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김사범, 과거와 싸우다(1)
“쟤는 또 왜 저러냐?”
“몰라, 요즘 좀 잘 치더니 틈만 나면 스윙이네.”
부웅!
“아니 근데 저 폼으로 그 비거리가 어떻게 나오는 거지?”
“몰라, 저 펑고배트 같은 이상한 거 들고 올 때부터 이해하길 포기했다.”
“저거 1년 전부터 쓰지 않았냐?”
“응, 1년 전부터 포기했어.”
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고.
[999999번의 스윙(비활성화) - 활성화까지
23940/999999]
내 눈에는 나만 볼 수 있는 글씨가 떠 있다.
‘2주 동안 죽을힘을 다해 운동해도 상태창에서 내구는 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효율적으로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해.’
그래도 운동의 결실은 있었다.
[힘 : 999+(현재 적용 : 204)]
내 몸이 성장할수록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출력이 상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만약의 만약도 생각해야 한다. 낼 수 있는 최대출력을 올려야 해’
그렇게 땀이 흥건해질 정도로 스윙 연습을 하고 있으니 어느새 제주공고와의 연습시합 시간이 다가왔다.
“모두 차량에 탑승해라! 스파이크나 글러브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네!”
빠르게 언더셔츠를 갈아입고 차에 탑승했다.
‘제주공고라, 잠깐. 제주공고?’
제주공고. 제주도 내에서 유일하게 전국대회에서 유의미한 성적을 내는 학교다. 물론 성적은 16강 - 8강을 왔다 갔다 하는 중위권 팀이지만.
‘기억대로라면, 올해는 제주공고의 해가 되겠지. ‘그 녀석’이 있으니까.’
김병헌. 대한민국이 낳은 최고의 오른손 투수. 고등학생 시절 수술 이력에도 불구하고 졸업 후 메이저리그로 직행.
1년 만에 더블A까지 올라가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이듬해 확장 로스터 때 콜업 되어 깜짝 선발로 데뷔전을 치른다.
최고 160까지 나오는 강력한 포심을 바탕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선발로 활약하여 11시즌 동안 150승 102패, 평균자책점 2.38을 기록하며 사이영 등 각종 타이틀을 섭렵한 동시대 최고의 투수.
‘그리고…… 성질 더럽고 자존심 센 녀석.’
그 전설적이고 자존심 센 녀석과 나는, 중학 야구 시절 같은 팀이었다.
* * *
“반갑습니다. 제주공고 감독 김철환입니다. 멀리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좋은 구장에서 좋은 상대 팀과 연습경기를 하는데 멀리서라도 찾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좋은 경기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좋은 경기 부탁드리겠습니다.”
감독님들의 인사치레가 끝나고 팀별 연습이 시작됐다.
조용히 배트를 휘두르며 제주공고의 연습을 지켜보고 있다 보니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열심히 하네? 그래서 그렇게 는 건가?”
“……?”
“경계하지 마, 나는 너한테 별 감정 없으니까.”
중견수 김태연. 한공고의 주장이다. 고교 평균 3할 후반대의 타율과 4할 중반대의 출루율, 빠른 발로 도루까지 순위권인 외야수 최대어.
“경계하진 않아. 그냥 어색할 뿐이지.”
“그래? 아무튼, 요즘 네가 예전의 김사범으로 돌아오는 거 같아서 기분이 좋다.”
“예전?”
“재수는 존나 없는데 또 야구를 괴물처럼 잘해서 욕할 수도 없는 그런 김사범.”
“칭찬이냐?”
“욕일 수도 있고, 아무튼 그냥 이 말이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더라고. 다른 애들 말은 그냥 흘려서 들어. 자기들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항상 무서워했거든.”
“나를?”
“아니, 예전의 너를. 뭐, 아무튼 다시 환영한다. 돌아온걸.”
드라마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청춘 드라마를 눈앞에서 목격하니 정신이 혼미해져서 잠시 아무것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뭐…… 그래도 기분은 좋네.’
만약 이게 야구하는 소년들의 청춘 드라마라면, 이런 멘트가 꼭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오그라듦과 강도 높은 자학을 하던 중, 저 멀리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김사범!”
‘아, 몰라보길 바랐는데.’
우리의 야구영웅, 레전드이신 김병헌 ‘님’이 날 알아본 모양이다. 못 들은 척 조용히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나를 다시 한 번 불러 세우는 녀석.
“야, 싸가지! 넌 몇 년이 지나도 똑같네?”
“후……. 그냥 가라. 내가 널 신경 쓰기엔 지금 마음이 너무 복잡하다.”
“새끼, 말하는 꼬라지도 똑같아. 중학교 때도 항상 그랬어 넌.”
“그땐 미안했다. 내가 철이 없었다. 잘 가.”
“야!”
“남의 덕아웃 앞에서 이러는 거 민폐 아니냐? 저기 니네 감독님 표정 굳어졌는데?”
“후, 그래. 내가 뭘 기대한 게 잘못이지. 오늘 경기 나오지?”
“어.”
“긴장해라. 예전에 네가 가지고 놀던 내가 아니다.”
