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김사범, 계약하다(1)
선수 보호 차원이라며 날 집까지 데려다준 짐이 말했다.
“복수는 여러 가지 길이 있어 즐거운 법이죠. 온건한 방법과 과격한 방법, 오늘 집에 가서 생각해 보세요.”
“그러죠,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집에 들어갔다. 곧이어 들어오는 김하별.
“오빠! 아까 그 흑인 누구야?”
“넌 미국 가면 위험하겠다. 세상이 어느 세상인데 피부색으로 사람을 호칭해?”
“오빠는 처음 만났을 때 흑인이라고 생각 안 했나 보지?”
음. 할 말이 없군, 졌다.
“오늘은 웬일로 일찍 들어왔냐? 공부 안 해?”
“내 성적 몰라? 오래 공부하는 건 그만큼 해야 유지하는 애들이나 하는 거고.”
“하긴, 아무튼 잘됐네. 밥 좀 차려라.”
도끼눈을 뜨는 동생, 이러다가 도발 스킬도 생기겠군.
“농담이야. 뭐 시켜 먹을래?”
“콜, 치킨.”
그때, 저 멀리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둘 다 웃기지 말고 들어와 밥 먹어라.”
아…… 치느님…….
그렇게 엄숙하고 경건한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가고, 가족이 거실에 모여 같이 TV를 보는 시간.
‘폭탄을 떨어트리기 아주 좋은 시간이군.’
입을 열어 폭탄을 투하한다.
“아빠, 엄마. 나 맘에 드는 에이전시 찾았어요.”
“그래?”
두 분 다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신다. 아, 난 사랑받고 있구나.
“네, 락네이션이라고. 괜찮은 에이전시예요.”
“락네이션? 보라스가 아니고?”
“엄만 저번에 KT인가 거기가 좋던데.”
각자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순간.
“보라스는 아직 연락이 없어요. 김병헌이 거기랑 계약했다고 하는 거 보니까 아마 거기에 올인하겠죠.”
시무룩한 아버지의 얼굴.
“그리고 엄마가 말한 거기는 싫어요. 제가 나름 알아봤는데 평판이 나쁘더라고요.”
깜짝 놀란 어머니의 얼굴.
“락네이션이 조건도 좋고, 마이너리그 때도 괜찮은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해 준다고 하더라고요.”
쉴 틈 없이 몰아친다. 눈물 젖은 마이너리그의 이야기는 한국에도 이미 널리 퍼져 있다.
“흠. 아빠가 좀 더 알아보마. 그래도 큰 결정인데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냐?”
“그래야죠. 여기 계약서예요. 제가 대충 인터넷 뒤지면서 보니까 조건이 괜찮던데요?”
가져온 계약서 봉투를 아버지께 건네드린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손.
“어디 봐봐! 이런 건 내가 봐야지!”
네가 뭔데? 넌 그냥 내 동생이잖아.
“흠흠, 비율 좋고, 애매한 표현도 없고, 괜찮네?”
“훌륭한 아는 척이었어. 빨리 아빠 드려라, 김하별.”
“그래? 괜찮았어?”
아니, 사실 안 괜찮았어. 네가 펼친 첫 장엔 그런 말 없거든.
“그래, 내가 내일 알고 있는 분께 가져가서 검토해 보마. 상의해 줘서 고맙다.”
“전 아빠 엄마 아들이니까요. 저 들어가서 잘게요.”
일어나 내 방으로 향한다. 부모님이라면 분명 합리적으로 판단하실 거다.
‘이제 남은 건 복수인가?’
오늘 밤은 즐거운 고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 * *
며칠 뒤.
“안녕하세요. 락네이션 스포츠의 짐 맥킨입니다. 짐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안녕하십니까 짐. 사범이 아버지 김철민이라고 합니다.”
나는 계약을 했다.
그리고 출발선에 섰다.
계약이 끝나고, 회사 구경 및 안내를 시켜 준다는 핑계로 둘만 남은 사무실.
“어떻게, 생각해 보셨습니까?”
