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김사범, 2021시즌(폭탄 돌리기)(1)
나는 컨디션 조절에 조금 둔한 편이다.
아니, 휴식의 중요성을 모른다고 해야 하나.
휴식을 취하려고 해도, 항상 최선을 다하고 그 이상을 해내야 경기에 나갈 수 있었던 기억이 그걸 가로막는 느낌?
그런 내게 강제로 휴식 명령이 내려졌다.
딸깍.
[디트로이트의 붐, 4경기 출장 정지 확정. 벌금 3.000달러 부과.]
[양키스, 마무리 투수와 70홈런을 치는 주전 유격수가 빠진 디트로이트에게 완패하다.]
[이삭 페레데스 4출루, 페이스 달턴 2홈런 4타점, 크리스틴 스튜어트 그랜드 슬램. 붐이 없는 틈을 메꾸려 쉴 새 없이 때려 대는 디트로이트의 타선.]
[양키스의 애런 분 감독, 팬들의 비난에 직면하다.]
[양키스의 유명 팬, 자신의 방송에서 ‘두 번째 경기, 마지막 타석에서 붐을 거르지 않았다는 건 이번 시즌을 망치는 행위였다.’ 발언, 양키스 팬들의 공감 이끌어.]
[양키스 vs 타이거즈, 전쟁의 서막]
다른 팀원들이 탬파베이와의 원정길로 떠날 때, 나는 디트로이트로 돌아왔다.
강제로.
“제발 쉬고 있게, 아니 무조건 쉬는 걸 추천하지. 이번 시즌은 길 테니 지금 푹 쉬어 두는 게 팀에게 훨씬 이득이야.”
출장 정지 상태라도 팀을 따라가기 원했던 나를 말리며 론이 했던 말이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다고 코메리카 파크에도 출입을 금지시킨 건 너무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리를 돌려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세기의 첩보영화를 찍고 있을 때, 미기가 한 말이 자꾸 맴돈다. 중요한 걸 놓친다는 말이 이렇게 다가올 줄이야.
지이이잉.
[뭐해? 잘 쉬고 있어? - 수리]
[물론이지.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였어]
[그래? 집에만 있으면서 쉬니까 어때? - 수리]
[심심해…….]
정말로, 정말로 심심하다. 이번 기회에 정말 온몸에 있는 피로를 다 날리기 위해 아무것도 안 하다 보니 더욱 더.
[그게 전부야? 올바른 답이 아닌데……. - 수리]
이렇게 수리가 메시지로 놀아 주지 않았으면 더 심심했을 거다.
[그리고, 보고 싶어.]
이게 여자친구들 사이에서는 업계 포상이라며?
나도 이론적으로는 연애 박사다.
정말로.
[뭔가 억지로 받아낸 느낌인데. - 수리]
[정말 보고싶은데? :)]
[그래? 그럼 문을 열어 봐. - 수리]
맙소사…… 설마?
난 3루에서 홈을 노리듯, 맹렬한 기세로 현관문을 향해 돌진했다.
“Hi! 여기가 김사범 선수 집 맞나요?”
어, 음…… 이런 상황극엔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일해라 우뇌!!
째깍째깍.
시계의 초침 소리를 몇번 듣고 나서야 난 괜찮은 상황극 대사를 생각해 냈다.
“이렇게 사적인 공간에 찾아오는 건 불쾌합니다. 경찰을 부르기 전에 저기 담장 밖으로 나가 주시죠.”
수리의 큰 눈에 가득하던 빛이 점점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5분 뒤의 내 모습을 예지할 수 있었다.
잠시 뒤.
“나 문신할까? 수술자국, 너무 흉하지 않아?”
“아냐, 괜찮아. 난 네 모습 그대로가 제일 좋아.”
“그래도……. 흉터 제거를 해도 자국은 남는다던데…….”
“그것마저 좋아할 자신 있어.”
인간이란 동물은 꽤 적응이 빠른 동물이다. 화내기 직전의 수리의 입을 물리적으로, 아주 효과적이게 막은 나는 수리를 상황극 전의 모습으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수리, 정말 이렇게 침대에만 누워 있어도 돼? 오랜만에 휴간데…….”
“괜찮아. 난 익숙한데? 생각보다 여기 누워 있으면서 할 수 있는 게 많아.”
“……그건 그렇지. 할 수 있는 게 많지.”
“그거 말고. 일단 오늘은 이렇게 같이 누워 있고 싶어. 이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같이 누워 낮잠을 좀 자고, 맛있는 저녁을 먹고…….”
