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김사범, 과거와 만나다(2)
B팀의 수비는 몇몇 사람의 감탄과 한 사람의 만족, 마지막 한 사람의 통증으로 끝났다.
“아오……. X나 아프네…….”
경기 전 내뱉은 말이 있어서인지 티도 못 내고 끙끙대는 꼴을 보자니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네 입으로 살살 던져 달라고 할 때까지 조져 주마.’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복수. 내 생활신조다.
오랜만에 느끼는 희열에 정신이 팔렸을까. 2번째 투수의 호투로 6번으로 나선 후배가 순식간에 아웃 카운트로 바뀌었다.
“쟤 왜 이렇게 죽어라 던져 대? 가뜩이나 뽈 더러워서 짜증 나는데, 경기도 아니고 좀 살살 던지지.”
대기타석으로 나가면서 2번째 투수에 대해 떠올려 본다.
‘김장호. 언더핸드 투수, 프로에선 더러운 싱커볼하고 커브로 재미를 본 선수가 됐는데, 고등학교 시절은 어땠더라?’
주전에서 밀리면서 주변을 돌아볼 정신이 없어 선후배들의 공을 많이 보지 못했던 게 아쉬웠다.
* * *
심판을 보고 있던 코치가 볼을 가지러 잠시 떠난 사이, A팀의 포수 정협은 자연스럽게 7번을 치는 후배에게 말을 건다.
“야, 오늘 장호 쟤 뽈 장난 아니지 않냐?”
“선배, 우리 같은 팀이에요. 우리한테까지 이러기예요?”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질렸다는 듯이 포수에게 말했다.
“야, 내가 이걸로 야구 하는데 그걸 하지 말라 그러면 뭐해 먹고 사냐? 아무튼 쟤 싱커 배웠다더니 아주 죽인다 죽여, 조심해.”
“하……. 좋은 거 하나 던져 주세요.”
“공을 내가 던지냐? 일단 몸쪽 직구 하나 낼게, 잘 쳐라? 야, 코치님 온다 준비해.”
악마의 유혹, 입 잘 털기로 유명한 선배의 말을 믿기엔 좀 꺼림칙했지만 순진한 후배는 너무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선배, 오늘만 믿습니다. 몸쪽!’
“자자, 원아웃! 장호야 이대로 가자!”
투수의 피칭이 시작되고, 이내 공이 몸쪽으로 오기 시작한다.
‘감사합니다. 선배! 이 은혜는 이따 음료수로 보답을……!’
노린 코스로 공이 오자 자신 있게 스윙을 시작하는 타자, 하지만.
‘어, 어?’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급격하게 가라앉는 공, 싱커다.
이런 상황에선 차라리 스윙을 끝까지 가져가서 스트라이크를 먹는 게 나았지만, 아직 어린 타자는 본능적으로 커트를 위해 시작된 스윙의 궤적을 수정한다.
틱.
펑!
“좋아! 투아웃! 쉽다 쉬워!”
그리고 다음 타석은 한공고의 골칫거리이자 트러블메이커, 김사범이다.
‘미안하다 상진아. 너만 넘기면 공수교대라는 유혹이 너무 커서 형이 어쩔 수 없었다.’
“자자, 한 개 남았다! 다들 알지?”
이닝 마지막에 나서면 팀 동료조차 수비를 준비하는 타자, 김사범.
A팀 누구도, 심지어 투수조차도 그에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 * *
필드에 팽배한 나태한 분위기, 이 경기가 코칭스태프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첫 경기임에도 어린 선수들은 방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야 좋지 뭐.’
배트를 잡자 느껴지는 엄청난 힘. 손아귀 힘으로 배트를 으스러트릴 수 있을 것 같은 힘에 ‘혹시…….’ 하는 마음조차 사라짐을 느낀다.
“에요, 사범? 뭔가 좀 바뀐 거 같다? 쉬는 동안 티비 좀 봤나 봐?”
이맘때의 나와 전혀 다른 타격 준비 자세를 보고 포수가 말을 건다.
