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김사범, 날개를 펼치다(3)
[안녕하십니까. 고교 야구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경기 중계를 맡게 된 캐스터 김민수입니다.]
[해설위원 안경태입니다.]
[오늘 경기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대결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두 고교의 맞대결 외에도, 현재 고교야구에서 가장 뜨거운 투수와 타자가 맞붙는 경기기도 하죠.]
[그래서 그런지 경기 전에 둘러보니 KBO 구단의 스카우터는 물론이고 외국인 스카우터들도 많이 온 거 같아요?]
[속단은 이릅니다만, 메이저리그 구단에서도 아마 관심이 있을 겁니다. 두 사람이 보이는 모습이 워낙 역대급 파괴력이니까요.]
중계 카메라는 스피드건을 들고 있는 스카우터들을 비춘다.
[말씀드리는 순간, 애국가가 울립니다.]
동해물과~
길이 보전하세.
[자, 이제 경기 시작합니다. 김병헌 선수에겐 중요한 초구겠어요.]
[맞습니다. 경기를 시작하는 초구, 제가 투수는 아닙니다만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펑!
“스트라이크!”
김병헌은 공을 돌려받고 자신의 구속을 확인했다.
[153km/h.]
‘컨디션 좋은데? 재미있는 경기가 되겠어.’
저번 준결승 이후 휴식일은 3일. 완전히 회복하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는 시간이다.
‘팔이 좀 무거워, 그렇지만……. 공이 더 뻗는 느낌이다. 조심하지 않으면 좀 날릴 수도 있겠어.’
한편, 타석의 한공고 1번 타자 김현석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153? 오히려 체감속도가 더 빠른 느낌이다.’
“오늘 결승이라고 무리하나? 왜 이렇게 빨라? 에휴, 이러다가 몇 개 못 던지고 내려가는 거 아냐?”
당황한 타자의 귀에 포수가 내뱉는 말이 박혔다.
‘무시하자, 무시. 좀 더 빠르게, 아주 못 칠 정도는 아냐.’
배트로 헬멧을 몇 번 두드리고 타격자세를 잡는 타자. 하지만…….
펑!
“스트라잌!”
또다시 순식간에 지나가는 공.
몸쪽 직구에 놀랄 시간도 없이 카운트는 0-2, 투수는 공을 돌려받자마자 바로 투구자세를 취한다.
‘뭐, 뭐야! 사인교환 안 해?’
당황한 타자가 따라가기에는 몸쪽 높은 곳을 통과하는 공이 너무 빨랐다.
“스트라잌~ 아웃!”
멍하니 배터박스를 벗어나는 타자에게 대기타석의 타자가 말을 걸었다.
“어때?”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때보다 훨씬 더 빠르고 더 위협적이야, 조심해라.”
“거기서 더? 알겠다.”
[선두타자를 삼구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투수! 아, 공이 위력적이네요.]
[직구 하나만으로 잡아냈어요. 마지막 공은 의도적으로 템포를 일찍 가져가죠? 심지어 와인드업도 안 하고 던졌어요.]
[그러네요, 주자가 없어 와인드업 해도 되는 상황인데요.]
[아마 약속된 플레이인 것 같습니다. 포수와 미리 합을 맞춘 거 같아요.]
[그게 가능한가요?]
[하하, 저도 말로만 들어봤죠. 자신의 구위나 제구에 믿음이 없다면 쉽지 않은 플레이입니다.]
딱!
[말씀드리는 순간, 1-0에서 2구를 치는 타자, 유격수가 잡아서…… 아웃입니다.]
[커터인가요? 네, 맞네요. 이 커터로 대회 내내 재미를 보고 있어요.]
[말 그대로 커터입니다. 아주 날카롭게 떨어지는 공이군요.]
막 타석에 선 3번 타자 김태연은 자연스럽게 포수에게 말을 걸었다.
“좀 편한 거 하나 주자, 동기 좋은 게 뭐냐.”
“같은 팀일 때나 동기지, 무슨.”
“우리 우정은 여기까지냐?”
“집중이나 해라.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텐 안 준다.”
“쳇.”
‘직구, 커터, 남은 건 슬라이더랑 체인지업인가?’
“흡!”
틱!
‘와, 공 한 개 가까이 높게 잡고 쳤는데도 파울이라고? 미쳤구만.’
어이가 없어 쳐다본 마운드.
꿈틀대는 투수의 미간.
‘왜? 나 정도는 안중에도 없어? 나 그래도 좀 치는데?’
길어지는 사인교환, 항상 쉽게 합을 맞춘 배터리에겐 이례적이다.
마침내 던진 2구, 더 빨라진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뚫을 듯 다가온다.
‘아무리 그래도…….’
딱!
‘그렇게 티를 내면 내가 좀 그렇지.’
1, 2루 간을 뚫고 나가는 안타. 밀어 친 게 아닌 밀려 친 거에 가깝지만 안타는 안타다.
