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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김사범, 다가올 미래를 향해

이삭의 차 안, 4명의 덩치 큰 남자가 앉기엔 다소 좁은 실내와 후덥지근한 날씨, 가스가 떨어진 에어컨의 조합은 그들의 불쾌지수를 폭발적으로 상승시키고 있다.

“아니 근데 왜 차 한 대로 움직인 거야?”

“한 명은 운전면허가 없고, 한 명은 차가 없지. 남은 건 두 명인데, 데이트도 아니고 남자 둘씩 짝지어서 내리는 흉악한 꼴을 보여 주긴 싫더라고.”

“아.”

이 자리의 주최자인 이삭은 묵직한 팩트로 불만에 가득한 반란군을 침몰시켰다.

“도착했다. 내려.”

차에서 내리는 일행들.

호프 앤 스테이크라 쓰여 있는 간판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며 그들의 얼굴을 비춘다.

김사범.

이삭 파레데스.

제이슨 폴리.

그리고 팀 내 최고의 투수 유망주인 케이시 마이즈.

“후, 여기 스테이크 맛있는데.”

누군가의 말과 함께 그들은 펍으로 들어섰다.

3시간 전.

운동을 끝낸 김사범의 옆에 두 남자가 계속 알짱거린다.

“아무튼, 그래서. 오늘 저녁에 갈 거지?”

“후우, 훅. 생각해볼게.”

뚱한 표정의 김사범은 미적지근한 태도로 이삭의 속을 태우고 있다.

“아니, 둘이 데이트 하는 거야? 닥치고 따라와, 마침 너와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도 있으니까.”

“……그래.”

폴리의 강력한 추파에 결국 튕기던 남자는 모르는 척 넘어간다.

그렇게 한 남자의 방황에서 시작되어 두 남자의 오지랖, 그리고 덩달아 끼게 된 남자로 마무리된 저녁이 후에 어떻게 불리게 되는지 그땐 아무도 몰랐다.

호프 앤 스테이크.

앞서 걸어가는 이삭과 케이시, 뒤따라 들어오던 사범은 펍에 들어오자마자 신기한 듯 가게를 둘러보다 폴리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 와도 신기한 곳이야.”

“뭐가?”

“2000년도 초반 헐리우드 영화에 많이 나오는 장면이잖아. 포켓볼, 다트, 저기 음악 나오는 기계.”

“주크박스?”

“그래 그거. 모든 게 다 익숙한 느낌인데 경험해 보진 못한 거니까. 이상하고 신기하지.”

“여긴 나도 신기해.”

4명의 남자가 홀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스테이크 4, 아니 8인분. 맥주 3잔. 물 한 잔 주세요.”

“8인분 맞죠? 알겠습니다.”

주문을 마치자 일행의 분위기가 풀어지기 시작한다.

“오늘 모인 사람들, 화려한데?”

“팀의 에이스와 마무리, 유격수하고 올스타급 2루수니까. 화려하지.”

“마지막에 올스타만 빼면 맞는 말이군.”

“에이스란 표현 별로 안 좋아해. 그냥 존나 쩌는 투수 정도로 불러 줘.”

저 멀리 주크박스에 시선을 빼앗긴 김사범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이 크게 웃는다.

“저게 그렇게 신기하냐?”

“한국엔 없거든. 가서 해보자.”

결국, 폴리를 끌고 주크박스 앞으로 가는 김사범, 그 모습을 보고 케이시가 이삭에게 묻는다.

“생각보다 헐렁하네? 운동할 때와 달라.”

“아, 그런 게 있지. 처음엔 항상 날카롭더니, 많이 바뀌었어.”

“흠…….”

주크박스 앞에서 티격태격하는 둘을 보며 다시 입을 여는 케이시.

“넌 곧 메이저로 가겠지?”

“아마도? 확장 로스터가 시행되면 올라가겠지. 왜?”

“난 월드시리즈에서 공을 던지는 게 꿈이거든.”

“갑자기 진지한 이야기야?”

“작년 드래프트 때, 디트로이트가 많은 돈을 준 게 계약에 영향을 주긴 했지만, 결국 내 마음을 돌린 건 그들이 제시한 청사진 때문이야.”

“너한테 뭐라고 말했는데?”

“앞으로 3년, 아니 2년 안에 적어도 디비전시리즈에 올라갈 만한 팀으로 만들 거라면서 여러 계획을 보여 주던데? 그중엔 이삭, 너도 있었고.”

“흠…….”

이삭이 잠시 말을 고르는 사이, 음식이 나온다.

“음식 나왔습니다. 여기 맥주도.”

“고마워요.”

“폴리! 와서 먹어!”

다시 넷이 된 테이블, 잠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씹는 소리만 울려 퍼진다.

