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김사범, 날개를 펼치다(5)
한공고의 덕아웃, 코치가 소리 높여 선수들을 독려하고 있다.
“이번 이닝부터 타선이 좋다! 욕심내지 말고, 공을 많이 보고 뒤 타자에게 이어 준다는 생각으로 들어가!”
“넵!”
주장 김태연이 자신의 배트를 들고 말한다.
“이제 3바퀴짼데, 슬슬 우리가 어떻게 결승전에 올라왔는지 보여 줘야지. 안 그래?”
“야, 배트는 내려놓고 말해! 무서워!”
“응? 그걸 노린 거야. 심각하게. 역전해야지.”
“에휴, 말을 말지.”
다른 선수들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배트를 든 채 타자들을 독려하던 김태연은 김사범을 흘긋 보고는 쓱 방망이를 내리며 마무리했다.
“아무튼, 우리가 쳐야 해! 투수들 기 좀 살려 주자!”
잠시 후.
“스트라잌! 아웃!”
심판의 우렁찬 아웃 선언에 김태연이 터덜터덜 들어왔다.
신민수가 돌아오는 김태연에게 글러브를 건네며 말했다.
“쪽팔리지?”
“어, 많이.”
“가자, 수비하러 가야지.”
“고맙다. 위로해 줘서.”
씩 웃는 신민수.
“수비마저 못 하면 프로는 없다. 알지?”
“역시 넌 쓰레기였어, 내가 널 좋은 놈이라고 잠시 착각했다니까?”
* * *
6회 말, 내 수비 위치로 향한다. 뒷주머니의 로진을 바르고 가루가 남지 않도록 훅 불어 날린다.
옛날, 프로에서도 2군을 전전하던 시절. 그땐 이 정도 부상을 가지고도 쌩쌩했다. 아직 내 몸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
가슴은 좀 답답하지만.
[6회 말, 제주공고의 공격입니다.]
[제주공고도 타선이 좋죠? 4번부터 시작합니다. 2점 차이, 타이트한 상황이기 때문에 타자들이 힘을 내줘야 하거든요?]
[맞습니다. 지난 이닝, 마지막 타자부터 던지는 김장호 선수를 어떻게 공략하는지가 관건이에요.]
[말씀드리는 순간, 초구 던집니다!]
“스트라이크!”
[와, 정말 엄청난 싱커네요.]
[직구를 거의 안 던지는 투수죠? 싱커와 커브, 투피치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피안타율과 자책점이 굉장히 낮아요.]
[경기 전에 잠깐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제는 직구를 못 던지겠다고 그러더라고요? 하하.]
[가끔 그런 투수들이 있어요, 특별히 무브먼트를 주지…….]
[2구 타격! 공은 유격수에게, 유격수 잡아서 1루로! 아웃!]
[아, 수비 좋아요. 어깨도 강합니다, 김사범 선수.]
누군가 경기장에 땅꾼을 풀어놨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땅볼들.
문제는 그 공이 거의 나에게 집중된다는 거다.
“투아웃! 하나 더!”
아직 여름은 시작도 안 했는데 땀이 쏟아진다. 땀이 많은 체질은 아닌데, 몸이 바뀌면서 달라졌나 보다.
‘본격적으로 여름이 되면 엄청나겠군, 몸 관리를 잘 해야겠어.’
난, 지금 현실에서 도피 중이다.
* * *
“샘, 지금 투구 수 몇 개지?”
“누구요? 킴이요? 80개 가까이 던졌네요.”
“정확하게.”
“78개요. 아시안 선수들은 공에 힘이 떨어질 시기긴 하네요.”
앨버슨이 전광판을 응시한다.
“그렇지? 근데 아직도 팔팔하군.”
전광판엔 159km/h라는 숫자가 찍혀 있다.
7회 초, 마운드 위에는 김병헌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후우, 잘 풀리면 한 번, 아니면 두 번인가?”
타석에 들어서는 김사범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남은 타석을 세고 있는 김병헌.
‘홈런, 볼넷. 그럼 다음엔 아웃 아니겠어?’
각오를 다지고 힘차게 와인드업 하는 김병헌의 눈빛이 매섭다.