1루에서 멈춘 김태연이 1루 코치에게 능청스럽게 말한다.
“어때요, 이 정도면 프로 갈 만하죠?”
“프로가 문제냐, 메이저로 가라.”
“낄낄, 듣기엔 좋네요.”
[2루수 몸을 던져 보지만! 닿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맞진 않았습니다만, 스윙을 끝까지 가져가서 안타를 만들어 내네요.]
[아무래도 볼 배합에서 이견이 있었던 게 문제였나요?]
[현대 야구에서 포수의 인사이드 워크의 중요성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만, 고교야구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포수가 요구하는 공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죠.]
[그러게요. 김병헌 선수는 1회부터 위기상황에 부딪힙니다.]
[투아웃 주자 1루에서 위기상황이라니, 누가 듣기엔 정말 우스울 수 있어요.]
화면 하단에 나오는 김사범의 이름과 성적.
[다음에 나오는 타자 성적을 보면 이해하지 않을까요?]
[그렇죠. 와, 8할이 넘는 타율에 OPS가 무려 3을 넘거든요. 무조건 걸러야 합니다. 대안이 없어요.]
목동구장의 마운드.
김병헌은 다가오려는 포수를 만류하며 마운드를 고른다.
“칫, 너무 흥분했나.”
살짝 흥분해서 빠르게 뛰는 심장을 애써서 가라앉힌다.
‘후우, 집중하자. 점수만 안 주면 돼.’
‘벤치 사인은, 당연히 고의사구일 거고.’
타석에 들어서는 김사범, 자연스럽게 자신의 타격자세를 잡았다.
‘내가 몇 번만 참으면 우승이다. 이것도 승부야, 팀워크고.’
1루 주자를 힐긋 보며 투구자세를 잡는 김병헌.
‘마음에는 안 들지만, 어쩔 수 없다. 난 우리 팀을 우승시킬 거다.’
펑!
“볼!”
첫 공을 본 김사범의 눈이 이글거리기 시작한다.
* * *
대기타석에서 지켜보는 녀석의 공은, 대단했다. 비록 안타를 맞았지만.
‘저런 공격성이 그런 커리어를 만든 거겠지.’
오늘따라 대기타석에서 타석으로 향하는 짧은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초구는 직구인가? 나를 의식한다면 낮은 커터나 존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 일 수도 있어.’
인사를 하고, 포수의 중얼거림을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생각한다.
‘카운트가 몰리면 체인지업을 던질 수도 있다. 커터나 슬라이더에 가려져서 그렇지, 체인지업도 훌륭한 공이야.’
그리고, 초구.
나는 장난감을 뺏긴 어린아이처럼, 망연자실했다.
‘너도 날 피하는 거냐? 정말로? 그런 약한 놈이었어? 그럼 내가 바라마지 않던 너의 모습들은 어디로 간 거지?’
2구, 또다시 넉넉하게 빠지는 볼.
‘내가 잘못한 건가? 내가 돌아옴으로써 녀석의 미래가 바뀌는 건가? 그 정도라고, 저 녀석이?’
3구. 다시 한 번 볼.
잠시 타석에서 물러서 마운드 위의 김병헌을 바라본다.
트라웃, 스탠튼, 하퍼를 상대로도 피하지 않던 눈이, 날 피해 마운드에 머문다.
‘이건 김병헌이 아니다. 그저 그런 투수일 뿐이야.’
괜히 배트를 땅바닥에 두어 번 두드린다.
“잠시 배트를 바꿔도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응? 공에 맞지도 않았지 않나?”
“배트 모양이 이렇다 보니……. 빠르게 바꿔 오겠습니다.”
“알았네, 빨리 다녀오게.”
달려서 도착한 덕아웃.
배트를 바꾸며 감독님에게 말한다.
“감독님, 저 믿으십니까?”
“응?”
“제가 이번 타석에서 어떤 짓을 해도 믿어 주실 수 있습니까?”
의아한 듯 바라보는 감독님. 심판을 바라보며 내게 말한다.
“그래, 알겠다. 믿지.”
바꾼 배트 손잡이에 타르를 바르고, 타석에 선다.
4구. 다시 공은 나를 외면한다.
‘네가 피한다면. 내가 불을 붙여 주지.’
후웅!
공을 터트릴 것 같은 풀스윙, 엄청난 소리가 김사범의 배트 끝에서 터져 나왔다.
* * *
[역시, 거릅니다. 이게 맞아요.]
[안 위원님이 감독이셨어도 거르라고 하셨을까요?]
[물론이죠, 아마추어 정신은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역설적으로 승리 위에서 빛나거든요. 승리를 위한 선택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2구째도 볼, 크게 뺍니다.]
[이렇게 되면 5번 신민수 타자의 어깨가 무겁겠어요.]