“후, 이제 좀 살겠네. 그래서 케이시, 아까 한 말의 결론이 뭐야?”

“아, 이어서 말하자면. 결국, 리빌딩에서 제일 중요한 건 유망주들의 폭발이잖아?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구단에서 주목하고 있는 유망주고. 그래서 궁금했어. 여기 있는 네 명이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는지.”

생각보다 진지한 케이시의 말에 하나둘 맥주를 들이켠다.

“그래서, 목표가 뭔데?”

케이시에게 오히려 되묻는 김사범.

“아까 이삭에게도 말했지만, 월드시리즈. 그게 내 목표야.”

“그럼 안 되겠네. 목표가 달라.”

테이블 위의 눈이 김사범에게로 향한다.

“난 메이저리그 역사에 내 이름을 올리는 게 목표다. 월드시리즈는 과정일 뿐이야.”

어두컴컴한 홀에서 그의 눈이 빛난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디트로이트는 저번 시즌보다 더 빠른 기세로 곤두박질치고 있었고, 우리 팀, 시울브즈는 더욱 맹렬한 기세로 승리를 쌓아가고 있다.

8월이 끝나가는 지금, 내 성적은 이미 리그의 수준을 초월했다.

129경기 490타석 397타수,

그리고 0.402, 0.515, 0.673의 슬래시 라인과 정확히 50개를 친 홈런.

주변에서 슬슬 메이저에 관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마 이번 시즌엔 더블A에서 마무리할 가능성이 커요. 트리플A에 갈 가능성도 있지만, 굳이 보낼 거 같진 않네요.]

쾌활한 목소리로 속상한 이야기를 하는 짐.

“이제 슬슬 여기가 답답한 느낌이에요. 어서 메이저로 올라갔으면 좋겠네요.”

[하하, 서비스 타임도 있고, 망해 가는 시즌 중간에 올릴 이유가 없죠. 어차피 디트로이트가 리빌딩 중이라는 건 팬들도 알고 있으니 손해 보는 것보단 다른 유망주를 올리는 게 낫죠.]

“내년엔 메이저에서 시작할 수 있겠죠?”

[아마 4월에나 올라갈걸요? 한 달 차이로 몇 천만 불이 움직이는 시장이니까요. 저들이 서비스 기간 중 장기계약을 노리면 개막전 로스터에도 들 수 있겠지만……. 글쎄요.]

“결국, 엉덩이 무겁게 버텨야 한다는 소리네요.”

[맞아요. 그래도 사범의 말을 들어보면 리빌딩의 끝이 보이는 거 같네요. 아, 디트로이트에 가 본 적 없죠?]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범죄의 도시.

“이야기는 들어봤죠. 아, 그리고 영화도 봤고.”

[8마일?]

“로보캅.”

[명작이죠. 아무튼, 디트로이트도 지금 변화하고 있어요. 내수가 살아나면서 주 정부도 슬슬 움직이네요. 내년엔 그래도 사람이 걸어 다닐만한 정도는 될 거 같아요.]

“영화보다 더 살벌한 도시라고 말은 들어 봤는데…….”

[주거지역은 괜찮아요. 다운타운으로 들어가지만 않으면. 아무튼, 더 열심히 뛰어요. 지금 추세면 몇 년 안 돼서 빅딜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 안타 하나가 나중에 천 불이 될지, 만 불이 될지 아무도 몰라요.]

“역시 피도 눈물도 없는 에이전트네요. 사람의 노력을 돈으로 바꾸다니.”

[그게 내 일이에요 사범. 아무튼, 그냥 지금까지처럼 하면 돼요, 맘 편히 먹고. 홈런 뻥뻥 치고.]

“도움이 됐어요. 이만 끊죠.”

[그래요. 앞에 말은 반쯤 농담이었지만, 하나는 진심이에요. 맘 편하게 먹으라는 거.]

“알겠어요.”

화면의 버튼을 눌러 통화를 끊는다.

‘후, 오히려 맘이 편해지네.’

겪어 보지 못한 일에 사람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주변 분위기가 들썩거리니 덩달아서 나도 흔들리는 게 느껴져 한 짐과의 통화.

목표를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통화였다.

‘73개가 메이저 기록이었나? 한 달 안에 23개라…….’

이왕 남아 있는 거, 전설을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 *

평범한 날이다. 더운 날씨, 내리쬐는 햇볕.

다른 점이라면, 두 경기 후면 드디어 메이저리그에서 확장 로스터가 시행된다는 것.

“어제 잘 놀았냐?”

“어, 죽겠다. 술은 많이 마시지 않았는데 너무 늦게까지 놀았어. 야구 시작하고 처음으로.”

라커룸에서 처음 보는 유니폼을 꺼내 입었다. 알록달록한 무늬가 광대를 연상시킨다.

