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김사범, 2022시즌(순조로운(?) 출발)(2)
야구를,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야구 게임에서 자기를 대입한 캐릭터를 만들어 봤을 거다.
보통 타격-힘-주력-수비-송구 등으로 나뉘어있는 스탯을 맘이 가는 대로 나누며 자신만의 선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정말 재미있으니까.
나는, 그 과정을 스스로의 몸으로 느끼며 즐기고 있다.
물론 현실은 게임이 아니고, 이 스탯은 야구선수로서의 스탯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볼!”
첫 타석, 방금 공으로 카운트는 이제 3-0, 날 노골적으로 피하는 투수를 상대하는 법도 제법 익숙해졌다.
그냥 멍하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1루에 나가 3루로 달리면 된다. 물론 프레디는 이런 내 도루를 볼 때마다 자기가 알아서 불러들여 줄 테니 참고 좀 베이스에 붙어 있으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가만히 서 있다 보니 날 바라보는 상대 포수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다.
‘여기 보지 말고 볼이나 던져라. 오늘은 아무래도 도루만 쌓을 것 같으니까.’
그리고 이내 마운드의 투수가 공을 던지기 위해 왼발을 마운드에서 들어 올릴 때, 나는 왠지 모를 예감에 나른하게 서 있던 몸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역시, 이 정도면…….’
놔두면 볼이 될 만한 공. 적어도 존에서 바깥쪽으로 한 개는 빠지는 패스트볼이다.
이대로 놔두면 난 또 하나의 볼넷을 얻어 낼 수 있겠지만…….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지!’
끝에 도달한 힘을 믿고, 살짝 들어 올린 왼발을 안으로 깊게 내딛으며 클로즈 스탠스로 전환했다.
스윙은 평소보다 조금 더 크게, 그러자 자연스럽게 배트가 돌아 나오며 어퍼 스윙의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따!
임팩트 순간, 가지고 있는 배트를 1루 쪽으로 던지듯 힘을 전달하면…….
아아악!
충분히 훌륭한, 하나의 홈런이 완성된다.
[김사범 선수! 켄자스시티 로얄즈의 대니얼 린치 선수의 코메리카 파크 첫 등판을 환영하는 홈런을 쳐 냈습니다! 외야 가장 깊은 담장을 넘기는 투런 홈런! 이 홈런으로 5회 말, 스코어는 3-0이 됩니다!]
[캔자스시티도 지난 3연전에서 미네소타 트윈스를 스윕하며 기분 좋게 시즌을 출발했는데요, 그 기세를 살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디트로이트의 선발투수인 시미즈 루이 선수를 좀처럼 공략하지 못하고 있네요.]
[맞습니다. 지난 3경기에서 디트로이트는 점수를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았거든요. 조금 이른 예상이긴 하지만, 아마 시미즈 루이 선수가 그 기세를 이어 갈 것 같네요.]
철컥!
경기장 스피커에서 총기를 장전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한 템포를 쉰 뒤…….
- Let's get it Boom! Boom! Boom!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울려 퍼지는 내 응원가.
이번 시즌부터 홈구장에서 시작한 팬들의 새로운 ‘홈런 세레머니’다.
‘오늘은 권총인가? 어제는 함포였다고 했지?’
그날그날 효과음이 달라지는 걸로 봐선, 구단 측에서도 이 세레머니에 꽤 공을 들이고 있는 것 같다.
“좋아! 붐이 한 방 쳤어!”
“나도 타자를 했어야 했나? 별거 아닌 홈런에 왜 다들 기뻐하는 거야? 쟨 항상 저렇게 치잖아? 안 그래 이삭?”
“안 그래. 네가 타자를 했으면 빈볼 걱정은 없었겠네. 머리가 단단해서 맞아도 안 아팠을 테니까.”
“하트 핸-드 퍼니셔!”
“붐! 붐! 붐! 붐!”
내 홈런을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축하해 주는 동료들을 묵묵히 지나쳐 -클리어가 은근슬쩍 내게 손가락 두 개로 하트를 만들었을 땐 조금 흔들렸지만- 자리에 돌아가 방금 전 하던 생각을 이어 갔다.
‘내 힘은 어느 정도인 거지?’
가장 쉽고, 단순하게 계량할 수 있는 파워리프팅 동작들의 무게로 생각해 보면, 난 대략 2000kg 정도를 들 수 있다.
‘맞나? 데드리프트 700kg, 스쿼트 690kg, 벤치프레스 620kg 정도니까…… 얼추 맞네.’
스탯이 완전히 성장했을 때가 아닌 900대 초반 무렵에 측정한 거니까…… 아마 더 높아졌으면 높아졌지 낮진 않을 거다. 한 번에 낼 수 있는 출력의 한계가 정해져 있다 보니 크게 무리하지 않았기도 하고.