“과격하게 가죠,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가라앉질 않네요.”
내 말에 잠시 고민을 하는 짐.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닙니다. 리그에서 인정받는 선수도 아니고, 유망주가 구단을 상대로 무언가를 하는 거 자체가 손해예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과 나의 차를 따라 자리에 앉는다.
“메이저리그, 미국 야구는 보수적입니다. 과격하게 처리한다면 구단들에 나쁜 인상을 심어 줄 수도 있어요.”
“그래도 진행하시죠. 나머지는 제가 제 실력으로 이겨 내겠습니다.”
“……좋습니다. 제 계획은 이렇습니다.”
잠시 후.
“악마군요, 짐.”
“별말씀을. 하루를 공치고 집에 가면, 참 열 받겠죠?”
난 그의 계획을 듣고 만족스럽게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 * *
일본, LA 다저스 극동아시아 스카우터, 앨버슨의 사무실.
“앨버슨, 묘한 소문이 하나 도는데요?”
언제나처럼 분주하게 컴퓨터와 핸드폰을 오가며 일하는 샘이 말했다.
“뭔데? 내가 지금 하는 것보다 흥미로운 거야?”
퉁명스레 대답하는 앨버슨.
“개미가 지나가는 걸 지켜보는 게 지금 하는 일보다 재미있을 거예요. 아무튼, 킴 기억하죠?”
“투수? 타자?”
“타자요. 그가 락네이션하고 접촉 중이랍니다.”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샘을 쳐다보는 앨버슨.
“투수는 보라스, 타자는 락네이션? 후, 차라리 잘됐군. 어중이떠중이들은 다 물러나겠어.”
“뭐, 그렇긴 한데, 아무튼 그쪽하고 접촉했는데, 바로 혈액부터 검사했나 봐요.”
“바로? 하, 정말 퓨어인가 보군. 아니면 그렇게 순순히 검사할 리 없지.”
핸드폰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샘.
“네,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정보통에 의하면 약물이 아니라는 것 같아요.”
“이번 해는 참 힘들군, 우리 국제 유망주 풀 얼마나 남아 있지?”
“둘 다 A라고 생각하면 아슬아슬, S가 하나라도 있으면 모자라죠.”
“산 넘어 산이군. 꼼수를 부려야겠어.”
앨버슨은 바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 * *
깊은 새벽, 벨 소리가 울리는 아파트. 계속해서 울리는 소리에 누군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는다.
“메……이슨입니다.”
[메이슨, 지금 자고 있을 때가 아냐.]
“하암, 뭐야 토니. 복수하는 거야? 기분은 새롭군.”
메이슨은 하품하면서도 정신을 차리려 노력한다.
[거기 상황이 바뀐 거 같던데? 아직 모르나?]
“뭐? 여긴 이상 없어, 토니.”
[네가 노리고 있던 타자, 락네이션과 계약했어.]
“뭐?”
예상하지 못한 듯 화들짝 놀라는 메이슨.
[지금 발표하고, 홍보자료를 보내더군. 그렇게 맘 편히 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구단주의 목을 졸라 얻어 낸 돈인 걸 명심해.]
“Shit! 알겠어. 다시 전화할게.”
‘어떤 놈이지? 이제 우리에 몰아넣고 자물쇠만 채우면 되는데!’
그의 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다음 날, 메이슨의 사무실.
메이슨과 김기덕 팀장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화도 안 받고, 심지어 만나러 가도 만나 주지 않는다고요?”
“네, 분명 최근까지 잘 진행되고 있었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김기덕 팀장이 나간 사무실.
메이슨이 한참을 고민하다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뚜르르.
[헤이, 메이슨? 오랜만이군.]
“짐. 무슨 수작이야?”
[뭐? 갑자기 무슨 말이야? 천천히 말해 봐.]
“모른 척하지 말고. 왜 이러는 건데?”
메이슨은 노기를 띤 목소리로 짐에게 따져 묻는다.
