 약물 이력쯤은 별다른 이야기도 아니지. 그런 녀석들을 포함해도 마찬가지인가?”
알의 물음에 스카우트 팀장이 대답했다.
“일단 올해 시장에서 클로저에게 큰 관심을 보이는 구단이 없습니다. 아메리칸리그에서 선수들을 쓸어모을 구단이래 봤자 보스턴과 양키스, 두 팀뿐인데 마무리 자리는 이미 정해져 있죠.”
“내셔널리그는?”
“그쪽은 정말 받아 올 선수가 없습니다. 아니, 받아 와도 우리 팜의 유망주와 겹치죠.”
“후우…… 빌어먹을 트레이드 거부권!”
“맞습니다. 빌어먹을 거부권이죠. 어차피 마무리 자리가 보장이 안 된다면 제이슨 폴리 측에선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이번 시즌 후에 FA를 선언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문제지. 이미 마음이 떠난 선수라 우리가 잡을 방도가 없으니까.”
지난 6년간 과감한 트레이드와 FA 영입, 해외 유망주의 발굴로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능력 있는 단장이라 인정받은 알 아빌라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도대체 왜 마음이 떠난 거지? 우리가 그에게 무언가 잘못한 게 있나?”
“글쎄요……. 아시잖습니까? 저기 경기장에서 뛰는 사람들은 고액 연봉자가 되는 순간 다른 사람처럼 군다는걸.”
“그렇지. 그렇지 않은 선수는 단 한 명뿐이지.”
“잘 쳐 주면 두 명이죠.”
“아무튼, 일단 계속해서 뒤져 보자고. 트레이드 데드라인 근처쯤 되면 분명 불펜이 허술해지는 팀이 나올 거야. 그게 부상이든, 아니면 부진이든! 정 안 되면 급이 맞지 않은 트레이드라도 여러 명을 붙여 보자고. 어떤 트레이드가 됐던 공짜로 선수를 놔주는 것보단 그게 이득일 테니까.”
빠르게 흘러나오는 알의 말에 이번엔 스카우트 팀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당장 올해 포스트시즌이 문제입니다.”
“그래, 그게 문젠데……. 그…… 더블A, 그 친구 이름이 뭐지? 요즘 잘 나간다는 그 녀석 말이야.”
“‘핏불’ 말씀이시죠? 프랭크 빌더.”
“그래, 그 녀석을 한번 올려 보자고. 메이저에서도 그 지랄 맞은 성질머리가 통할지 궁금하지 않아?”
“음……. 너무 이른 콜업입니다. 아직 마이너에 데뷔한 지 3년이 안 된 선수예요.”
“3년? 붐은 프로 2년 차에 50-50을 이뤘어. 될 놈이면 주머니를 뚫고 나올 거야.”
제이슨 폴리가 협상 중지를 선언했을 때부터 오늘까지, 알의 머릿속에는 팀의 마무리 자리에 대한 고민밖에 없었다.
“우린 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야 해. 루키가 버티기에 어려운 자리일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르지. 제이슨이나 붐, 그리고 케이시처럼 처음부터 놀라운 활약을 펼쳐 줄지.”
* * *
“오늘부터 로스터에 합류하게 될 프랭크 빌더일세. 중간에 던질 녀석이지. 뷰? 프랭크에게 간단하게 안내를 해 줄 수 있겠나?”
“물론이죠.”
“좋군. 안내를 하는 김에 내가 항상 자네같이 공격적인 투구를 하는 투수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려 주게.”
“크하핫! 알겠습니다, 보스.”
필과 같이 아침을 먹은 다음 날, 뉴페이스가 선수단에 합류했다.
‘제퍼슨의 성적이 나쁘지 않은데도 굳이 더블A에 있는 유망주를 콜업했다고? 음……. 구단도 준비를 하고 있는 건가?’
확실히 정보가 있으니 상황이 어느 정도 그려졌다.
마이너 선수들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아마 팀 내부에서 마무리 투수로 키우는 녀석이겠지.
“붐, 시간 좀 돼?”
“물론이죠.”
“오늘 올라온 저 녀석, 네가 우상이래.”
“저요?”
투수라면서, 타자인 내가 우상이라고?
“글쎄, 아무래도 단장은 불펜에 이상한 녀석만 집어넣는 경향이 있으니까.”
“뷰, 뷰도…….”
“나 빼고.”
“하하하.”
하긴, 당장 폴리만 봐도…….
“안녕하세요. 붐. 전 프랭크 빌더입니다. ‘핏불’이라고 불러 주셔도 됩니다!”
“아, 네.”
“고등학교 시절부터 팬이었습니다. 물론, 타격엔 영 재능이 없어 타자를 하진 못했지만요. 하핫.”
나와 비슷한 키, 꽤 덩치가 큰 녀석이 부끄러워하며 말하는 걸 보는 건 조금 힘들긴 했다.
‘그래도 생각보단 정상적인데?’
하지만 단장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의외네요. 투수라면 저보다 케이시나 폴리 쪽이 더…….”
“아…….”
“아닌가요? 하하, 보통은 같은 포지션을 우상으로 삼지 않나?”