그리고, 저 정도 무게가 되면 아무리 좋은 바벨도 1회용이 되어 버려서 더 이상 무게를 올릴 수 없었다. 말아먹은 바벨이 20개 정도 되는 순간부터는 무리하지 않기도 했고. 내 지갑을 위해.
‘그럼, 내 힘은 대충 평범한 사람들의 10~20배가 되는 건가? 흠. 생각보다는 낮은데?’
실제로 발렌 사가를 시작하며 봤던 스탯 설명에서는 50이 인간족 표준이라고 적혀 있었으니, 얼추 맞는 계산일 거다.
‘그럼, 난 내 스윙에 이 힘을 모두 담고 있을까?’
게임에서 배트를 휘둘러 원샷을 내 봤던 최고의 몬스터는 미노타우르스.
물론 그땐 여러 아이템으로 내구를 어느 정도 올려놓아서 출력이 조금 더 높긴 하겠지만…….
‘그래도 가늠이 안 되네. 미노타우르스를 한 방에 넘길 스윙이면, 야구에서는 어느 정도인 거야?’
“붐에게 홈런을 맞고도 당황하지 않는군, 저 투수, 폴리급이야.”
폴리타우르스 스윙, 아니, 아니. 아.
“미노, 아니. 폴리! 좀 닥쳐 봐. 지금 아주 중요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뭔데 안 어울리게 그렇게 예민해? 아, 오늘 저녁? 오늘 저녁은 이삭네 집에서 스튜를 먹기로 했으니까 고민 안 해도 돼.”
“그건 어제 먹어서 질…… 아니다. 케이시!”
“왜!”
“이 멍청이 좀 데려가! 지금 중요한 고민 중이라고!”
“내가 왜!”
됐다.
이렇게 된 이상 더 집중해서…….
“하하-하! 붐-은 홈런을 친 다음에도 고민하는군!”
“정말로, 정말로요! 역시 이 정도는 돼야 이 야생의 정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거겠죠? 대단해요! 예전에 옆집에 살던 미식축구 선수, 아, 프로엔 지명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NBA에 있어요. 뉴욕…….”
망했네.
그냥 다음 타석에서나 더 생각해 봐야지.
* * *
다음 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밤새 나를 괴롭혔다.
‘이런 걸 보고 스님들이 화두라고 하는 건가.’
그리고 마침내, 오늘 아침에서야 더 늦지 않았을 때 내가 해야 할 일 몇 가지를 찾아냈다.
“특수 제작이요?”
“네. 허용 중량이 1000kg 정도 됐으면 좋겠네요. 그에 맞는 플레이트도.”
“음…… 그런 바벨이라면…… 아마 시중에도 나와 있을 겁니다. 255,000 psi 규격이라면 가능하겠네요.”
“아, 그런 바벨이 있나요?”
“네. 3천 달러 정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트레이닝 룸 안의 모든 바벨을 그걸로 교체해 주세요. 돈은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직접 알아보지 않고 코메리카 파크 안의 트레이닝 룸을 관리하는 트레이너에게 물어본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나저나, 세상은 넓고, 쓸데없는 데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참 많구나.’
당장 나도 700kg대의 무게를 짊어지면 약간의 무게감이 느껴지는데, 1000kg을 버티는 바벨을 왜 만든 건지…….
‘아무튼, 한 개는 해결했고.’
야구 외적인 일을 처리했으니, 이젠 그라운드 안에서 해야 할 일을 처리할 차례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2루타와 3루타, 그리고 두 개의 홈런을 뽑아냈다.
따악!
[아, 첫 타석, 초구부터 날카롭게 배트를 휘두른 김사범 선수입니다. 좌중간을 가르는 타구!]
[아슬아슬했지만 가만 놔두면 바깥쪽 볼이 되는, 김사범 선수에게는 굉장히 일반적인 초구였는데요. 그걸 강하게 잡아당겨 좌중간을 뚫어 냅니다.]
어제 첫 타석과 비슷하게 좌우로 반 개 정도 넓힌 존까지는 힘을 싣는 데 성공했다. 이런 공을 노리고 친 건 처음이라 탄도가 낮긴 했지만.
따아아아악!
[이 타구는! 이 타구는! 오른쪽 폴대 안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했습니다!]
[1회 첫 타석부터 3회의 지금 타석까지, 평소와 달리 빠른 타이밍에 배트를 내고 있어요.]
[첫 타석 2루타, 두 번째 타석은 솔로 홈런으로 오늘도 만점짜리 활약을 하고 있는 김사범 선수! 시즌 타율은 9할까지 올라갔습니다!]
공 한 개. 이것도 통과.
따악!
다음 타석에서도 아래쪽으로 꽤 벗어난 -한 개? 한 개 반?- 타구를 있는 힘껏 몸을 구부린 어퍼 스윙을 하면서 맞춰 내는 데 성공했고, 송구가 어설픈 틈을 타 나름 안전한 타이밍에 3루를 밟을 수 있었다.
그리고 찾아온 네 번째 타석.