[워, 진정해 메이슨. 왜 화가 났어? 우린 항상 하던 걸 하는 것뿐이야. 우리 고객의 PR.]
“너……. 후. 좋아. 얼마야?”
[아직 이야기를 자세히 해 보진 않았지만, 한 가지는 동의했어.]
꿀꺽. 메이슨의 목울대가 움직인다.
“그래, 얼만데?”
[내 고객은 레코드를 원해.]
“뭐? 160만?”
[그보다 위. 아무튼,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아직 때가 아니거든.]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
“fuxk!”
그렇게 한 대의 전화기가 명을 달리했다.
* * *
서울, A대 병원.
락네이션이 제공한 시설에서 간단한 신체검사를 받는 내게 짐이 찾아왔다.
“헤이, 사범. 몸은 어때요?”
“좋네요, 다친 곳도 거의 다 나았다고 하던데요?”
“그래도 본격적인 운동은 좀 기다려요. 팀도 있지만, 이젠 락네이션이 개인 코치를 붙여 관리해 줄 테니까.”
“듣기만 해도 좋네요. 뭔 일 있어요? 오늘은 못 온다고 했잖아요?”
씨익 웃는 짐.
“시작됐거든요. 방금 전화 왔어요.”
“그래요? 어때요?”
“원래 사람은 자기가 가지지 못하는 걸 보고만 있을 때 제일 화나는 거거든요.”
“네?”
“그냥, 아주 화났을 겁니다. 하하.”
그 스카우터가 화내는 게 잘 상상되진 않지만, 짐이 잘하고 있다니 다행이다.
다시 내게 말을 거는 짐.
“아, 그리고 어디로 가고 싶죠? 아직 그 이야기를 안 했군요.”
“오퍼 들어온 구단이 있나요?”
“당첨이 되든 안 되든, 파워볼은 하나씩들 사잖아요?”
오, 있나 보다.
“그래요? 어디가 파워볼을 샀죠?”
“휴스턴, 클리블랜드, 마이애미, 텍사스.”
“4곳이나요?”
“아뇨, 4곳 빼고 모두 의사를 밝혔어요. 아, 애틀랜타도 빠졌군요. 그쪽은 징계가 있어서.”
채혈을 끝내고 내시경을 위해 걸음을 옮기던 내 발이 우뚝 멈춰 섰다.
“뭐라고요, 짐?”
“조건이 상관없다면, 4개의 팀을 제외하고 다 갈 수 있어요.”
다리에 힘이 빠져서 옆의 의자에 털썩 소리가 나도록 앉았다.
“오, 사범. 놀란 거예요? 아직 계약조차 안 했는데? 나중에 계약하게 되면 그 조건에 더 놀랄 텐데.”
“아뇨, 그냥 조금 당황스러워서. 뭔가 꿈이 갑자기 현실이 된 기분이네요.”
“그건 저도 그래요. 사범같이 타격하는 게 내 꿈이었거든요. 아무튼, 자세한 건 조금 이따 이야기하죠. 검사 잘 받아요.”
남은 1시간여의 검사 시간 동안, 나는 내내 멍해 있었다.
* * *
며칠 뒤, 한공고의 그라운드.
설렌다. 얼마 만에 잡는 배트인지, 간만의 연습에 흥분되는 건 나뿐만이 아닌지 야구부 인원 거의 모두가 모여 내 연습을 지켜본다.
“다 나았다곤 하지만, 몇 주 전보다 컨디션이 많이 가라앉았을 거다. 이상 있으면 바로 이야기해.”
감독님의 말씀이 끝나자 코치님이 배팅볼을 던지기 시작했다.
띠링!
확인은 나중에, 공에 집중한다.
무리하지 않고, 내 힘을 배트에 싣는 데에만 집중한다.
따악!
따아악!
몇 개나 쳤을까. 날아오던 공이 끊긴다.
“이만하면 됐다. 오늘만 날이 아니야.”
짧은 연습의 끝을 알리는 감독님의 말.
케이지를 나오자 내 주변에 모여드는 부원들.