“음…… 사실, 마운드 위에서는 별로 배울 게 없어서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하게 쳐다보지만…… 붐은 알죠?”
배울 게 없어? 그 문장 하나에 내 머릿속이 잔뜩 헝클어졌다.
“네?”
“우상은 따라잡을 수 없어야 우상 아닌가요? 따라잡을 수 있는 대상을 우상으로 삼는 사람은 그릇이 그만큼 작은 거죠. 하핫.”
로스터에서 정상인 한 명이 나가고, 비정상인 하나가 들어왔다.
* * *
[텍사스 레인저스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4연전 그 마지막 경기, 6회 초까지 0:0의 팽팽한 스코어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김사범 선수의 홈런성 타구가 레오디 타베라스 선수에게 잡힌 게 컸죠. 그 타구 이후 레인저스는 김사범 선수를 철저히 피하고 있습니다.]
[일로이 히메네즈 선수의 방망이가 이번 4연전 동안 가라앉은 것도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4경기 동안 타율이 1할대에 머물러 있어요. 이 정도의 슬럼프면 한번쯤 다른 선수를 시험해 봐도 될 것 같은데요.]
[론 가든하이어 감독 특유의 기용 아니겠습니까? 항상 주전급 선수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감독이죠.]
[아, 디트로이트 타이거즈가 투수를 교체하네요. 스톨린 카스트로 선수가 매 이닝 주자를 내보내면서 다소 많은 공을 던지긴 했습니다.]
[5이닝을 던지면서 무실점, 5개의 삼진, 그리고 102구, 5선발로서 충분히 제 역할을 해 줬다고 볼 수 있겠네요.]
[마운드에는…… 프랭크 빌더? 오늘 콜업된 선수군요, 더블 A에서 22경기에 출전했고 22와 2/3이닝을 던졌습니다. 와, 22이닝을 던지면서 삼진을 25개나 잡아냈네요.]
[체구만 보면 강속구 투수일 것 같지만, 93마일의 싱커와 슬라이더, 그리고 12시에서 6시로 떨어지는 슬로우 커브가 주 무기인 선수입니다.]
텍사스의 타자가 타석에 들어오고, 구심의 콜과 함께 이닝이 시작됐다.
콜업된 첫날, 바로 실전에 투입된 루키치고는 제법 자연스럽게 투구 폼을 이어 가는 녀석.
‘구위보단 존 구석구석을 노리는 타입이라고 했지? 제발 얼어서 몰린 공만 안 던졌으면 좋겠는데.’
심장이 어지간히 튼튼한 녀석이 아니라면 첫 메이저 등판엔 무조건 떨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떨림은 제구가 주 무기인 선수들을 수도 없이 잡아먹었다.
하지만.
“스트라이크!”
[몸쪽 슬라이더를 아주 꽉 차게 집어넣었습니다! 이야, 공도 공이지만 코스가 정말 절묘했네요.]
[떨어지는 폭보다 횡방향 움직임이 돋보이는 슬라이더입니다. 오른손 투수가 오른손 타자에게 저런 공을 던지면…… 칠 수 있는 타자는 몇 안 되죠.]
녀석은 건방진 멘트를 날릴 만한 실력이 있었다.
적어도 오늘 보여 준 모습만큼은.
“스트라이크! 아웃!”
몸쪽 슬라이더 - 바깥쪽 슬라이더 - 몸쪽 싱커로 삼진.
“스트라이크! 아웃!”
2구 연속 싱커를 던져 파울을 유도해 낸 뒤 원바운드성 커브로 또다시 삼진.
“아웃!”
그리고 마지막은 끝에서 격하게 꺾이는 93마일 싱커로 땅볼 유도.
“워우,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또다시 루키가 튀어나왔군. 이 정도면 거의 전통 아니야?”
“루키는 전통이다. 좋은데?”
나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다.
‘여기서 제대로 된 경험만 쌓이면…… 기대할 만하겠네.’
* * *
“붐, 시간 있나?”
경기가 끝나고, 론이 나를 불렀다.
“네, 물론이죠.”
“혹시 요즘도 하나?”
“네?”
밑도 끝도 없이 뭘 하냐는 말이지?
“그, ‘루키들의 식사’ 말일세.”
“아, 요즘은 좀 뜸하죠. 아무래도 폴리와 제가 가정이 있다 보니.”
“그래? 음…… 다른 게 아니라 프랭크를 한번 거기에 데려가 줬으면 해서.”
“프랭크를요?”
가끔 론이 이런 부탁을 할 때가 있다.
아무래도 그 모임 아닌 모임의 멤버들이 다 좋은 성적을 올리기도 했고, 새로 팀에 합류한 루키들에겐 그만큼 동기부여가 되는 자리가 없다나?
“일단 물어볼게요. 오늘 디트로이트로 돌아가면…… 10시? 내일이 휴식일이니 별다른 일정이 없으면 다들 거절하진 않겠죠.”
“그래, 아 그리고…… 아닐세.”
론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론이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알 것 같았고.
시간이 흘러 디트로이트로 돌아가는 전용기 안.
