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김사범, 2021 포스트 시즌(열망)(5)
[김사범 선수의 1회 초 홈런 이후로 게임은 타격전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시미즈 루이 선수의 공이 예리하긴 한데, 다저스 타선을 막기에는 조금 역부족인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구와 변화구 위주로 타선을 상대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포스트시즌처럼 세밀하게 분석이 이루어지는 무대에서는 약해지기 마련이죠.]
“시미즈, 괜찮나?”
“괜찮아……. 아직은…….”
3회 말. 노아웃 상황에서 2루에는 버두고, 1루에는 밸린저가 서 있다.
볼넷 한 개와 안타 한 개. 2점의 여유가 있지만 내셔널리그 룰로 진행되는 경기라 미기가 나오지 못한 걸 생각하면 조금 아슬아슬한 상황.
페이스도 그걸 느꼈는지 꽤 빠르게 마운드를 방문했다.
“시미즈. 일단 5점까진 괜찮아. 나와 이삭이 홈런 3개 정도 더 칠 거거든.”
투수들은 기본적으로 2살짜리 아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우쭈쭈가 필요하다.
“그래. 붐이 말한 대로 아직 칠 홈런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걱정 말고 던져.”
“알겠어요…….”
문제는 마운드의 아기가 그냥 일반 아기가 아니라 개복치의 치어라는 거다.
“노아웃 1, 2루. 스프링어 타석이니 따로 시프트를 걸진 않을 겁니다. 대신 상황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길.”
[오늘은 오프너 전략이 아닌 일반적인 로테이션을 돌린 디트로이트입니다만, 지금까지로 봐선 좋은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뷰 버로우즈 선수가 요즘 너무 많은 공을 던졌죠. 승리가 확실하다면야 다른 필승조를 투입해도 됐겠지만, 혹시라도 패배하게 되면 타격이 더 커질 가능성이 높으므로 시미즈 선수를 선발로 내보낸 것 같습니다.]
사실, 크게 걱정되진 않는다. 시미즈-페이스 배터리야 워낙 예전부터 호흡을 맞춰 왔고, 다저스는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정규시즌 후반처럼 압도적인 공격력을…….
따아악!!
……이제야 보여 줬다.
[조지 스프링어 선수의 타구가 담장을 향합니다! 이 타구는! 담장을 살짝 넘겼습니다! 역전 쓰리런!]
[슈트, 그러니까 역회전 공이었는데……. 몰렸어요. 이건 벤치에서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단기전에서 투수 교체 타이밍은 굉장히 중요해요.]
순식간에 비워진 루.
시미즈의 어깨가 내려앉아 있다.
“헤이! 시미즈!”
대답 없이 마운드 위에서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 녀석.
“이번 이닝까지만 막아. 어차피 다음 이닝엔 내가 선두타자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시미즈.
‘잘 막아야 할 텐데…….’
* * *
인천, 한 남자의 자취방.
띠띠띠띠.
철컥.
“야, 어떻게 되어 가고 있냐? 나 데이터 없어서 2회 초까지밖에 못 봄.”
“왔어? 일찍 온다며.”
“자느라. 왜 메이저리그는 야구를 아침에 하는 거야?”
“개소리는. 너 유니폼 입고 온다며?”
“아무리 그래도 차마 이 차림새에 유니폼 입고 버스 타긴 좀 그렇더라. 잠깐만.”
두 남자가 각각 99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진지하게 TV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보자, 2대3? 4회 초네?”
“김사범이 한 방 쳤는데 스프링어가 역전 삼리런 날림.”
“걔는 시리즈 내내 삽푸다가 이제 와서?”
“근데 그 위로 폭삼 폭삼 폭삼이다. 홈런 맞고 3타자 아웃시키는데 공 열두 개도 안 던졌어.”
“아…… 시미즈……. 진작에 좀…….”
[타석에 김사범 선수가 들어섭니다. 첫 번째 타석에서 홈런을 기록했죠.]
[다저스는 잘 생각해야 합니다.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걸어 내보내야 하고, 걸어 내보낸다면 3루는 준다고 생각해야 해요.]
“쟤는 왜 맨날 볼넷 아니면 홈런이냐? 타석에 나올 때마다 각 잡고 긴장해야 해서 피곤해 죽겠네.”
“제발 한국인이면 디트로이트 응원합시다.”
“네가 류현 나가고 다저스에서 디트로이트로 갈아타는 순간부터 거긴 오염되기 시작했어.”
“사랑은 변하는 거다.”
“개소리.”
[펑!]
“캬, 공 좋고.”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뷸러의 공을 보며 감탄사 섞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응. 곧 관중석에 떨어질 공.”
“근데 폴대 밖. 파울임.”
