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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김사범, 통보받다

양키스와의 대결.

하지만 김병헌이 기대했던 맞대결은 없었다.

3회에 나와 1이닝 퍼펙트를 기록하고 내려간 김병헌은 4회부터 나온 내 타석을 그저 군침만 흘리며 지켜봤다.

‘그만 봐라, 뚫어지겠다.’

수비 때도, 공격 때도 녀석이 날 바라보는 시선이 좀 귀찮은 걸 제외하면 만족스러운 경기 내용이다.

4회 첫 타석에서 트리플 A의 어느 투수에게 2점 홈런, 그리고 이어진 수비에서도 실수 없이 몇 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그리고 경기 후 라커룸에서 핸드폰을 확인한 나는 이내 그녀의 메시지에 답장을 했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그라운드로 나갈게요.]

그리고 다음 메시지, 음, 내 폼에 문제라.

‘이렇게 접근하는 게 일반적인가?’

어느 선수든 이런 메시지를 보면 고민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메시지를 신뢰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무시하는 것도 기분이 영…….

좋아, 이건 킵해 놓고 짐에게 물어보자.

꺼림칙한 기분으로 짐을 챙기며 내 타격 폼을 되새겨 보는 중에,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킴, 오늘 잘하던데?”

조디 머서, 이번에 팀과 계약한 유격수다.

이글레시아스가 나간 뒤 그 자리를 메꾸기 위한 영입.

점점 하락 중이지만 나쁘지 않은 수비 스탯을 가지고 있고, 좌투에 강점을 보이는 선수다.

“고마워요 머서. 더 열심히 해야죠.”

“역시, 동양인의 근면함은 알아준다니까.”

“근면…… 하하, 컨디션은 어때요?”

어려운 단어에 잠깐 헷갈렸지만, 뉘앙스를 보아하니 나쁜 뜻은 아니다.

“좋아지고 있어. 개막까진 맞출 수 있을 거 같네.”

“오, 그거 저한테는 안 좋은 이야기죠?”

“내가 받는 돈이 있으니, 이 정도는 해야지?”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 머서.

“후, 그럼 전 곧 떠나야겠는데요?”

“아, 킴은 루키지? 아마 그럴 것 같은데. 힘내. 나도 다 겪은 일이야.”

“혹시 조언해 줄 거 있어요?”

“조언이라…….”

내 말에 잠시 고민하는 머서.

“뭐, 더블A까지는 그저 다 같이 야구를 잘하면 돼. 내 실력이 제일 중요하지. 그런데 만약 트리플A에 간다면…….”

“간다면?”

“절대 ‘팀’을 바라지 마. 거긴 죽은 눈을 한 놈들 천지니까.”

“죽은 눈이요?”

“가 보면 알게 돼, 내가 트리플A에서 메이저로 처음 콜업 됐을 때 느낀 감정은 그거야. ‘이 병X 같은 놈들과 다신 야구하기 싫다.’”

갑자기 격하게 말하는 머서. 좀 당황스럽다.

“그 정도예요?”

“너도 느껴 보면 알거야. 물론 느끼지 않는 게 제일 좋지만. 아마 우리가 다시 만날 때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될걸?”

“우리가 다시 만날 때요? 그럼 둘 중 하나는 내려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하.”

“하, 그렇겠군. 킴은 무서운 루키니까. 그렇지만 아마 내년 스프링 캠프에서나 이야기하게 될걸?”

내 당돌한 말을 받아치는 머서. 음. 내년 스프링 캠프라?

그 후 이런저런 잡담을 하며 장비를 챙긴 후, 우리는 인사와 함께 헤어졌다.

경기가 끝난 그라운드.

“안녕하세요! MBT 스포츠의 꽃! 박시윤 아나운서 입니다. 제 옆에는 지금 아주 유명한, 그리고 유망한 두 선수가 자리하고 있는데요, 소개합니다. 김사범 선수, 김병헌 선수!”

