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김사범, 2020시즌(vs 블레이크 스넬)
일산의 한 스튜디오, 야구공 모양이 크게 돋보이는 스튜디오에서 촬영이 한창이다.
“……입니다. 이번 시즌의 한국 프로야구는 정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전이네요.”
“자고 일어나면 순위가 바뀐다는 말이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그럼 이제 메이저리그 소식으로 넘어가 볼까요?”
여성 아나운서의 진행에 패널로 나온 전문가들이 각자가 준비해 온 자료를 넘기기 시작했다.
“메이저리그는 비교적 뚜렷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내셔널리그의 경우 동부를 제외하고는 시즌 전 예상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요 내셔널리그 동부에선 워싱턴 내셔널스, 중부에서는 밀워키 브루어스, 서부에서는 LA 다저스가 선두를 달리고 있습니다.”
“후에 말씀드릴 예정이지만 아메리칸리그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포함해서 한 지구에서 최대 3팀이 플레이오프에 나갈 수도 있는 상황이에요.”
“하퍼를 영입한 후 승리를 향해 달리고 있는 필라델피아와 탄탄한 선수층을 가지고 있는 뉴욕 메츠, 그리고 지구 선두 워싱턴이 그 대상이죠?”
“맞습니다. 워싱턴이 앞서나가고 있습니다만 시즌이 아직 40경기 정도 남았거든요? 방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후에 나눠 보도록 하고, 아메리칸리그도 살펴보겠습니다.”
아나운서의 멘트에 맞춰 아나운서와 패널 사이에 설치된 대형 화면에서 아메리칸리그의 팀들이 지구별로 성적과 함께 정리된 자료가 출력되었다.
“아메리칸리그 역시 동부를 제외하고는 1위 팀이 어느 정도 정해진 모습입니다. 동부에서는 양키스가 76승으로 1위, 서부는 휴스턴이 79승으로 거의 1위를 확정지었으며, 중부에서는 클리블랜드가 70승으로 선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조금 웃긴 상황이긴 합니다. 동부지구의 팀이 타 지구 팀을 상대로 굉장히 많은 승수를 쌓았어요. 특히 중부지구 1위인 클리블랜드는 동부지구 3위인 탬파베이와 한 경기 차이밖에 나지 않거든요? 탬파베이 입장에선 굉장히 아쉬울 겁니다.”
“김사범 선수가 소속된 디트로이트는 어떤 상황인지 궁금한 팬분들이 있으실 것 같아요. 어떤가요?”
“지구 1위인 클리블랜드에 6경기를 뒤쳐져 있는데요, 동부지구 2위인 보스턴이 74승으로 지구 선두 양키스와 2게임 차로 다투고 있거든요? 아마 이 두 팀 중 한 팀이 와일드카드의 한 자리를 차지할 거 같아요. 포스트시즌을 위해 남은 한 자리를 두고 싸우는 형국입니다.”
화면이 전환되며 와일드카드 2위 경쟁을 하는 팀들을 보여 준다.
“동부지구 3위인 탬파베이가 116경기에서 69승을 거두고 있고, 서부의 오클랜드가 66승을 거두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디트로이트가 64승으로 리그 6위에 랭크되어 있습니다.”
“디트로이트 입장에서는 탬파베이를 따라잡는 게 지구 우승팀 경쟁이나 마찬가지네요?”
“맞습니다. 동부를 제외한 각 지구의 하위권 팀들이 꼴지를 위한 경쟁, 즉 엄청나게 강한 강도의 탱킹을 하면서 벌어진 웃지 못할 상황입니다. 특히 중부가 더 심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앞으로 디트로이트는 한 경기, 한 경기가 그야말로 우승과 포스트시즌이 달려 있는 중요한 경기가 되겠네요?”
“네, 맞습니다.”
“탬파베이와 디트로이트는 마침 맞대결을 앞두고 있습니다. 내일 오전 8시, 여기 계시는 김형환 위원과 함께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 * *
탬파베이의 한 호텔, 모두가 잠을 자는 늦은 새벽에도 한 호실의 불은 꺼질 줄 모른다.
‘붐을 어느 타순에 놓아야 가장 생산적인 타순이 될까?’
그 호실엔 호텔의 투숙객이자 디트로이트의 감독인 론이 여러 자료들을 보며 고민에 빠져 있었다.
‘미기가 빠르게 컨디션이 올라오는 중이긴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몸 상태는 아니다. 예전처럼 타순을 짜더라도 그때 같은 생산성이 나오지 않을 거야.’
구단에 소속되어 있는 세이버매트리션의 자료대로 타선을 구성한다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지만, 론은 그러지 않았다.