“이번 이벤트는 유니폼이야? 아 제길, 가뜩이나 힘든데 이런 무늬가 있으면 통풍도 안 되잖아.”

유니폼에 대한 불만을 주절거리는 이삭을 데리고 그라운드로 향한다.

이제는 이삭이 내 왼쪽에 있는 게 익숙하다. 오늘이 지나면 이 익숙함도 다시 생소함으로 바뀌겠지만.

내년이 오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호흡을 맞추는 경기다.

“플레이 볼!”

케이시가 와인드업을 시작한다. 힐끔 본 이삭의 무게중심이 아래로 내려간다. 나 역시 무의식중에 중심을 아래로 누른다.

‘이 풍경을 내년에도 볼 수 있길. 나와 팀의 성공을 위해.’

언제나 미래는 바뀐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폴리만 해도 그러니까.

잡념을 지우고, 경기에 집중한다.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은 특히 더 승리가 고프니까.

* * *

“붐! 붐! 붐! 붐!”

[그라운드에 붐! 콜이 울려 퍼집니다! 65번째 홈런이 왼쪽 담장을 부쉈습니다!]

[시즌이 딱 10경기 남은 시점에 65개, 비록 마이너지만 ‘그’의 기록을 넘보고 있네요.]

[싱글A에서 올라오느라 한 달이 늦었는데도 어마어마한 속도로 홈런을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쉬워요. 마이너에서라도 그의 기록을 깨는 걸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텐데요.]

[중의적인 표현인가요?]

[하하,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 * *

따아악!

우와아아아아아!!

괴성이 울려 퍼지는 관중석에서 중년의 두 남자가 서로를 보며 말하고 있다.

“잭! 봤어? 70개야!! 한국에서 온 폭격기가 여기에 폭탄을 뿌리고 있다고!!”

“와……. 정말, 이런 장면을 직접 보다니. 그것도 마이너에서!”

“3개 남았어. 지금 5경기 남았지?”

“그럴걸? 다음 경기가……. 제길! 원정이야!”

“마지막 2경기는 홈경기잖아? 매진이겠지?”

“오늘 경기 티켓도 겨우 산 거 몰라?”

“아, 진작에 예매를 해야 했는데…….”

* * *

이리 시울브즈의 마지막 홈경기. 우승을 결정짓는 포스트시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은 만석이다.

“오면서 봤어? 지금 경기장 주변에도 사람이 쫙 깔렸어!”

호들갑을 떨며 내게 말하는 폴리. 가볍게 대꾸해 준다.

“왜, 긴장돼?”

“내가 왜 긴장해? 저기 사람 중 90%는 널 보러 온 건데.”

“뭐가.”

“한 개 남았는데, 긴장 안 돼?”

손질하던 글러브를 내려놓고, 폴리에게 말했다.

“한 개 더 쳐 봤자 동률이잖아. 마지막 타석에서 레코드를 앞두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나저나 어차피 내가 74개 쳐도 메이저 기록이 아니잖아?”

“그래도 상징성이라는 게 있으니까, 메이저에서도 이렇게 해 달라는 기대감이지. 그 기록을 수치스러워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덕분에 9월 한 달간 도핑 테스트만 2번 했다. 소변, 혈액.

“뭐, 아무튼. 여기가 메이저도 아니고. 너도 긴장 풀고 즐겨, 신나잖아?”

담담하게 말한 나는 덕아웃으로 향했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다시 복도로 나왔다.

“폴리.”

“왜?”

“메이저리거는 항상 이런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거지?”

“그렇겠지?”

놀란 마음도 잠시, 짜릿함이 몸을 달린다.

“후, 그거 기분 째지겠네.”

* * *

말이 씨가 된다.

요즘 들어 기분이 좋아 함부로 내뱉는 말이 많았다. 반성한다.

“타자, 타석으로.”

경기는 9회 말, 동점 상황. 선두타자로 나섰다. 평소였다면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1루로 나갔을 거다. 고의사구로.

하지만 기록이 걸려있는 타석에서 그럴 순 없겠지. 여기가 메이저여도 용납되지 않을 행위니까.

앞선 3번의 타석에서 나는 내 홈런 개수를 73개로 만들었다. 그리고 경기의 마지막 타석.

73.

가치를 잃어버린 숫자. 그리고 내가 메이저에서 밀어낼 숫자이기도 하다.

오늘의 무대는 그 예행연습이다.

흘깃 본 포수의 무릎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인다.

포수가 이러는데, 마운드의 투수는 지금 거의 해탈해서 득도를 눈앞에 두고 있다.

나무아미타불.

빠악!

높은 포심을 받고, 그들을 사바세계로 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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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스탯 999 4번타자 - 힘 스탯 999 4번타자-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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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스탯 999 4번타자 - 힘 스탯 999 4번타자-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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