뻐억!
“스…… 스트라잌!!”
그리고 그의 공 끝은 더 매서웠다.
* * *
159km/h, 비공인 한국 신기록이다.
‘축하는 하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들이대면 부담스러운데.’
올해 초에 본 모습과 비교해도 놀랄 만한 성장이다. 야구가 사랑하는, 드라마 주인공 같은 녀석.
배트를 좀 더 꽉 잡는다. 옆구리를 생각한다면 차라리 커트하며 버티고 버텨 볼넷으로 나가는 게 맞다.
2구째, 김병헌이 공을 던진다.
갑작스레 세운 신기록에 힘이 좀 들어갔는지 존 중앙을 향해 오는 공. 배트는 이미 출발했다.
부웅!
“흡!”
“스트라잌! 투!”
체인지업. 허를 찔렸다. 여우 같은 놈.
잠시 타석을 나와 숨을 고르자 어김없이 포수가 말을 건다.
“너 어디 아프냐?”
“뭐?”
뭐지? 티가 났나?
“아니, 치라고 던져 준 공을 놓치길래, 아니면 말고.”
역시, 여우끼리 아주 잘 만났군. 뻔한 수작에 넘어가진 않았지만, 같은 수준의 배터리에게 살짝 화가 난다.
0-2, 카운트가 몰려서 화가 난 건 절대 아니다.
곧이어 3구를 던지는 김병헌.
‘응? 이건?’
슬라이더, 커터 둘 중 하나다.
확신할 수 있다.
시작되는 스윙, 물 흐르듯 이어지는 힙턴과 상체의 움직임. 이대로 이어야 하는데.
‘윽!’
통증을 망각하고 있었다.
따악!
마지막 순간에 힘을 주지 못해서일까, 타구는 좌익수 앞에 떨어졌다.
1루에 도착한 뒤, 보호장구를 코치님께 건네주며 아쉬운 마음도 같이 건넨다.
* * *
[3구, 쳤습니다!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깔끔한 안타!]
[아, 대단하네요. 방금 슬라이더도 예리했거든요? 그걸 당겨서 안타로 만들어 냅니다.]
[그러고 보니 김사범 선수가 단타를 친 게…… 이번 대회에서 3번째군요?]
[하하, 김사범 선수도 대단합니다. 남들 홈런 개수 셀 때 단타 개수를 세야 해요. 무시무시합니다.]
타석으로 향하는 5번 타자, 신민수의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다.
‘드디어 기회가 왔네, 여기서 일단 추격하는 점수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찬스에 강하다, 강하다, 강하다.”
배트로 머리를 툭툭 치며 중얼대는 신민수, 누가 봐도 긴장한 것 같다.
초구는 직구, 파울.
2구 역시 직구, 볼.
3구, 체인지업에 크게 헛스윙.
4구, 신민수의 배트에 공이 맞는다.
‘악! 커터였어!’
깔끔한 4-6-1 병살. 깔끔하게 루를 비우는 신민수다.
“괜찮아! 고개 들어!”
덕아웃에서 들리는 팀원들의 목소리가 왠지 가슴 아프게 들린다.
마운드 위, 김병헌.
‘이제 90개 정도 던졌나? 원래 컨디션하고 다르니 가늠이 안 되네.’
로진백을 만지며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를 쳐다본다.
‘앞으로 7개, 7개면 우승이네.’
김병헌은 자신의 야구 인생을 떠올려 봤다.
‘김사범한테 놀림 받고, 김사범한테 욕먹고, 간신히 헤어지고 공 좀 던지니까 부상, 재활 후 이제 간신히 시작점이구만.’
그러고 보니 김사범하고 얽힌 과거에서 좋은 게 없었다.
‘이게 악연인가?’
다시금 투구자세를 잡고, 공을 던진다.
“스트라잌!”
짧게 울려 퍼지는 스트라이크 콜, 김병헌이 좋아하는 타입의 심판이다.
‘진짜 악연이라면.’
2구. 포수의 사인은 슬라이더, 김병헌은 고개를 젓고 직구 사인을 낸다.