“노노. 폴대 맞춰서 부러트릴 거. 우리 갓갓갓 모욕하지 마셈. 저번에 관중석…… 와씨!”
[따아악!]
[김사범 선수의 타구가 오른쪽 담장을 향해! 아 이 타구가 과연! 아!]
“응. 파울.”
[조금만 안으로 들어왔어도 홈런이 될 타구였는데요. 아쉽습니다.]
디트로이트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입맛을 다시며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남자에게 물었다.
“야, 맥주 없냐?”
“맥주? 아침부터?”
“먹자. 맥주는 이럴 때 먹으라고 있는거야.”
다저스남이 투덜대며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고 있을 때, 디트로이트남의 괴성이 들렸다.
“우와아아아아악!”
“왜? 왜?”
“저 개xx가 김사범 머리로 공을 던졌어! 미친 거 아냐? 심판! 시x! 퇴장 줘야지!”
“맞았어?”
“그랬으면 저 모니터가 멀쩡했겠냐? 피했지!”
다저스남이 디트로이트남에게 웃으며 슬쩍 맥주를 건넸다.
“야, 원래 야구가 그런 거야. 저러면서 기죽이고 그러다가 막, 인마. 알면서 그래? 이거 먹고 열 좀 내려.”
* * *
100마일 정도 되는 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면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알았다.
무시무시한 소리가 나면서 그 풍압으로 속눈썹이 흔들리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화가 난다.
마치 목숨을 위협당한 것처럼.
“고의가 아냐. 빠졌어. 정말이야.”
뒤에서 누군가 중얼거리는데, 사실 별로 듣고싶지 않다. 빨리 저 마운드에 올라가서 저 녀석을…….
[아. 마운드의 워커 뷸러 선수가 모자를 벗으며 살짝 고개를 숙이네요. 실투였다는 의미죠?]
[맞습니다. 한국에서야 가끔 볼 수 있는 상황이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드문 경우인데요. 뷸러 선수도 김사범 선수가 두려운 모양입니다.]
[이 상황에서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진다면 불리한 건 다저스겠죠.]
‘저 정도까지 하는데…….’
들끓는 마음을 진정시킨다.
잘 진정은 안 되지만.
타석에 들어섰다. 예전보다 더 바짝.
손에서 빠졌다고는 했지만, 결국 그 공이 오려던 코스는 몸쪽 깊은 곳이었을 거다.
그 편이 오른손 투수,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삼는 녀석에게 더 유리했을 테니까.
‘몸쪽은 일단 버리고. 커터나 슬라이더를 노려야겠네.’
아 커브도.
4구째, 또다시 높은 공이 들어왔다.
“볼!
이제 카운트는 2-2. 저 녀석이 진짜 투수라면 피하진 않겠지.
투수가 다섯 번째 공을 던졌다.
‘패스트볼!’
이미 충분히 눈에 익혀 놓은 구질이다.
뇌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척수에서 내 배트를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스윙이 절반을 넘겼을 때, 포심으로 보이던 공이 갑작스런 변화를 일으키며 몸쪽으로 휘어들어왔다.
싱커, 혹은 투심 패스트볼이라 불리는 구질.
하지만 난 이미 시작한 스윙을 멈추지 않았다.
떠억!
스윗 스팟이 아닌 약간 안쪽에 맞은 타구가 외야를 향해 나아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 김사범 선수 쳤습니다! 이 공은…… 좌익수, 중견수, 유격수 사이에 떨어졌습니다!]
[텍사스 안타네요. 거의 배트 중간에 맞았는데도 그걸…… 아! 김사범 선수 2루까지!]
[2루수가 잠시 한눈을 팔고 있었네요! 2루에 아무도 없습니다!]
[세잎! 세잎이에요!]
멀거니 서서 타구를 구경하고 있는 2루수까지.
‘미기가 없어서 좀 아쉽지만. 스튜어트도 요즘 괜찮으니까.’
안전하게 1루에서 도루를 해도 되지만,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스튜어트가 카운트에서 손해를 볼 수도 있으니까.
[크리스틴 스튜어트 선수가 타석에…….]
따아아악!
워후. 좋은데?
[디트로이트가 단숨에 경기를 다시 뒤집었습니다! 오늘 4번타자로 출전한 크리스틴 스튜어트 선수의 벼락같은 초구 투런포!]
* * *
인천, 하인대 후문.
다저스남과 디트로이트남이 불판에 고기를 올려놓으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아니 그 자식을 도대체 어떻게 막아야 하냐고.”
“그 자식이라니. 우리 갓사범 형님에게!”
“걔랑 우리랑 동갑인 건 아냐? 아니 공을 그렇게 빼는데 그걸 끝까지 따라가서 때려 버리면…….”
“우리 형님은 그런 거 안 따지신다. 거슬려? 그럼 넘겨야지. 감히 볼을 3개나 던져? 그럼 넘겨야겠네. 이러는 분이셔.”
