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김사범, 더 나은 미래를 향해(1)
이리의 한 병원.
“몸에 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요 근래에 경기에 많이 나섰나 봐요? 약한 탈진 증상입니다.”
“감사합니다.”
교체가 되고 이내 경기가 끝나자, 무시무시한 탈력감이 나를 덮쳤다.
덤으로 전투속행 스킬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부상 등으로 경기를 뛸 수 없을 때 경기가 끝날 때까지 컨디션을 유지시켜 주는 건가.’
다행히도 구단 지정병원에서 검사 결과 몸에 다른 부상은 없었다.
단순한 탈진.
하지만 탈진이란 단어가 가진 힘이 내 몸이 아닌 내 마음을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이 상태로는 나는 풀타임 출장이 불가능하다.
절망하거나, 걱정할 시간이 없다. 내 문제가 뭔지 원인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병원을 나와 짐에게 연락한다.
[짐, 아까 말했던 인스트럭터가 자료를 보냈다고 했죠? 짐이 보기엔 어때요?]
[생각 있어요? 전문가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할 순 없지만, 괜찮은 거 같아요.]
[좋아요 짐. 연락해 주세요. 가능한 빨리 만나고 싶어요.]
몇 번 더 울리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나는 다시 돌아와서도 같은 실수를 할 뻔했다.
* * *
다음 날, 오후.
“생각보다 굉장히 일찍 만나 뵙게 됐네요. 사범 킴입니다.”
“반갑습니다. 제시 모리슨입니다.”
짐의 일처리가 빠른 건지, 이 제시 모리슨이란 사람이 빠르게 움직인 건지. 바로 다음 날, 나는 그를 볼 수 있었다.
“오늘 경기는 쉬시는 겁니까?”
“아, 어제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이틀 정도 쉴 거 같습니다.”
“좋네요. 제가 보내 준 자료는 보셨나요?”
“봤습니다. 마이너 구단이라 자료를 수집하기 어려우셨을 거 같은데, 고생하셨네요.”
어젯밤에 본 자료에는 싱글A 시절부터 수집된 내 타구의 분포, 발사각도, 그리고 발사각도에 따른 타구의 결과까지 세세하게 분석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 타격 폼에 대한 본인의 생각까지도.
“읽어 보셨다니, 이야기가 쉬워지겠네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지금 사범 킴 선수의 타격 폼은 슈퍼카의 엔진을 소형 차량에 장착한 것과 같습니다.”
“……계속하시죠.”
“낮은 발사각의 타구를 홈런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힘이라면, 차라리 애초부터 적절한 발사각을 확보하는 게 이득이에요. 효율적인 측면에서도, 타구 질적인 측면에서도요.”
갑자기 들고 있는 태블릿에서 동영상을 재생해서 보여 주는 모리슨. 화면에는 한 선수가 스윙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누군지는 알려 드릴 수 없지만, 제가 작년에 폼을 교정했던 선수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큰 수정 없이 간단한 교정으로도 발사각도가 많이 변했죠?”
“스윙 궤적도 많이 변했네요.”
“그게 핵심입니다. 지금의 장작을 패는 듯한 다운컷 스윙을 어퍼컷 스윙으로 바꿔야 합니다.”
메이저리그에서 시작된 어퍼 스윙 붐은 곧 한국 야구에도 영향을 끼친다. 물론 나도 돌아오기 전에는 그 영향을 받았었고.
전혀 효과를 못보고 내야 플라이 제조기가 됐지만.
“그렇다면, 어퍼 스윙을 하면서 떨어지는 타율은 어떻게 생각하시죠?”
“타율이요? 아, 그렇죠. 제가 사범 선수의 폼을 분석하면서 느꼈던 감상입니다만, 지금 폼은 과도할 정도로 공을 맞추는데 집중되어 있어요. 마치 내야 땅볼을 굴리는 데 집착하는 사람처럼.”
뜬공은 모두 잡히니까. 공을 끝까지 보고 좋은 공이 오면 어떻게든 내야로 공을 굴려 코스를 노리는 스윙을 해야 했었다.
“일단 비효율적인 이런 동작들을 수정…….”
“잠깐만요.”
“네?”
“단순하게 힘의 효율이 문제라면, 제겐 상관없습니다.”
내 말에 당황하는 모리슨.
“많은 수정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간단한 동작 수정만으로 제가 말씀드린 변화가 가능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내게는 선구안과 타격 정확도의 유지가 더 중요하다. 힘은 이미 넘치도록 충분하다.
소형차에 슈퍼카의 엔진? 중요하지 않다. 그런 불균형 속에서도 난 이미 많은 차량을 추월했으니까.
단지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브레이크다.
내 힘이 폭주하여 내 몸을 해치려 할 때, 그걸 조절할 수 있는 브레이크.
“그래도 전 지금의 메커니즘을 버릴 수 없습니다.”