이내 다시 직구 사인을 내는 포수.
김병헌의 오른팔이 강하게 휘둘러진다.
“스트라잌! 투!”
‘이 경기에선 다시는 보기 싫어.’
3구, 슬라이더.
“스트라잌! 아웃!”
‘그러니까, 여기서 끝내자.’
마운드를 떠나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거대해 보인다.
* * *
[이제 경기는 9회로 접어듭니다. 제주공고 입장에서는 7회 김사범 선수의 안타를 제외한다면 무난하게 흘러간 8이닝이었어요.]
[맞습니다. 양 팀 초반을 제외하고 공격이 잘 안 풀리는 모습이죠? 차이점이라면, 제주공고는 김병헌 선수의 강력한 구위로 찍어 눌렀고, 한공고는 수비 조직력으로 버텼다. 이렇게 볼 수 있겠네요.]
[이제 치열했던 경기의 끝이 보입니다. 9회, 한공고의 선두타자는 김현석 선수입니다.]
[김병헌 선수도 투구 수가 100개가 넘었어요. 이제부턴 정신력 싸움입니다.]
공을 던지는 김병현을 바라본다. 7회 느꼈던 그것, 그것이 과연 정확한 건지 알아내야 한다.
흐르는 땀을 닦아 내는 녀석, 아직 체력적으로는 전성기 시절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오래 봐! 투수 지쳤어!”
옆에서 자신의 배트를 들고 응원하는 김태연이 시끄럽다.
“볼! 베이스 온 볼스!”
좋은 시작, 녀석이 지쳤다는 걸 증명하듯 제구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대기타석으로 나가는 김태연을 불러 세운다.
“야, 잠깐만.”
“왜?”
“타석에 들어서면, 하나만 확인해 봐라.”
“뭔데?”
“……확실하진 않아.”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아 귓속말로 내가 본 것을 전했다. 그러자 놀란 눈으로 날 보는 김태연.
“만약 그게 진짜라면, 이거 가능성 있겠다.”
한마디를 남기고 자신만만하게 대기타석으로 향한다.
이제 별다른 일이 없다면 내가 타석에 들어설 수 있다.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다.
* * *
퍽!
[아, 김병헌 선수, 갑자기 흔들리네요! 이러면 안 돼요!]
[선두타자 볼넷에 이은 사구, 몸에 맞는 공입니다. 아직 체력에 약점이 있나요? 잘 던지다가 이러면 안 되는데요. 이럴 땐 포수나 감독이 올라가 다독여 줘야죠.]
[네, 바로 올라가네요. 제주공고의 감독이 직접 올라가는 거로 봐선, 교체인가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김사범 선수의 타석이 남아 있는 이상, 다른 투수를 세우기에는 조금 불안한 게 사실이죠.]
걱정스러운 눈으로 김병헌을 바라보는 제주공고의 김철환 감독.
“야, 괜찮냐?”
“말 시키지 마요, 힘들어 죽을 거 같으니까.”
“바꿔 줄까?”
“내가 뭐라고 할 거 같아요?”
“그치? 여기까지 왔는데 어쩌겠어…….”
발끈해서 김 감독을 바라보는 김병헌에게 선글라스 안에서 웃고 있는 눈이 보인다.
“감독님 영화 좀 그만 보시라니까. 꼭 이럴 때 써먹으셔.”
“이런 순간에 멋진 말 하려고 보는 거다. 힘들면 철우 통해서 언제든지 말해. 불펜은 준비시켜 놓으마.”
“필요 없어요. 내가 끝낼 거예요.”
“알았다. 불펜에 아무도 안 넣어 놓을게. 힘내자.”
쿨하게 돌아서는 김 감독.
“잠깐!”
“왜?”
“그래도 준비는 시켜 놔요. 자신 없는 건 아닌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낄낄, 알겠다.”
모두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마운드의 김병헌은 숨을 고른다.
‘노아웃 주자 1, 2루. 3번을 맞춰 잡고 사범이에게 올인한다.’
신중한 사인교환.
그리고 과감하게 던진다.
1구는 직구, 몸쪽에 과감하게 붙인 스트라이크.