내 팔을 베고 누워 이야기하는 수리의 목소리가 점점 늘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랜 기간 병마와 싸우다 보니 체력이 조금 약하니까.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너무…….”
결국 잠에 빠져든 수리
그런 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카브레라! 탬파베이의 어린 투수를 사정없이 두들겨 대고 있습니다!]
타다다다다다!
[붐이 빠져도 여전히 위력적인 디트로이트의 타선입니다. 마운드의 마이클 풀머도 이번 시즌 가장…….]
음……. 내가 얼마나 잔 거지?
꿈을 꾸지 않을 정도로 깊게 잔 거 같다.
“일어났어?”
코를 간지럽히는 구수한 냄새.
그리고 TV 속 해설자의 목소리.
“어…… 큼, 음. 아아. 이게 다 뭐야?”
“뭐긴, 한국 음식이지. 급하게 배우긴 했는데…… 맛은 잘 모르겠어.”
식탁에는 온갖 종류의 음식이 ‘쌓여’ 있었다.
‘갈비, 계란말이, 된장찌개, 저건 나물인가? 저건 삼겹살 같고…….’
“언제 이 많은 음식들을 다 준비한 거야?”
“자기가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사이에.”
“이 많은 걸 몇 시간 만에?”
“시간을 보세요. 사범 어린이.”
고개를 돌려 본 시계엔 200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자기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12시쯤이었으니까…….
“8시간을 잔 거야? 내가?”
“사람도 곰처럼 잠을 잘 수 있는지 처음 알았어.”
“어…… 음…… 미안해.”
“왜 미안해? 재미있는 경험이었는데?”
“아니, 날 위해서 여기까지 와 줬는데…….”
“괜찮아. 지금 난 충분히 행복하니까. 정 미안하면…… 여기 있는 음식,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 줘.”
물론 다 먹어야지.
소금국에 설탕밥이라도 무조건 다 먹을 거다.
“당연하지. 중간에 홍수가 나서 이 집이 침수가 되더라도 다 먹고 도망칠 거야.”
“그래? 지켜볼게!”
* * *
아주 늦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는 오랜만에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맛있었어?”
“정말로. 최고였어. 엄마보다 더.”
이건 빈말이 아니다. 만약 엄마가 내 말을 들으신다면 섭섭해하시겠지만.
‘애초에 급하게 배운 요리솜씨로 이런 맛이 나오는 게 이상한 거 아냐?’
내가 먹어 본 한식 중에 최고였다.
밥솥에 한가득 있던 밥이 반이 넘게 없어질 정도로 정신없이 먹는데 집중할만큼.
“다행이다. 헤헤. 아, 경기 끝났네. 오늘 경기 POG(Player of the Game)은 이삭 씨인가 봐.”
“끄……읍! 후. 응. 그런가보네? 오늘 잘했나 본데?”
생리활동에서 비롯된 사소한 위기상황을 무사히 넘기고, 수리와 나는 나란히 앉아 거의 끝나가는 이삭의 인터뷰를 시청했다.
[오늘 경기, 5개의 안타를 치며 경기를 승리로 이끄셨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최고입니다. 이 자리에 붐이 없다는 게 참 다행스럽네요.]
[아, 선수단과 따로 행동하고 있나요?]
[미리 디트로이트에 폭약을 매설하러 갔죠. 아무튼, 붐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여유롭게 인터뷰를 하진 못했을 겁니다.]
아, 맞다. 워터 붐을 했어야 했는데. 이번 시즌 첫 POG였지? 아쉽네, 아쉬워.
[오늘 승리로 디트로이트는 106승을 거두며 팀 최다승리 기록 경신에 한 경기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내일 경기, 승리를 자신하시나요?]
[물론이죠. 우리 선수단은 자신감에 차 있고, 우리를 막기 위해서는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겁니다. 팀 최다승리 기록을 넘어 메이저리그 기록을 노리고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이번 시즌은 타이거즈의 시즌입니다. 우리는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준비가 됐어요. 우릴 믿고, 응원해 주시면 됩니다.]
[지금까지 이삭 페레데스…….]
이삭이 인터뷰에서 저렇게 자신감을 내뿜는 건 처음 보는 거 같다.
“원래 저렇게 말했었나? 이삭 씨가?”
“아니. 오늘따라 조금 더 당당해진 거 같은데?”
그동안 저런 자신감을 어떻게 참았는지 몰라.
나 때문인가?
“자기가 없어서 그런가 보네.”
“그렇지?”