볼 카운트 2-2에서 투수가 던진 실투, 난 그 공을 다시 한 번 담장 밖으로 넘기는데 성공했다.
[홈런입니다! 네 번째 타석에서도 역시 홈런을 쳐낸 김사범 선수!]
[하하하, 저라면 욕심 때문에라도 짧은 스윙을 가져갔을 텐데요. 힛 포 더 사이클, 사이클링 히트에 단타 하나만을 남겨 둔 선수가 보여 주기엔 엄청나게 큰 스윙이었습니다.]
평소보다 더 집중하고, 최대한 강하게 치려 노력한 탓인지 생각보다 몸에 부하가 많이 걸렸다는 게 느껴진 나는 덕아웃에 돌아오자마자 론에게 찾아가 교체를 요청했다.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있는 건가?”
원정팀에게 12점을 앞선 홈팀의 감독이 보여 주기엔 조금 이상한 반응이었지만, 살짝 등 쪽이 결리기 시작했다는 말에 흔쾌히 교체를 해줬다.
물론, 그 상태 그대로 병원으로 직행하는 걸 막을 순 없었지만.
평소보다 조금 다급해 보이는 직원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동안 나는 내 힘을 낭비했어. 존 안에 들어오는 공이 아니어도 배트에 엇비슷하게 맞출 수만 있다면 충분히 담장을 넘기거나, 적어도 그라운드 안으로 강한 타구를 날릴 수 있다. 예전에도 생각했던 건데, 그새 잊어버렸군.’
간단한 발상의 전환이지만, 순간 스쳐 가는 생각을 물어 짧게 고민한 대가로는 아주 충분했다.
* * *
같은 시각, 메이저리그 어느 구단의 전력분석실.
“뭐야? 지금 히트 포 더 사이클을 앞두고 교체된 건가?”
“으음…….”
“맥, 뭐해? 알아보지 않고?”
“알겠습니다, 핸리. 잠시만.”
맥이라 불린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 이곳저곳에 김사범의 상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흔한 기록이 아닌데, 포기했다고? 뭔가 있군. 큰 부상일 수도 있겠어. 어제부터 히트맵이 난잡해지기도 했고. 흐음…….”
어디선가 정보를 얻은 맥이 핸리에게 바로 보고했다.
“핸리, 등근육 쪽 부상이라는 것 같습니다. 교체되자마자 병원으로 출발했다네요.”
“등이라, 등……. 흠. 잘하면 DL에 올라갈 수도 있겠는데? 그 정도 큰 부상이 아니라면 교체할 이유가 있나?”
* * *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뼈, 인대, 근육. 모두 정상이네요.”
내 몸엔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당연하지만.
“조금 피로가 쌓인 것 같긴 한데……. 그거야 경기를 뛴 직후에 바로 검사를 해서 그런 것 같고, 특별히 따로 아픈 부위가 있나요?”
“아뇨, 없습니다. 오늘따라 조금 피곤해서 먼저 교체를 요청했을 뿐이에요.”
“좋은 판단이긴 한데…….”
진료를 보던 의사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내게 물었다.
“히트 포 더 사이클, 아깝지 않았나요?”
힛 포더 사이클? 사이클링 히트?
아.
잠깐, 아.
“네…… 네, 몸이 건……강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이미 한 번 해본 기록이지만…….
아, 다시 생각해보니 좀 아까운데. 아쉽기도 하고.
‘괜히 교체해 달라고 했나?’
밤새 실루엣만 보여주며 날 괴롭히던 주제에만 집중한 나머지 아주 큰 대어를 놓쳤다.
'어쩐지, 그래서 교체를 요청했을 때 론의 표정이 그랬군, 덕아웃에서 나올 때도 팀 분위기가…….'
기록을 앞둔 팀 동료가 부상으로 갑자기 교체된다? 나라도 기분이 가라앉았을 거다.
‘뭐…… 어쩔 수 없지. 나중에 한 번 더 하지 뭐.'
아쉬움과 살짝 올라오는 자책을 마음 한켠으로 밀어넣고, 나중에 오늘의 일을 추억삼아 낄낄대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경기 후.
팀원들, 크게 잡아봤자 디트로이트 팬들만 아쉬워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타이거즈 붐, 등근육 파열?]
[최근 무너진 붐의 타격 자세, 부상의 원인? 아니면 부상이 이유?]
[히트 포 더 사이클을 앞두고 병원으로 향한 붐, 검사 결과 ‘문제 없어’]
[팀의 상징이 된 붐의 부상 소식에 울상이 된 팬들.]
[론 가든하이어, ‘부상이 아니다. 단순히 예방 차원의 교체와 진료였다.’]
[마이너리거 시절, ‘내구력은 떨어진다.’라는 평가를 받던 붐. 2시즌 연속 95% 이상 경기 소화, 계약과 기록을 위한 무리였을까?]
전 세계 모든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 몸 상태에 대해 걱정하고, 비웃고,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트루먼 쇼 같은 건가?’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주인공이 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