[3구도 볼. 아, 잠시 타임을 요청하는 김사범 선수.]
[배트가 이상하다는 것 같죠? 허허, 그래도 긴장을 했나 보네요. 배트 상태도 살펴보지 않고 나왔어요.]
덕아웃에 들려 배트를 바꿔 나온 김사범.
[사실, 이 상황에는 배트를 바꾸지 않아도 될 텐데요…….]
[그렇죠? 고의사구 상황이 거의 확정적인데 배트를 바꾸다니, 특이해요.]
[4구째, 볼을 던집니다. 타자는 1루……. 어?]
[저게 뭐죠? 지금 빠지는 공에 스윙했어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중계진 또한 얼어붙었다.
[아……. 도망치지 말라는 거 같습니다. 하지만 이건…….]
[야구 중계를 하며 처음 보는 상황 같습니다.]
[아, 이건 안 좋을 수도 있어요. 팀에 있어서 이건 안 좋습니다. 주의해야 할 행동이에요.]
공을 돌려받는 김병헌.
들어 올린 글러브 사이로 보이는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이게 뭐지, 뭘 하고 있는 거지?’
다리를 풀고, 공을 닦으며 김사범을 본다.
‘뭐하자는 거냐, 김사범.’
뜨거운 시선은 이미 없다. 그저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만 있을 뿐.
김병헌의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불타오르지 않는 거냐? 볼을 던지고 도망치는 나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아?’
투수판 위에 발을 올린다. 사인을 보기 싫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겁쟁이가 아니야, 도망치는 게 아니라 승리를 향해…….’
차가운 눈빛이 보인다.
마침내, 마운드 위의 폭군, 악마라고 불렸던 그가 깨어났다.
‘승리는 개뿔, 이딴 승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왼쪽 팔꿈치를 터치하고 어깨 위에 손가락을 하나 얹는다.
당황한 포수는 벤치를 바라본다.
‘어떡할까요? 쟤 터졌어요, 아, 잘 던지다가!’
잠시 고민하던 제주공고 김철환 감독은 이내 코치에게 지시한다.
* * *
“스트라잌!”
스트라이크 존을 찢으며 들어오는 직구, 녀석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내 도발이 통했다.
일어나 공을 투수에게 던진 포수가 장비를 고치며 내게 말한다.
“야, 김사범. 그렇게 붙고 싶냐?”
“어.”
“그래, 둘이 아주 영화를 찍는구나. 너희 둘이 알아서 해 봐라. 우리는 조연 자리에서 가만히 들러리처럼 서 있을 테니.”
그제야 조금 사태 파악이 된다. 큰일 났군.
“근데, 주인공은 아마 병헌이일 거다. 이런 상황에선 보통 주조연으로 믿음직한 포수가 나오거든.”
“하.”
“한번 쳐봐. 쉽진 않겠지만.”
볼카운트는 3-2, 주자는 1루. 투수는, 불타오르고 있다.
‘최고군. 산책하기에 아주 좋은 상황이야.’
[8구도 파울입니다. 경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됐습니다만, 불꽃 튀는 승부네요.]
[아, 정말 재미있네요. 이번 타석에서 처음 나오는 변화구였거든요? 거의 완벽한 체인지업인데 그걸 따라가서 커트해 내네요, 대단합니다.]
[선구안이 대단한 타자니 만큼, 어지간한 변화구엔 헛스윙하지 않아요. 대단한 투수, 대단한 타자입니다. 우리나라 야구의 앞날이 밝아요.]
[이어지는 9구, 투수 던집니다!]
“죽겠네, 아고.”
“힘들지? 그러게 왜 나와서 그 고생이냐.”
1루 베이스 위, 헉헉대는 김태연에게 제주공고의 1루수가 말을 건넨다.
“후우, 이 정도는 해야 나중에 할 말이 있거든, 아, 바로 던져? 쟨 왜 이렇게 인터벌이 빨라?”
투아웃, 풀카운트 상황이다 보니 공 하나하나마다 스킵, 대시를 반복하는 김태연의 모습이 짠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9구.
투수, 포수, 타자는 모두 같은 생각을 한다.
‘직구다.’
‘직구 던져야겠네.’
‘무조건 직구다.’
잔재주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모두 확인했다.
이제 남은 건 힘과 힘의 싸움. 1회 첫 타석에 불과하지만, 이번 승부에서 이기는 사람이 최후의 승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투수는 던진다.
주자는 달린다.
포수는 나오지 않는 배트에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때.
빠아악!
포수의 시선에 갑자기 나타난 배트가 어마어마한 소리를 만든다.
모두가 경기장을 넘어 까마득히 먼 곳에 떨어진 공을 쳐다볼 때, 2루 베이스를 밟고 지나가며 김태연이 말했다.
“이럴 거면 내가 그 고생을 왜 한 거야? 진작에 치지. 에고, 힘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