“하아……. 오늘은 이길 줄 알았는데…….”
“야, 너 설마?”
“몰빵했다.”
“너 그 돈 부모님이 군대 가기 전에 아껴 쓰라고 주신 거라며.”
디트로이트남의 한마디에 다저스남의 어깨가 추욱 내려앉았다.
“……이모! 여기 이슬 하나요!”
디트로이트남은 그런 다저스남을 위로하기 위해 결국 모든 우울한 자의 어버이이신 주신(酒神)을 소환하며 말했다.
“오늘 여긴 내가 쏜다.”
“……너도 돈 없잖아.”
“그냥 먹어 자식아.”
“고맙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순식간에 너댓 병의 주신님이 굴러다니는 테이블에는 어느 한 많은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니 내가 4회? 맞냐? 아씨, 모라. 아무튼. 그때 안타 치고 뒤에 홈런 맞은 거는 상관없는데, 왜 또 치냐고!”
“야, 원래 하나로는 만족 못하는 사람이야. 막 여자친구도 대여섯 명은 될걸? 그 덩치에 야구도 잘하는데 연애를 못하겠냐?”
“그딴 바람둥이 새끼들은 다 죽어야 해! 그런 놈들 때문에 너랑 내가 이렇게 주말에 야구나 쳐! 보면서! 응!”
“……아오, 뼈 맞으니까 존나 아프네.”
“겨우 따라간다 싶으면 치고, 또 치고, 거르니까 기어코 3루까지 뛰어서 포수 멘탈 존나 쓰레기 만들고. 뭐? 홈스틸?”
“홈스틸이 아니라 낫아웃 때 뛴 거지.”
“아무튼, 아오. 내가 진짜 한국인이면서 디트로이트 팬 아닌 게 잘못한 거네. 내가 아주 잘못했어. 계속 이렇게 하다 보면 호이가 둘리가 되는 건데, 맞지?”
다저스남이 실시간으로 분노를 토해 내고 있는 그 시각, 때마침 TV에서 스포츠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김사범 선수가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3타수 3안타 2홈런 3타점으로 맹활약을 했습니다.]
“매앵~활약을 했지. 암.”
[1회 초, 김사범 선수가 벼락같은 스윙으로 투런포를 쏘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4회. 잠시 아찔한 순간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이번엔 애매한 위치의 타구가 그라운드에 떨어지자 LA 다저스 수비의 틈을 노려 2루에 안착하는데 성공합니다.]
“대단하셔. 암. 대단하고말고. 군대나 가라!”
[다저스가 저스틴 터너 선수의 홈런으로 다시 추격을 시작한 7회. 4:4의 스코어에서 이삭 페레데스 선수의 홈런으로 5:4, 한 점을 앞선 상태에서 이번엔 가운데 담장을 넘기는 커다란 홈런을 만들어 낸 김사범 선수는 9회 2점 차 상황에서 볼넷을 얻어 1루에 나간 뒤 3루까지 도루에 성공합니다.]
“야, 그만해. 너 취했다. 가자.”
“나 안 취했어! 안 취했다고!”
“이모! 여기 계산이요!”
[그리고 이어진 원아웃 3루 상황,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4번타자인 크리스틴 스튜어트 선수의 낫아웃 상황에서 다저스 포수인 키버트 루이스 선수가 흘린 공을 잡아 1루에 던지는 사이 홈플레이트마저 훔쳤습니다. 이로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 스윕을 단 한 경기…….]
“친구가 많이 취했네. 잘 들여보내.”
“그럼요. 당연하죠.”
그렇게 디트로이트남의 유니폼이 때 아닌 정신+육체 노동으로 흥건해질 때쯤, 그는 다저스남을 자취방 침대에 눕히는데 성공했다.
“엄마……. 미안해요…….”
취한 건지 아닌지, 다저스남의 술주정을 들으며 원룸에서 나온 디트로이트남은 핸드폰을 꺼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러게, 도박을 왜 해? 하, 참. 내 아들이 나중에 저럴까 걱정된다, 정말.”
땀이 식어 차가워진 몸을 버스에 실은 디트로이트남이 주머니에 있던 이어폰을 꺼내는 사이, 이어폰 사이에 껴 있던 종이 한 장이 팔랑거리며 버스 바닥으로 떨어졌다.
“안 돼! 안 돼지, 안 돼!”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vs LA 다저스
다저스 핸디 무
4.22배
32,000]
다행히 잃어 버리기 전에 찾은 디트로이트남은 주은 종이를 소중하게 접어 지갑에 넣었다.
토도도도독.
그리고 핸드폰 위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는 그의 두 엄지손가락.
[역배충 응징하고 오는 길이다. 질문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