“오늘? 좋지.”
“오늘 저녁? 음…… 간단하게 먹는 거면 나도 좋아.”
오케이, 이삭과 케이시는 콜했고.
“야, 무슨 이야긴데? 뭐? 저녁식사? 나도, 나도 갈래! 영어로 해보라고? 음…… 아이 원트 조인 유어 그룹?”
옆에서 듣고 있던 김태연도 엉겁결에 합류했다.
“네? 네! 물론이죠! 혹시…… 오늘 제 첫 등판을 축하해 주시는 건가요? 맞죠? 하하핫!”
핏불인지 비글인지 아직 모를 루키도 당연히 참가.
‘이제 마지막인데…….’
“폴리, 오늘 뭐해?”
“오늘? 별다를 거 없지. 주니어가 깨어 있으면 좀 놀아 주다 자는 거?”
“오랜만에 저녁 어때? 모두 모인지 꽤 됐잖아?”
“글쎄, 조금 피곤해서.”
피곤하긴 개뿔.
3일 연투하고 나서도 밥 먹자고 날뛸 때는 언제고.
“같이 먹자. 오늘은 술도 한잔 하고.”
“술?”
“술.”
“파크에 차를 놔두고 왔는데.”
“나는 수리가 데려다줬어. 내가 운전할게.”
“음…….”
“그러지 말고, 가자. 간다고 알고 있는다?”
후우.
어색해서 혼났네.
평소에 컨디션 관리니 뭐니 하면서 늘상 빼는 케이시만 꼬시다가 폴리를 꼬시려니 익숙하지 않아 꽤 힘들었다.
‘론의 부탁이긴 했지만…… 판이 깔렸으니 오늘 승부를 보지 뭐.’
오늘 난, 폴리를 털 거다.
도대체 왜 어울리지도 않는 맘고생을 하는 건지, 궁금해 미칠 거 같으니까.
* * *
“제가 왜 핏불이냐면…… 첫 등판 때…….”
“그럴 수 있지. 좋은 판단이었어.”
“그게 좋은 판단이라고? 투수라는 종족은 도대체가…….”
“엄…… 아이 띵크 유 아 베리 어그레시브, 벗 아이 라잌 유.”
“왓?”
이상한 조합의 이상한 대화를 뒤로한 채, 묵묵히 맥주만 마시고 있는 폴리에게만 집중했다.
“폴리.”
“왜?”
“뭐가 문제야? 요즘 너, 너답지 않아.”
“뭐?”
“평소처럼 신나게 공을 던지는 게 아니라…… 그냥 멍하니 공만 뿌리고 있잖아. 요 근래.”
남자는 직구지.
앞 뒤 다 자르고 들이대는 내 질문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남은 맥주를 목구멍으로 부어 버린 폴리가 말했다.
“재미가 없어.”
“재미?”
“마운드에 올라도 적당히 공을 던지면 삼진, 혹시나 맞으면? 간단하지. 땅볼만 유도하면 되니까. 다른 팀에선 내야를 벗어날 공도 다 잡아 주잖아?”
“그게 무슨…….”
“난 적어도 그런 공을 유도할 정도의 능력은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렇게만 하면 내 커리어에 세이브가 추가되지. 근데.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거야.”
이 새끼가?
잘 잡아 줘도 지랄이네?
“나 정도 되는 투수가 아니어도, 그래, 저기 앉아 있네. 저 핏불이니 비글이니 하는 녀석도 해낼 수 있는 거라고. 그리고 그걸 깨닫는 순간부터 재미가 없어.”
“재미가 없다…….”
“그래. 재미가. 붐, 너도 알지? 아니까 물어봤겠지. 아무튼, 그래. 그래서 조금 질렸어.”
난 또 다른 이유가 있는 줄 알았다.
내가 모르는 -그럴 리가 없지만- 다른 팀원들과의 불화라던가, 아니면 폴리가 아닌 다른 가족들이 디트로이트를 싫어한다던지, 아니면 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은 거라든지.
하지만 폴리는 그냥 호강에 겹다 못해 쌩 쑈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런 자기를 아주 쿨하다고 생각하겠지. 마치 대단한 무언가가 된 것처럼.
“야, 너 다른 팀에 가면 나하고 상대해야 하는데. 자신 있냐?”
“뭐? 글쎄…… 나도 쉽진 않을걸?”
“내가 볼 땐 쉬울 거 같은데.”
“흠?”
“내일 파크로 나와. 내가 보여 줄 테니까. 네가 지금 얼마나 멍청한 짓을 하려고 하는지 알려 줄게.”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코치들, 그리고 론이 무조건 말렸을 테지만…….
대충 설명하면 들어줄 거다. 아마도.
“뭘 하려고?”
“붙어 보자고. 진짜로.”
마지막 말이 조금 컸는지, 어느새 집중된 시선 속에서 난 말했다.
“네 타석 중 단 한 타석이라도 내가 홈런을 못 치면…… 뭐든 해 줄게. 그게 뭐든 간에.”
일반 나무배트가 아닌, 쿨몽둥이가 필요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