“좀 다르지? 아마 아주 많이 다를 거야.”
“크크큭, 너 오늘 아침부터 좀 웃기다?”
“잡담 그만하고 공 던져라, 춥다.”
“예이 예이.”
왼쪽 다리를 연 오픈 스탠스, 잔뜩 웅크린 상체. 테이크백이 필요 없을 정도로 올라간 양손, 시야의 흔들림을 막기 위해 턱을 왼쪽 어깨에 꽉 붙인다.
프로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어떻게든 방망이를 공에 맞춰야 했다. 그래서 만든 폼.
투수의 눈빛에서 날 얕보는 게 느껴진다. 더러워진 기분을 뒤로 밀어 놓고 생각한다.
‘팀 내에서 타격 랭킹은 꼴지, 발도 빠르지 않다. 거기다 큰 덩치로 인한 상하로 넓은 스트라이크 존. 나라면 무조건!’
투수의 몸이 꼬이기 시작한다. 언더핸드 투수 특유의 디셉션 때문에 팔을 뻗기 전에는 구종을 확신할 수 없다.
“훕!”
꽤 빠른 투구 폼이다. 집중하자, 집중하면 무조건 보인다.
[스킬 ‘정견(正見)’을 습득합니다. 공격을 보다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뭔가 소리가 들리지만 무시한다. 내 눈에 상대 투수의 모습이 느리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내 투수의 손을 떠나는 공, 예상이 맞았다.
‘존 중앙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싱커!’
투수가 공을 던지고 포수 미트에 박히는 시간, 약 1.5초. 이제 이 시간은 나의 것이다.
변화가 시작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기다린다. 내 타격 폼은 그걸 위해 만들어졌으니까.
레그킥은 없다. 노스텝에 가깝게 왼발의 뒤꿈치만 살짝 들었다 놓는다. 열린 시야에 여전히 공이 오는 모습이 보인다.
홈플레이트 근처, 변화가 시작된다. 테이크백 없이 배트가 가장 빠른 길로 내려온다. 이어서 시작된 강력한 힙턴으로 발생한 회전력을 그대로 배트에 전달한다.
그리고 결과는.
따악!
“뭐, 뭐야!”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 공에 놀란 포수와.
“아…….”
무언가를 예감한 듯 뒤조차 돌아보지 않는 투수의 모습.
“호, 홈런!”
한 박자 늦게 들린 코치의 홈런 선언이다.
* * *
“녀석들, 방심하지 말라고 수없이 말했는데 또 방심을 하는구만.”
“아직 애들이니까요, 서로 너무 잘 알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어, 우리 팀은 아직 방심하고도 상대를 이길 만큼 성숙하지 않아.”
“경기 끝나고 주의를 시키겠습니다. 그나저나 사범이가 타격 폼을 바꾼 거 같습니다.”
“그렇군, 공을 오래 보려고 하는 건가? 쯧쯧, 공을 맞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멀리 못 보내는 게 문제인데. 잘못 생각하고 있구만.”
“저도 동의합니다. 개선하려고 하는 의지는 좋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 같은데요?”
“일단 김 코치는 이 경기 끝나자마자 사범이 불러서 잘 타이르도록, 대수비라도 쓰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네, 알겠습…….”
따악!
순식간에 멀어지는 공, 얼마나 강한 힘이 실렸는지 연습구장의 담장을 넘고도 아직 포물선의 정점조차 도달하지 못했다.
“…….”
“…….”
“이봐 김 코치.”
“네.”
“저런 폼으로 저런 타구를 날리는 게 전혀 이해가 안 가는데, 자네는 이해가 되나?”
“……저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타격 자세에서 힘을 모으는 동작이 아예 없는 것도 신기한데……. 저런 타구는…….”
“일단 우연일 수 있으니 좀 더 지켜보세.”
홈플레이트에서 시작한 발걸음은 다시 홈플레이트로 돌아오며 끝났다.
“어때, 티비 좀 보고 바꿔 본 건데. 진짜 다르지?”