“뭐야? 메이저리그 간다고 시위하는 거야? 몇 개를 넘긴 거야?”
“20개 중 19개, 넌 눈이 없냐?”
“아,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여전히 바보 같은 대화들.
“선배, 근데 중심이동할 때…….”
“아, 비켜봐! 내가 1번이잖아! 쟤보다 제가 먼저예요. 수비할 때…….”
스스로 사기가 떨어지길 바라는 후배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나 스스로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거다.
[부상에서 완벽히 회복되었습니다. 내구 스탯이 3 증가합니다.]
[증가한 내구 스탯에 따라, 가용 힘 스탯이 증가합니다.(243 -> 311)]
내 힘도 살아 있다.
* * *
메이슨의 집, 반짝이는 야경이 보이는 창가에서 메이슨이 통화를 하고 있다.
“토니, 잠깐 계획이 흐트러진 거야. 우린 언제나 그랬잖아? 플랜 A가 아니면 B를 가면 돼.”
“메이슨? 그래서 플랜 B가 뭔데? 네가 말한 탑급 실링을 가진 투수는 양키즈로 갔어, 이제 타자는 레드삭스로 가는 건가?”
“그 빌어먹을 놈들이 200만을 불렀다고! 남미 쪽에 배정했던 풀까지 끌어와서!”
“우리가 언제 풍족하게 스카웃했었나? 메이슨. 착각하지 마. 우린 그들처럼 돈이 많은 구단이 아니야.”
머리가 아픈 듯, 잠시 전화기를 귀에서 떼고 관자놀이를 매만지는 메이슨.
“좋아, 타자는 반드시 잡겠어. 200만을 불러서라도.”
“160만.”
“뭐? 200만 달러를 받아 냈다고 떵떵거리던 사람이 누구지?”
“그건 2명이었을 때고, 지금은 1명이야. 구단주도 기분 나쁜 눈치야. 메이슨. 기억해. 반드시 타자는 우리 유니폼을 입혀야 해.”
“……후, 노력해 보지.”
“노력 가지고 안 돼. 우린 프로잖아? 보여 줘야 해.”
“알았어. 끊지.”
며칠 전과 다르게, 싸늘함만 남은 그의 집이다.
* * *
짐의 사무실. 메이슨과 짐, 그리고 내가 앉아 있다.
먼저 치고 나오는 메이슨
“김사범 선수. 탬파베이로 오시죠. 본래 루키리그부터 시작하는 게 우리 구단의 방침이지만, 김사범 선수는 하이 싱글A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싱글A? 메이저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너무 배팅이 작은 거 아냐?”
짐이 끼어들어 정리한다.
“농담하지 마. 짐, 그깟 쇼맨십을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야. 우린 진짜 팀원을 찾는 거라고.”
어깨를 으쓱하는 짐. 메이슨이 말을 잇는다.
“우린 지금 역사적인 팀의 첫 번째 페이지를 쓰고 있어요. 고작 몇 번의 우승이 아닌, 예전 양키즈와 브레이브스 같은 위대한 왕조가 되는 것을 목표로 달려 나가고 있죠.”
잠시 숨을 고르는 메이슨.
“물론, 지금 우리의 재정과 팀 상태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오랜 메이저리그 역사 속에서 왕조를 이룬 팀들은 모두 튼튼한 재정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니까요. 하지만, 내년부터는 중계권 계약 등으로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와요.”
‘흐음. 그렇군.’
“우린 팀의 주춧돌을 구하고 있습니다. 양키스의 코어 4처럼. 팀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선수 말이죠. 탬파베이로 오시면, 제가 책임지고 김사범 선수를 도와 그런 존재가 되도록 만들겠습니다.”
“이봐 메이슨. 허황된 이야기로 내 고객을…….”
“잠깐만요.”
짐의 말을 끊으며 메이슨에게 물어본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잠시 흐르는 정적.
모두가 내 말에 집중한다.
그리고 난, 가장 중요한 걸 물어본다.
“얼마 주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