“안녕하세요. 김병헌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사범입니다.”

창피하다. 정말 창피하다. 착각도 유분수지. 괜히 얼굴 보기가 민망하고 이런 나에게 화도 난다.

박시윤 아나운서가 능숙하게 질문을 던진다.

“오늘 안타깝게 맞대결이 불발되었어요, 아쉬우신가요?”

“아쉽네요. 저번 승부의 복수를 할 수 있었는데.”

“네? 음, 뭐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겁니다.”

호승심을 숨기지 않는 김병헌과 정말 별생각 없는 나.

“아, 네. 두 분의 반응이 극과 극이어서 재미있네요. 김사범 선수가 본 김병헌 선수의 오늘 피칭, 어떠셨나요?”

“뭐, 잘 던지는 친구니까요. 잘 던졌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 면역이 없으니 이런 어이없는 착각을 하는 거다.

딴생각에 빠진 나는 미처 일그러진 PD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아하하, 그렇죠? 잘 던지는 김병헌 선수! 오늘 김사범 선수, 어떠셨나요?”

“스프링 캠프의 시범경기이긴 하지만…….”

그 후로 몇몇 질문이 오가다 이내 인터뷰가 끝났다.

“수고하셨어요. 두 선수 모두요!”

“수고하셨습니다. 오늘도 미모가 열일하시네요?”

“하하, 정말요? 오늘 좀 신경 쓰긴 했는데.”

“……수고하셨습니다.”

안타깝다. 나 말고 또 이런 피해자가 생기다니. 하긴, 저놈도 여자와 거리가 먼 녀석이니. 병헌아, 너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야. 빨리 헤어 나와.

씁쓸한 유대감을 느끼며, 나는 팀으로 복귀했다.

그날 저녁, MBT 스포츠의 미투브 페이지.

[주목받는 루키! 두 예비 메이저리거의 합동 인터뷰 영상!]

한국 시간으로 오전에 올라간 이 영상에는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나에 대한 악플이.

chworld : 오, 아직까지 남아 있나 보네? 슬슬 마이너리그 캠프에 있을 줄 알았는데.

jud929 : 그러게, 잘하나 봄. 근데 김사범 쟤는 왜 말을 저딴 식으로 하지?

jkjk0030 : ㅇㅇ 애가 좀 거만하네.

kpil3000 : 쟨 고등학교 때부터 그러더니, 아직도 저럼? 이래서 실력 인성하고 인성 반비례하는 거 ㅇㅈ?

youby : ㅇㅈ ㅋㅋㅋㅋㅋ 아무리 잘 치면 뭐함, 싸가지 없는데 ㅋㅋㅋ 팬한테 사인도 잘 안 해 줘서 혼나는 거 아님? ㅋㅋㅋㅋㅋ

huuhu : 실력 인성 반비례는 아니지, 트라웃 보셈. 그냥 쟤가 인성이 별론 거 ㅇㅇ

thath : 실력 있는데 뭐, 거만할 만하지. 지금까지 마이너 안 내려간 거 보면 팀에서 애지중지 아끼는 것 같은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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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이런 상황을 오랫동안 몰랐지만.

* * *

양키즈와의 연습경기가 끝나고, 나와 이삭의 출전시간은 점점 줄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이삭, 우리 둘이 같이 오라고 했다고?”

“그래, 올게 온 거지.”

이삭과 나는 사이좋게 감독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너는 아쉽지 않아? 나야 루키지만, 너는 다르잖아.”

“뭐, 예상은 하고 있었어. 몇 가지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거든.”

“그래? 뭔데?”

“아, 몰라. 다 왔는데 가서 듣자.”

선배의 위엄인가. 예상했었지만 못내 아쉬운 나와 다르게 담담한 이삭.

우리는 곧 감독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똑똑.

“이삭입니다.”

“오, 그래. 들어오게.”