‘저번 주에 미기와 함께 돌아온 스튜어트가 훨씬 나은 성적을 보여 주고 있으니 세 명을 패키지로 묶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이삭과 카스테야노스의 출루율은 괜찮은 편이지만, 카스테야노스는 볼넷이 너무 적지. 공격적인 성향이 너무 강해…….’
“후, 고민되는군.”
적막하던 방에 론의 한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5시간 전, 탬파베이로 향하는 비행기 안.
“이번 4연전에서 제대로 뒤집어야 해. 내친 김에 리그 1위로 디비전에 진출하는 거야!”
미기가 돌아온 후 5승 2패, 나름 괜찮은 성적을 올려서인지 동료들의 사기가 꽤 높다. 일주일 전의 패잔병 같은 모습과 사뭇 다른 모습들.
“그래, 안 될 건 뭐야? 일단 이번 시리즈에서 스윕을 하면 되잖아요? 경기 후반에 이기고만 있으면 내가 어떻게든 막을 테니까!”
이런 자리에는 항상 나타나는 폴리의 말을 들으며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탬파베이라…….’
메이저리그 진출 전, 계약을 놓고 얽힌 기억이 있는 팀이다.
전반기의 홈경기 때는 별생각이 안 났는데, 뭔가 중요한 경기가 되니까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만약 탬파베이로 갔다면 아직도 마이너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겠지?’
메이저리그에서 알아주는 팜 시스템을 가진 팀답게, 소속 유망주가 웬만한 실력이 아니면 1년에 한 단계씩만 올리기로 유명하니까.
‘팀 페이롤 걱정이 성적 걱정보다 더 앞서는 팀의 비애지.’
“붐, 뭔 생각을 그렇게 해? 또 야구 생각하지?”
잠시 멍 때리는 사이 폴리가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아냐. 그냥 이런저런 다른 생각.”
“넌 거짓말을 너무 못해. 타격 생각하는 거야? 그래도 이젠 제법 승부가 들어오잖아?”
미기와 스튜어트가 돌아온 이후, 내게 향하던 견제가 제법 느슨해진 건 사실이다.
“문제는 내 컨디션이지. 바닥을 모르고 파고들어 가더니 이제야 슬슬 올라오는 거 같아.”
“아무리 잘 치는 타자라도 그 정도로 집중견제를 받으면 어쩔 수 없지.”
“처음엔 공이 하나도 안 뜨더니 이제 슬슬 공이 뜨고 있어. 아마 이번 4연전 땐 제법 괜찮은 타구가 나올 거 같은데?”
꼭 그래야만 한다. 나 자신, 그리고 팀을 위해.
그렇게 왁자지껄한 비행이 끝나고 도착한 호텔. 일단 몸을 옥죄던 양복을 벗어던졌다.
‘시즌 초에 맞춘 양복인데. 그새 몸이 좀 컸나? 시즌이 끝나면 다시 맞춰야겠어.’
아직 잠이 들기엔 애매한 시간.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가져온 노트북을 켜서 내게 온 메일을 확인했다.
[사범, 힘들 때 읽어 봐요.]
짐이 보낸 메일이 덩그러니 받은 메일함에 들어 있었다. 어차피 뭐 흑인 어쩌구 하는 개그겠지. 자기 피부색을 이용해서 놀리다니, 이건 역인종차별 아냐?
[짐, 정말 고맙다는 말을 먼저 드리고 싶네요. 수술이 끝나고 딸아이가 조금 안정되자마자 보내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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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깨어나진 못했지만, 수술 경과는 아주 좋다고 해요. 어려운 수술이었음에도 환자의 의지가 강해서 이렇게 좋은 결과가 있다고들 하더군요. 고마워요. 정말.
김사범 선수에게도 전해 주세요. 제가 연락을 할 수도 있지만 팀 성적상 오히려 방해가 될까 봐 참았거든요. 나중에, 수리가 다 나으면 꼭 두 분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 고마운 마음을 담아, 필 베이커.]
짐, 미안해요. 그러게 평소에 좀 잘하지 그랬어요.
유머러스한 짐이 전해 준 메일로 몸 안의 뭔가가 탁 풀린 느낌이다.
동시에 가슴에, 아니 마음에 차오르는 감정. 이 감정 때문에 사람들이 봉사를 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푸는 거구나.
오늘은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 같다.
‘아, 근데 뭔가 까먹은 거 같은데…….’
하지만 난 이미 누웠고, 되돌리기엔 침대의 감촉이 너무 좋았다.
* * *
다음날, 탬파베이의 홈구장 트로피카나 필드.
“아, 인조잔디. 끔찍하네.”