“나라도 저럴 거 같은데? 자기만 없으면 별거 아닌 팀이라고 평가하던 전문가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말들을 다 뒤집고 2승을 올린 거잖아. 그것도 같은 리그, 다른 지구의 우승권 팀들을 상대로.”
아. 그럼…….
“잘 모르지만, 아마 다른 팀원들도 엄청 신나하고 있을 거야.”
음. 일리가 있는 소리다.
그동안은 아무리 잘해도 내 그늘에 가려져 있을 수밖에는 없었을 테니까.
“좋은 일이네.”
“그럼. 좋은 일이지.”
야구란 스포츠는 한 사람이 잘한다고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니까.
단기전이면 몰라도, 장기적으로 팀 자체의 자신감이 올라가는 건 아주 긍정적인 신호라고 볼 수 있지.
내가 이삭의 인터뷰를 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와 메시지를 나누고 있던 수리가 내게 말했다.
“아빠가 언제 한번 놀러 오래. 시즌 끝나고.”
“좋지. 아버님 스케줄 물어보고 한번 갈게.”
“요즘 아빠 하는 일 없어서 괜찮을걸? 그냥 별말 없이 와도 될 거야.”
“음…… 그래도…….”
그러고 보니 아버님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었네.
‘물어봐도 되나?’
“우리 아빠가 무슨 일 하는지 궁금해?”
……내 머리 위에 말풍선이라도 있나?
“음…… 뭐, 조금? 무슨 일을 하시든지 상관없긴 한데, 그냥 순수하게 궁금하긴 해.”
“나도 잘은 모르는데…….”
* * *
텍사스. 필의 서재.
“이번 분기 보고서입니다.”
필은 업무용 책상에 앉아 부하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건네준 서류를 받아들었다.
“제네시스 키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놈이 또 나타났다던데, 시장 분위기는 어떻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사라락.
“이 시장이 활성화된 지도 10년 가까이 되가는군. 여전히 돈을 쓸어 모으기 좋은 곳이지만…….”
“이제 슬슬 큰손들이 참전할 겁니다.”
“그 전에도 참전은 했었지. 단지 소극적으로 접근했을 뿐이야. 슬슬 남은 물량을 정리할 때가 왔어.”
꿀꺽.
부하 직원의 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모두…… 처분하실 겁니까?”
사락.
“음…….”
한참을 눈을 감고 생각하던 필이 이내 결정한 듯 부하 직원을 향해 말했다.
“일단 채굴장으로 쓰던 부지는 슬슬 정리하지. 장비도 팔 수 있으면 팔고. 우리가 쥐고 있는 물량이 어느 정도지?”
필의 물음에 핸드폰을 꺼내 무언가를 확인하는 부하 직원.
“현재 시세로 따지면 6억 달러 정도입니다.”
“흠…… 일단 장외거래를 먼저 알아봐. 요즘 중국 쪽이 거래를 다시 연다는 소문이 있더군. 그쪽 큰손들하고 이야기를 하면 될 거야.”
“네.”
“나가 봐. 중간에 보고하는 거 잊지 말고.”
부하 직원이 나가고, 혼자 남은 서재.
필은 끊임없이 혼자 중얼거렸다.
“닷컴, 서브프라임, 크립토커런시, 이제 다음은 뭐지? 자…….”
* * *
“투자?”
“응. 투자회사라고는 하는데…… 그건 그냥 이름만 회사고 아빠 돈으로만 투자한다던데?”
“아…… 어쩐지. 실력이 엄청나신가 보네?”
“음, 아마도? 사실 자세히는 몰라. 내가 물어봐도 그냥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많다는 이야기만 해 주셔서.”
그 정도로 돈이 많으려면 어느 정도로 돈이 있어야 하는 거지?
‘음…… 백억? 이건 너무 적나? 그럼…… 오백억?’
큰돈을 만져 본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 규모가 잘 잡히질 않는다.
나는 한 십억만 있어도 충분히 즐겁게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뭐, 어차피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아빠도 십분의 일? 그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기부한다고 했어.”
“대단하시네. 정말로. 진심이야.”
“우리 아빠를 나한테 칭찬해 봤자 뭐 떨어지는 건 없을걸?”
거짓말. 광대가 하늘 끝까지 올라가 있으면서.
귀여운 웃음을 짓고 있는 수리의 손을 잡아끌며 귓가에 속삭였다.
“나가자. 드라이브하러.”
아직 휴가가 끝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남았고, 예상하지 못한 낮잠에 이 밤은 아주 길 예정이니까.
“……좋아!”
아름다운 애인과 함께하는 드라이브.
아주 예전에 꿈꿨던, 내 작은 꿈이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