직접 문을 열어 주는 론. 내가 겪은 감독 중 제일 편한 스타일이다. 이것 또한 그의 능력이겠지.

“일단 자리에 앉지,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으니.”

감독실의 소파에 나란히 앉는 우리.

“그래, 언제나 참 어려운 순간이지. 둘 다 예상은 하고 있지?”

“예.”

“네.”

항상 웃고 있는 얼굴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변한 론.

“그래, 오늘부로 둘은 마이너리그 캠프로 갈 거야. 이삭은 더블A, 이리 시울브즈로. 그리고 킴은…….”

꿀꺽, 나도 모르게 목울대가 움직인다.

“하이 싱글A, 레이크랜드로 가네. 마침 여기 플로리다가 연고지지.”

몸에 힘이 탁 풀린다. 더블A까지는 갈 수도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하하, 실망이 여기까지 느껴지는군. 너무 그러지 말게, 아마 근시일 내에 빠른 콜업이 있을 거야. 미국야구를 배운다고 생각하고, 아니 적응한다고 생각하고 있게.”

“네.”

하이 싱글A라면 딱 중간인가? 메이저까지 3계단.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깝다.

“그럼 그렇게 하면 될 거고. 킴은 이제 나가도 좋네. 아마 구단 직원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가 설명해 줄 거네. 그리고 이삭은 잠시 남게. 좀 더 이야기할 게 있으니까.”

론의 말이 끝난 후, 나는 론과 이삭에게 인사를 하고 감독실을 나섰다. 날 기다리고 있는 구단 직원, 그리고 짐.

“짐, 캠프엔 방문하지 않는다면서요?”

“그야 구단이 꺼려하니까요. 이젠 어차피 떠날 거잖아요?”

“뭐야, 알고 있었어요?”

“에이전트는 때로는 많은 것을 알게 되죠. 아무튼, 중요한 이야기는 내가 다 들었어요. 짐 챙겨 나와요 킴.”

뭔가 쾌활한 느낌으로 짐이 짐을 챙기라고 한다. 짐도 안 들어 줄 거면서.

오늘따라 이상하게 얄미운 짐을 뒤로하고 라커룸으로 향했다.

바닥에 두던 짐을 라커로 옮긴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아쉽군.

마음속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나는 메이저리그를 떠났다.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

“킴, 삐졌어요?”

“아뇨. 그냥 뭔가 마음이 헛헛하네요.”

“하하,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마음이 좀 그런가 봐요?”

“예상이 현실로 다가오니 그런 게 있네요. 아무튼, 바로 가는 거예요?”

“설마요. 여기서 거리는 얼마 안 되지만 그래도 그렇게 빡빡하게 합류하진 않아요. 내일 오후에 합류할 겁니다.”

짐의 말이 끝나고, 한참을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메시지가 생각났다.

“아 맞다, 짐. 혹시 타격 인스트럭터가 개인적으로 연락도 하나요?”

“개인적으로? 팀 소속 인스트럭터예요?”

“음, 아니에요. 처음 들어 본 사람이 저한테 오늘 메시지를 보냈더라고요.”

짐에게 메시지를 보여 줬다.

“제시 모리슨? 처음 듣는 이름인데, 이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메시지 내용하고 번호 전송해 줘요.”

“네, 무시할 수도 있는데 아무래도 찝찝해서요.”

“그래요. 이런 걸 처리하라고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거죠.”

참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는 짐이다.

* * *

디트로이트의 감독실.

“그래서, 감독님의 말씀은 옮기는 게 낫다는 거죠?”

얼굴이 살짝 상기된 이삭이 말했다.

“그래. 구단 차원에서 내린 결론이네. 수비범위나 어깨, 모든 점에서 자네는 유격수보다 2루수로 뛰는 게 나아.”

진지한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하는 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해 보게. 지금 유격수를 고집한다면 아마 사범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자네가 결정을 내린다면 그의 옆엔 자네가 서 있게 되겠지.”