“그래도 슬라이딩이 가능한 게 어디야. 여긴 주루 코스에 모래라도 있잖아.”
이삭과 내야 상태를 점검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여, 오랜만이네?”
오랜만에 듣는 한국말. 그리 반갑지는 않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워워,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그냥 여기 애들처럼 인사하면 되지 뭘 그렇게 깍듯하게 대해?”
저번 3연전에도 만났던 최신만이다. 그렇게 말할 거면 좋아하는 티라도 내지 말든지.
“타국에서도 선배는 선배니까요.”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요즘 좀 안 좋지? 그러다가 우리 팀 만나서 홈런 뻥뻥 치는 거 아냐?”
“하하하.”
“그럼 안 돼. 선배도 오랜만에 잡은 기횐데. 아무튼, 나중에 한번 보자.”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정말로.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경기가 시작됐다.
‘홈런은 무슨.’
2와 1/3이닝 퍼펙트. 우린 상대방 투수를 전혀 공략하지 못하고 있었다.
“FA 되기 전이라고 아주 날아다니네.”
블레이크 스넬, 오늘 탬파베이의 선발투수다.
타석에 들렀다 덕아웃으로 돌아온 동료들이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로 깔끔한 투구. 그야말로 변화구가 춤을 춘다.
“아주 못 칠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삼진 당한 타자가 말합니다.”
“아, 미기! 뭐 그건 그렇긴 한데.”
첫 타석에서 백도어 슬라이더-떨어지는 체인지업-몸쪽 커브-하이 패스트볼에 삼진을 당했다. 4개의 공 중 단 하나의 공도 같은 코스, 같은 구종이 아니었다.
“하나가 압도적인 녀석은 아니지만 모든 구종이 플러스급이라고 평가되는 녀석이야. 오히려 이런 투수들이 더 상대하기 어렵지. 사이영을 아무한테나 주진 않으니까.”
미기의 말이 맞다. 칠 만한 공을 칠 수 없게 만드는 것도 투수의 역량이니까.
‘이런 타입에게 아주 딱 맞는 타격법이 있지. 오랜만에 써 보는데…… 잘 되겠지?’
[블레이크 스넬 선수가 또다시 아웃카운트를 늘렸습니다. 투아웃.]
[디트로이트 입장에서는 힘들더라도 오늘 경기를 승리해야 합니다. 로테이션상 내일 선발투수는 디에고 카스티요 선수거든요? 탬파베이가 자랑하는 오프너 전략입니다.]
[오프너가 뭔지 궁금하신 시청자들을 위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선발투수가 제일 실점이 많은 이닝은 1회와 2회입니다. 탬파베이는 2018년도에 이런 점에 착안해서 강력한 구위의 불펜투수를 게임을 시작하는 ‘오프너’로 내세우고, 첫 1~2이닝 정도를 책임지게 만들었습니다.]
[선발 투수가 최대 2이닝만 던지고 내려가는 거네요?]
[맞습니다. 그 이후에 롱릴리프를 투입해서 경기를 잡는 전략이죠. 처음 이 전략을 탬파베이가 선보였을 때 많은 전문가들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지만, 2020 시즌에도 탬파베이는 여전히 오프너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 내일은 강력한 구위의 불펜진을 상대해야 하는 디트로이트입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3회 초, 디트로이트의 공격이 끝났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양 팀의 투수들이 칼춤, 아니 공춤을 추는 날인지, 3회 말 탬파베이의 공격도 순식간에 끝이 났다.
이삭이 타석에서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번 타석에 본 공들을 떠올렸다.
‘못 치는 공은 없어. 어차피 스트라이크를 잡으려면 존 안으로 공을 넣어야 한다.’
[4회 초, 디트로이트의 두 번째 타순입니다. 선두타자로 나선 1번 이삭 페레데스 선수.]
[이번 이닝에서 뭔가를 보여 줘야 합니다. 통계적으로 첫 번째 타순보다 두 번째 타순의 OPS가 5퍼센트 정도 높고, 두 번째 타순보다 세 번째 타순의 OPS가 8퍼센트 정도 높습니다. 하지만 블레이크 스넬 선수의 구위와 탬파베이의 팀 특성을 생각해 보면 세 번째 타순은 없을 수도 있어요.]
[익숙해지기 전에 빠르게 투수교체를 가져간다는 이야기시죠?]
[맞습니다. 더불어 블레이크 스넬 선수의 유일한 약점이라고 하는 체력적인 부분도 충분히 공략을 해야 이번 경기, 잡을 수 있습니다.]
잠시 후, 얼굴의 땀을 닦고 타격 자세를 취하는 이삭의 등 뒤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서,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