2구 역시 직구, 바깥쪽 낮은 코스를 노렸지만 조금 벗어난다.
3구, 슬라이더. 낮게 떨어지는 공에 타자가 헛스윙한다.
이제 볼카운트는 1-2.
‘바로 가자, 낮은 커터.’
‘콜.’
투수와 포수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한다.
4구, 커터가 날카롭게 존 아래를 찢으려 날아간다.
딱!
예상한 듯, 거침없이 배트를 돌리는 타자. 하지만 생각보다 더 날카롭게 들어온 커터는 타구가 외야로 나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원아웃! 두 개 더!”
유격수 쪽 깊은 타구, 2루 주자를 잡는 데는 성공하지만 타자 주자는 간발의 차이로 1루에서 세이프.
어느새 타석엔 4번, 김사범이 들어선다.
* * *
타석에 들어서서 1루에 있는 김태연에게 시선을 돌린다.
‘끄덕.’
아까 예상한 것이 맞았다는 신호.
그걸 알면서 안타를 만들어 내지 못하다니, 나중에 놀릴 거리가 생겼다.
‘집중하자, 집중.’
녀석의 팔에 집중한다. 디셉션이 좋아 잘 보이진 않지만, 구별은 가능하다.
낮게 나오는 팔. 직구.
“볼!”
2구, 다시 낮게 나온다.
“스트라잌!”
역시 직구.
3구. 초구, 2구보다 조금 올라간 팔.
“스트라잌!”
슬라이더다.
볼카운트는 1-2. 하지만 난 유리한 고지를 밟고 있다.
4구. 빠지는 직구. 2-2.
5구 역시 크게 빠지는 직구.
풀카운트, 더욱더 녀석의 팔에 집중한다.
‘높다!’
슬라이더가 다가온다. 타이밍을 맞춰 배트도 같이 돌기 시작한다.
그때,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
만약 이 스윙을 끝까지 가져간다면, 내 소중한 것이 같이 끝날 것 같은 너무나 불길한 느낌.
찰나의 고민 끝에…… 나는 배트를 내지 못했다.
“스트라잌! 아웃!”
나는, 내 야구를 위해 팀의 승리를 버렸다.
정신없이 들어와 앉은 덕아웃, 옳은 선택임에도 양심의 가책이 나를 찌른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 아는 사실인데도.
점점 더 심해지는 미안함.
그때, 내 앞에 누군가가 보였다.
“이한길.”
“……왜”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나 다음 타자야, 시간 없다.”
짜증 난다는 얼굴.
“김병헌, 쿠세가 생겼다.”
“뭐?”
“슬라이더하고 커터 던질 때, 팔이 높아.”
“진짜냐?”
의심하는 듯한 얼굴.
“오늘 생겼을 거야. 그동안 이런 연투를 한 적이 없었을 테니까. 아무튼 중요한 건,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거다. 태연이도 확인했어.”
잠깐의 침묵, 이한길이 내게 말한다.
“왜 나한테 알려 주는 거냐?”
“뭐?”
“네가 쳤으면 되잖아. 왜 알려 주는 거냐고.”
순간 부상에 대해 말할 뻔했다. 여기서 말하면…… 역효과다.
“타석에서…… 칠 생각 없었다. 쿠세, 그거 하나 확인하러 나간 거다.”
“뭔 소리야?”
“그게 더 승산이 높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무튼, 확실해. 믿어 줘.”
“……넌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고개를 저으며 대기타석으로 걸어가는 녀석.
“베이스 온 볼스!”
민수 또한 커트 끝에 볼넷을 얻어 주자는 만루.
타석에 나가서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이한길.
곧이어.
따악!
우리의 우승을 알리는 타구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 * *
[2루수, 잡아서 1루에!]
“아웃!”
[마침내, 황금사자기의 우승자가 가려졌습니다. 최종 스코어 6:4! 한공고가 우승기를 가져갑니다!]
그리고.
[전투가 어려운 상황에서 끝까지 싸웠습니다. 스킬 ‘전투속행’이 생성됩니다.]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
황금사자기 [vs 제주공고]
4타석 3타수 2안타 1홈런 1볼넷(2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