“응, 알아.”
“……?”
“가라. 좀 더 있으면 니네 감독님 달려오겠다.”
그 말에 자기 팀 덕아웃 쪽으로 돌아가는 김병헌.
‘아, 성질 죽여야 하는데. 여기서 쟤를 도발해 봤자 무슨 도움이 된다고…….’
긴장된다.
심장 고동 소리가 크게 들린다.
지금은 아니지만, 미래에 레전드라고 불릴 사람의 공을 쳐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고 힘들어 겁이 난다.
예전엔 그랬을 거다.
하지만 지금 뛰는 심장 소리는 뭔가 다르다.
긴장보다 더 날 들뜨게 하는 감정.
‘호승심인가? 이게? 너무 오래돼서 기억조차 안 나는군.’
호승심, 승부욕
돌아오기 전 나에게는 패배자의 자기 위안이나 발악이었던 그 감정이. 이거야말로 자신들의 진짜 모습이라고 강하게 고개를 들고 있다.
“재미있겠네. 오늘 경기.”
* * *
“연습경기 마지막을 장식할 좋은 상대 팀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수비 연습만 봐도 잘 짜인 팀이라는 게 눈에 보이는군.”
“하지만 애들이 잘해 준다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방심하지 말게, 우리가 항상 애들한테 하는 말 아닌가.”
“죄송합니다. 아, 오늘 투수가 토미존 수술 후 처음으로 실전 등판하는 투수랍니다.”
“음. 중학교 시절엔 별 특이한 게 없다고 하더군, 1학년 때야 경기에 얼굴을 비춘 적이 없으니 데이터가 없고.”
“몸이나 투구 폼으로 봐선 강속구 투수보단 맞춰 잡는 스타일일거 같은데, 애들한테 공을 오래 보라고 말할까요?”
“일단 두고 보지, 처음 만나는 투수를 지레짐작으로 상대할 수는 없으니.”
“마침 연습투구를 시작하네요. 애들아! 모두 집중해서 봐라! 태연이한테 공 좀 오래 보라고 누가 전해주고!”
퍼어어억!
폭력적인 직구가 포수의 미트에 파고든다.
“나이스 볼! 오늘 좋은데?”
상대 팀 포수도 흥겨워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높인다.
“음…….”
“일단 직구는…….”
“김 코치가 직접 태연이에게 가서 전하게, 최대한 커트하면서 버텨 보라고.”
“네, 알겠습니다.”
고교 리그 수위권의 교타자에게 그저 커트하면서 버티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공이 위력적이었다.
‘재밌다. 아주 기대돼. 진정하자. 적어도 두 번째 이닝에는 만날 수 있어.’
남들보다 얇은 내 배트의 손잡이가 으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플레이볼!”
될성부른 떡잎을 지르밟아 버릴 게임이 시작되었다.
* * *
“안녕하세요, 여러분! BJ구라왕 입니다!”
제껴라 : 엌ㅋㅋㅋ 아침방송ㅋㅋㅋ 웬일이얔ㅋㅋㅋ
야구제왕 : 심심하다고 아침방송 해달라고 할 땐 사람 없다고 안 하더니 웬일?
MJ : 그렇다. 미쳤다. 야구왕.
아라 : 요즘 사람 좀 빠졌다고 무리하는 거 아님?
“하하핫! 제가 왜 꼭두새벽부터 방송을 켰냐! 바로 저번 내기 벌칙을 수행하기 위해섭니다!”
MJ : 겨울야구. 중계. 기억난다.
제껴라 : 엌ㅋㅋㅋ 겨울엨ㅋㅋ 야구를ㅋㅋㅋㅋㅋ 누가 함ㅋㅋㅋㅋ
축구왕김홈런 : 저기 뒤에 진짜 야구 유니폼인데?
야구제왕 : 진짜 찾아간 거야? 뭐지? 설마 일본?
“일본? 아니죠, 거기까지 가기엔 돈이 없어요 돈이. 으엌! 말 나오자마자 제껴라님 별사탕 100개 감사합니다. 아무튼 제가 그래서 막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 봤는데, 제주도에서 고등학교 팀들이 전지훈련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찾아! 왔습니다!”
야구왕슛돌이 : 고교야구? 재미없는데.
제껴라 : 민폐 보소;; 허락은 받음?
MJ : 간장 원샷 안하려고 애쓴다 애써.
축구왕김홈런 : 야구왕 닉 바꿔라, 내 유니크함이 사라졌잖아.
“네, 간장 원샷 안 하려고 이러는 거 맞고요, 아무튼 경기가 곧 시작할 거 같네요. 음, 한공? 항공? 한공 맞네요, 한공 고등학교하고 제주공고의 시합입니다.”
“오, 여러분들은 소리 잘 안 들리죠? 저기 퍼런 유니폼이 제주공고인데 거기 투수 볼이 기가 막히네요. 엄청 빨라요.”
제껴라 : 카메라 좀;;; 하나도 안 보임;;
MJ : 니 면상 말고 경기를 크게 틀어야지 멍청아.