“후, 설득이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었지만. 정말 쉽지 않네요. 그럼 이 방법은 어떠십니까?”
모리슨은 자신의 태블릿에서 다른 영상을 찾아 내게 보여 줬다.
“이건…….”
“이럴 때를 대비해서 준비한 자료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폼은 자연스럽지 않아요. 0부터 시작해서 중간단계 없이 10으로 바로 도달하는 느낌입니다. 그걸 이 정도만 바꿔도 충분히 자연스러운 타격자세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모리슨의 태블릿에 나오는 남자는 지금 내 폼과 다른 폼을 번갈아 가며 보여 주고 있었다.
“어떠십니까?”
“그냥 보기만 해서는 모르겠네요, 배트를 휘둘러 봐야 알겠어요.”
“배트는 저기 있습니다. 한번 휘둘러 보시죠.”
* * *
지금의 폼을 같이 연구하고, 만든 그 당시 2군 타격 코치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타격 폼으로 정상적인 타격은 불가능해. 선구안을 목적으로 만든 폼이라 배트도 단순하게 커트만을 위한 궤적을 그리니까. 이건 너의 타격을 버리는 대신 극단적으로 선구안을 늘리는 폼이야.”
말도 안 되는 힘 덕분에 커트를 위한 궤적으로도 엄청난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강한 힘에서 나온 빠른 타구는 좋은 결과를 만드니까.
하지만 이제 커트가 목적인 폼이 아닌 정말 타격을 위한 폼으로 바꿀 시기가 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생각보다 습득이 빠른데요?”
“타격에 대해 많이 생각했거든요. 이것저것 시도도 많이 해 보고.”
“탑클래스의 타격 포텐셜을 가진 타자가 그렇게 과감하긴 쉽지 않죠. 멋지네요.”
바닥을 기다보면 어떤 시도라도 하게 된다. 말이 되는 방법부터 말도 안 되는 방법까지.
실제로 그렇게 연구하는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에 와선 내 폼은 물론이고 다른 타자들의 폼도 더 자세히 뜯어볼 수 있으니 아주 쓸모없는 시간은 아니었다.
이틀 동안의 집중적인 연습으로 어느 정도 틀이 잡힌 타격 폼. 문제는 실전에서 이 폼을 얼마나 일정하게 유지하냐다.
야구를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아주 약간의 변화지만 그 약간으로도 성적이 널뛰는 게 타격이니까.
이제 경기에서 차이를 체감할 차례다.
‘이럴 때는 내가 한 게임이 야구게임이 아닌 게 참 아쉽군. 야구게임이었다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야구게임에서 이 정도의 스탯이었다면, 쓸데없는 고민 없이 그저 공에 갖다 맞추는 것만 신경 썼을 텐데.
머리를 흔들며 쓸데없는 잡생각을 지운다. 이제 내가 집중해야 할 건 내일의 경기니까.
다음 날, 뉴햄프셔와의 홈경기.
“사범, 몸은 어때?”
“괜찮아. 단순한 피로누적이었는데 뭐.”
“그래? 다행이네. 내 뒤에서 비리비리하게 서 있으면 나와 상대를 안 해 줄 거 아냐?”
“목적이 확실하네. 역시 내 동료야.”
대기타석으로 나가며 이삭이 날 놀린다. 내 생각엔 이삭이라도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던질 것 같은데.
상대방 투수의 컨디션이 좋아 보인다. 1번으로 나선 타자를 공 5개만에 삼진. 2번으로 출장한 이삭은 끈질기게 버텼지만 7구째 커터에 배트를 내밀어 유격수 땅볼 아웃.
투아웃, 주자는 없다.
타석으로 나서며 새로운 배트를 몇 번 휘둘러본다. 기존에 쓰던 배트가 아닌 일반적인 모양의 배트. 조금 어색하지만 무게중심 자체가 변한 게 아니라 큰 이질감은 없다.
심판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투수가 투구자세를 잡는다.
초구는 높은 포심. 볼.
2구도 존 낮은 곳을 지나는 포심. 스트라이크.
3구는 바깥쪽 슬라이더.
이제 카운트는 2-1, 배트를 내기 좋은 타이밍이다.
4구째, 공이 존 가운데를 향해 온다.
예전과 달리 배트는 어깨어림에 있다.
스텝을 밞지 않는 건 동일하지만, 스탠스는 노멀하게. 뒷발이 체중을 지지하며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시작되는 힙턴, 배트의 궤적은 예전처럼 장작을 패는 것 같은 다운컷 스윙이 아니라 공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가는 레벨 스윙의 형태를 띠고 있다.
따악!
마지막에 공이 변화했다. 아무래도 포심이 아닌 커터였던 모양이다.
팔로스루를 하며 타구를 끝까지 본다. 담장을 향해 나아가던 공이 끝에 가서 살짝 휘며 폴대 밖으로 벗어난다.
아쉽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만족스럽다. 예전과 달리 타격 후에 느껴지는 몸의 부담이 없다.