“알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로 결정하겠습니다.”

잠시 후, 감독실을 나온 이삭은 캠프에서 만난 친구이자 라이벌, 사범에 대해 떠올렸다.

덩치에 걸맞지 않게 재빠른 움직임. 안정적인 글러브질, 뛰어난 송구, 그로 인한 넒은 수비범위와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수비에 대한 자신감.

이상한 폼이지만 곧잘 때려내는 타구. 압도적인 장타력. 처음 보는 공을 골라낼 수 있는 선구안까지.

이삭 스스로 자신을 평가할 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타격도 그의 앞에서는 초라해진다.

당연한 인간의 본성, 추악한 질투가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게 느껴진다.

‘하하, 이삭. 아직 멀었네. 기껏해야 루키에게 질투라니. 나와는 안 어울려.’

다시 라커룸을 향해 복도를 걸어가는 이삭. 굳은 입술과 빛나는 눈빛이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 같다.

* * *

“네, 엄마. 잘 지내요. 아픈 곳? 아픈 곳 없는 게 아들 자랑인데요?”

오랜만의 통화에 어머니가 잔뜩 들뜨신 것 같다.

“네, 아뇨, 못해서 내려가는 게 아니라 아직 적응이 덜 됐다고 판단했나 봐요. 열심히 하면 곧 올라가겠죠.”

아버지는 아닌 척하시면서 이것저것 물어보신다. 보나마나 지인분들에게 엄청나게 자랑하셨겠지.

“어, 그래. 곧 갈 거야. 아 내가 어떻게 알아? 해외배송이라 늦나 보지. 그래, 끊자. 고3인데 공부 좀 하고. 야? 야?”

나 말고 내가 보낸 물건에 더 관심이 많은 김하별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으나 실패했다. 이런 성격은 누굴 닮은 건지.

갑자기 짜증이 훅 올라와 옆의 소파에 핸드폰을 툭 던졌다.

그 모습을 웃으며 보고 있던 짐이 입을 열었다.

“사범의 가족은 참 사이가 좋은 것 같아요. 옆에서 봐도 그게 보여요.”

사이좋죠. 저만 잘하면.

갑자기 돌아오기 전 우리 가족이 떠오른다. 나는 보상받지 못하는 노력에 지쳐 항상 날카로웠고, 프로 초반엔 가족들에게 몹쓸 모습도 간혹 보였다.

그때마다 부모님은 날 잡아 주셨지만, 숨길 수 없는 안타까움은 날 항상 힘들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내게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보자는 말씀은 절대 하지 않으셨다.

내가 야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게 야구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나는 무조건 잘해야 한다. 야구도, 가족에게도.

각오를 다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짐의 입이 열린다.

“그나저나, 준비는 됐어요?”

“무슨 준비요?”

“마이너리거가 될 준비.”

“물론이죠. 이미 한국을 떠날 때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이에요.”

다 부술 거다. 마이너건, 메이저건.

“다행이네요. 정이라도 들었는지 혼자 놓고 가기 그랬는데.”

네?

“같이 안 가요?”

“하하, 내가 말했죠? 나는 나름 유능한 에이전트라고.”

뭔가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생활하는 어린아이가 된 거 같은데.

“그리고 보통 회사는 유능한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죠. 우리의 합숙은 여기까지. 아마 마이너 구단에 가면 통역사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한 달가량을 같이 지낸 짐을 보내려니 뭔가 아쉽고 섭섭하다.

음…….

“짐.”

“왜요 사범?”

“악마의 피가 필요한 순간이에요. 딱 한 잔만.”

“하하, 사범답네요. 좋아요. 오늘 같이 악마가 되어 보죠.”

찬장 어디선가 주섬주섬 술병을 꺼내는 짐.

가만히 보고 있자니 끝도 없이 나온다.

아니 이 아저씨야. 한 잔만 마실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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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스탯 999 4번타자 - 힘 스탯 999 4번타자-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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