MJ님이 벙어리가 되셨습니다.
축구왕김홈런 : 졸렬ㅋㅋㅋㅋ
야구왕슛돌이 : 개졸렬ㅋㅋㅋㅋ
“화면 조정 좀 할게요, 습관이라 그래요. 좀만 진정하면 풀어 줄게.”
“아 뭐야, 얜 또 왜이래? 잠깐만요 여러분, 노트북을 오랜만에 만졌더니 좀 까칠한데?”
“됐다. 응? 1번 좌타 아니었나? 왜 우타자가 서 있지?”
고교야구왕 : 고등학교 야구는 이닝당 한 번씩 꼭 타석을 바꿔야 한다.
아라 : 아 진짜요? 프로야구는 그런 거 없던데?
MJ : 미친ㅋㅋㅋㅋㅋ
아붹 : ㅋㅋㅋㅋㅋㅋ닉값ㅋㅋㅋㅋㅋ
“헛소리 밴이요. 아웃카운트 올라간 거 보니까 죽었나 본데? 이렇게 빨리? 아, 이거 강팀하고 약팀하고 붙은 건가 보네요. 양학 게임 느낌 좀 납니다. 그리즐리랑 시티즌즈가 붙는 느낌?”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시티즌즈 까면 칼밴입니다. 내 팀은 나만 깔 수 있음”
“헛소리 좀 하는 동안 2번도 유격수 땅볼로 아웃! 거 봐, 투수 뽈 좋다니까?”
아붹 : 뭐가 좋은지 말을 해 줘야 알지ㅅㅂ
“아, 우리 방 야알못들 우쭈쭈. 봐봐요, 방금 직구 던졌고 이제 변화구잖아. 근데 일단 투구 폼이 비슷하잖아! 이거만 해도 좋은 건데, 직구도 계속 팍팍 꽂히는 게 시원시원 하단 말이지, 쟤 프로 가면 뜨겠다. 느낌 왔어.”
고교야구왕 : 구라왕 저주 나왔다.
MJ : 아 이제 풀렸네, 왜 앞길 창창한 애한테 저주질임?
아붹 : 요새 야구시즌 아니라 조용하다 했더니 이젠 찾아가서 저주 ㅋㅋㅋㅋㅋㅋ
아라 : 칭찬 아니에요?
MJ : 그런게 있음 ㅋㅋㅋ 구라왕 쟤는 칭찬하면 안 됨 ㅋㅋㅋ 칭찬하자마자 폭망한 선수가 한둘이 아냐 ㅋㅋㅋㅋ
“아 이번엔 진짜라니까! 딱 봐, 나 느낌 왔어. 쟤 오늘 1점도 안 줄걸? 거봐, 지금 3번도 공 3개로 아웃시키잖아. 간장 받고 내기 콜?”
MJ : 콜.
아붹 : 콜ㅋㅋㅋㅋ
축구왕김홈런 : 간장 받고 까나리 가는 거다?
고교야구왕 : ㅋㅋㅋ 제주공고면 투수 약하다고 소문난 덴데ㅋㅋㅋ
“엥? 약하다고? 아냐, 절대 아냐. 까나리 콜. 게임 시작된 거임. 무르기 없어!”
* * *
투 스트라이크에서 떨어지는 변화구에 삼진.
2구째 커터에 유격수 땅볼.
3구째 높은 패스트볼에 헛스윙 삼진.
우리 팀 1-2-3번의 성적이다.
“폼이 엄청 빨라. 손도 잘 안 보여서 갑자기 공이 튀어나온다.”
“변화구 던질 때하고 직구 던질 때하고 폼도 별로 차이 없어요.”
“커터 맞나? 갑자기 툭 떨어졌어.”
“아마 맞을걸? 슬라이더라 보기엔 구속은 직구랑 비슷한 거 같던데?”
“생각보다 반 개 위로 휘둘러야 해, 높게 들어온다.”
한 명, 한 명 아웃당할 때마다 빠른 정보 교환이 이루어지지만 구종에 대한 정보 말고는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다. 저놈은 이닝이 지날수록 바뀌니까.
‘알아주는 슬로 스타터지? 몸도 아직 안 풀렸는데 이 정도로 던진다고?’
김병헌의 메이저리그 커리어 실점의 85% 이상이 초반 3이닝에 모여 있을 만큼 몸이 풀리는 시간이 걸리는 타입이다.
“직구는 더 높게 잡아야 한다. 점점 갈수록 더 빨라질 거야.”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음. TV에서 봤다고 할 수도 없고…….
“중학교 동기야, 그때도 몸이 늦게 풀린다고 맨날 투덜거렸다.”
그런 적 없다. 그때는 몸이 풀리든 말든 맨날 처맞고 징징 짜던 녀석이다.
“음. 그럼 그럴 수도 있겠네. 일단 생각해 두자.”
다행히도 김태연이 도와줘서 상황을 모면했다. 아 어색해.
주섬주섬 글러브를 챙기며 제주공고의 덕아웃을 바라본다.
‘이제는 내 차례다, 눈 크게 뜨고 잘 봐라, 미래의 레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