머릿속에서 수정된 타격 폼의 포인트를 떠올리며, 1루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다시 타석으로 향한다.
5회가 끝나고. 클리닝 타임.
지난 두 타석의 결과는 2루타-유격수 직선타. 천천히 타석을 복기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볼일을 본 후 마침 화장실로 들어오는 이삭과 마주쳤다.
“폼이 좀 달라졌네?”
“예전부터 수정하려고 했어. 쉬는 김에 바꾼 거지.”
“이틀 동안 타격 폼을? 하하, 아예 기름을 뿌리고 화재현장으로 달려가지 그래? 너무 위험하지 않아?”
“어차피 바꿔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지금이라도 수정해서 익숙해져야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삭.
“나라면 그 정도 성적을 내는 폼을 수정하지 않았을 거야. 거기서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
“물론이지. 아직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타격에 절반도 가지 않았어.”
아직도 내 상태창의 힘은 절반도 채워지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쉿, 빨리 일이나 봐. 돌아가야지. 덕아웃으로 가자. 화장실에서 떠들다 보면 이상한 놈이 오거든.”
“이상한 놈?”
“있어. 자기 팀이 아니라 상대방 팀 화장실을 좋아하는 녀석. 화장실의 유령 같은 놈이지.”
날 이상하게 바라보는 이삭을 끌고 덕아웃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에취!”
“어라? 킴. 감기야?”
“아니, 갑자기 뭐가 간질간질하네. 뭐지?”
“오늘같이 중요한 날에 컨디션이 안 좋으면 큰일인데?”
“아냐, 괜찮아졌어. 가자고.”
그날 저녁,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스포츠 뉴스란.
[양키스 싱글A, 탬파 타폰즈의 김병헌. 8이닝 2피안타 1볼넷 13삼진 무실점으로 쾌투. 승격 청신호?]
* * *
[사붐! 또 넘겼습니다! 24번째 폭탄이 스타디움에 떨어집니다!]
[싱글A까지 범위를 넓히면 44호 홈런입니다. 6월에 갑작스럽게 타격 폼을 바꾼 뒤 잠시 슬럼프가 왔었죠? 하지만 곧 본인의 페이스를 되찾고 무서운 속도로 홈런을 쌓아 나갑니다!]
[하하, 지금 속도로 성장한다면 정말 리그를 초토화시키겠군요.]
[아직 메이저급 투수의 공을 상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심스럽습니다만, 지금 빅리그에 올라가도 충분히 자신의 몫을 다 할 선수입니다.]
[곧 있을 퓨처스 게임의 월드팀 유격수 부문의 후보이기도 합니다. 이변이 없는 한, 아. 말을 아껴야겠군요, 하하.]
“후, 덥네 이제.”
홈플레이트를 밟고 돌아온 덕아웃에서 한바탕 세레머니를 하고 앉은 벤치, 내 앞에서 달린 이삭과 함께 시원한 얼음물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더블헤더가 비일비재한 마이너에서 폭염은 선수들을 괴롭히는 주원인이다. 하물며 올해는 기상이변이라 할 정도로 더운 날씨가 유지되고 있다.
“그러게. 작년보다 더 더운 것 같아. 우리 아가씨, 또 픽 쓰러지는 거 아냐?”
퍼억.
틈만 나면 놀려 대는 이삭을 응징하고 다시 숨을 고른다.
확실히 타격 폼을 바꾸고 몸에 걸리는 부하가 덜해진 걸 체감 중이다.
자연스럽게 타석이 늘어가며 점점 수렴해 가는 타율은 어쩔 수 없지만 장타율과 홈런 개수는 급격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나저나, 이번 올스타전에 나가는 건 거의 확정인데 기대되지 않아?”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어느새 돌아온 이삭.
“아, 뭐 기대되긴 하지. 클리블랜드는 예전에 TV로 많이 봤거든. 거기서 뛴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나도 2년 전에 나갔을 때 정말 정신없이 뛴 거 같은데. 다시 나가면 이번엔 어리버리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결국 다시 못 나가는구만, 아쉬워.”
“다음 올스타는 메이저에서 나가야지. 안 그래?”
“그렇지. 메이저에서 나가야지.”
나이는 나와 같지만 이미 마이너에서 4년을 뛴 이삭의 경우 아마 이번 확장 로스터 때 40인 로스터에 올라갈 확률이 높다. 리빌딩 중인 구단 특성상 아마 이번 시즌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할 것이다.
“먼저 가서 잘 적응하고 있어. 곧 갈 테니까.”
“하하, 너야말로 빨리 올라와. 기다리다가 목 빠지게 하지 말고.”
물론 다음 시즌에 이삭이 다시 마이너리그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아직 마이너 옵션이 남아 있는 유망주는 으레 그러니까.
하지만 우리는 당연하듯 그에 관련된 말을 절대 꺼내지 않았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