아직도 멍하니 있는 포수에게 한마디를 남긴 후, 덕아웃으로 천천히 들어간다.
아직도 현실을 부정하며 멍하니 굳어 있는 녀석들.
“우연이겠지?”
“당연하지! 고교 리그에서 홈런은커녕 담장도 한 번도 못 맞춘 선배인데.”
그리고 자기들끼리 속닥이는 녀석들.
‘상관없다. 어차피 아직 경기는 많이 남았으니까.’
“오늘 경기는 A팀이 이겼다. 하지만 모두 느낀 바가 있는 경기였을 거라고 믿는다. 원래 경기 후에 휴식하려 했지만, 코치들의 지시에 따라 훈련을 하고 복귀할 수 있도록. 김사범? 넌 나를 따라와라.”
4타석 3타수 3안타 2홈런 1볼넷 4타점.
오늘 청백전에서 내가 올린 성적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 타격 폼은 뭐지?”
“연구했습니다. 그동안 강하게 치려고 한 게 오히려 더 안 좋은 영향을 준 거 같습니다.”
“타격 폼을 일주일 만에?”
“다행히 몸에 잘 맞는 거 같습니다.”
“흠…….”
“약속하신 건 믿겠습니다. 전 아직 보여 드릴 모습이 많습니다.”
“그래, 알았다.”
“아, 그리고 스윙하다 허리 쪽이 조금 불편해서 그런데 먼저 들어가서 쉬어도 되겠습니까?”
“그래? 다른 불편함은 없나?”
“네, 가볍게 근육이 올라온 것 같습니다. 별다른 이상은 없을 거 같습니다.”
“알았다. 먼저 들어가 쉬도록.”
반쯤은 사실이다. 달라진 내 모습이 너무 신나 무리하고 말았으니까.
[힘 수치(999+)에 비해 내구 수치(10)가 너무 낮습니다!]
게임에선 그저 수치상의 문제였지만, 현실이 되니 문제가 심각하다.
‘온몸이 무력하다. 힘을 받아 줄 만큼 몸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그런가? 게임처럼 아이템으로 도배할 수 있으면 쉽게 해결되겠지만…….’
가벼운 부상을 방치하다 고질병이 된 케이스를 12년 동안 너무 많이 봐 왔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지옥 같은 훈련이 되겠군.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몸을 만들어야 해.’
그리고 또 하나.
[999999번의 스윙(비활성화)
- 활성화까지 15/999999]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지 못하던 12년.
이제는 내가 노력하면 할수록, 날 더 높은 곳으로 보낼 수 있다.
* * *
“전지훈련도 거의 끝나가는군, 이제 한 경기 남았지?”
“네, 제주공고와의 경기만 남았습니다.”
“그래, 이제는 시즌을 꾸릴 주전을 결정해야 하겠군.”
“코치진에서 꾸린 자료입니다.”
[한공 고등학교 주전 라인업(가안)
포수 - 정 협
타 0.297 출 0.340 장 0.410
포수로서 수비력 탁월, 데이터를 잘 활용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으나 투수와의 호흡이 뛰어나며 수비진을 이끄는데 탁월함.
…… 중략 ……
유격수 - 배 종일
타 0.309 출 0.350 장. 0.380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준수한 수비, 뛰어난 신체능력으로 놀라운 수비도 보임. 2루수를 맡을 김현석과 중학 야구 동기로 키스톤 콤비로써 좋은 호흡이 기대됨.
…… 후략 ……]
“음, 내가 생각했던 라인업과 비슷하구만. 유격수를 제외하고 말이야.”
“네? 종일이를 주전으로 쓰지 않으실 겁니까?”
“사범이가 있잖나, 애초에 수비는 거의 완벽했고, 이제 부족했던 약한 송구와 타격 능력까지 개화했으니 당연히 사범이를 써야겠지. 3학년이기도 하고.”
“하지만 연습경기 몇 경기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연습 때도 훌륭했던 거 같은데? 또 다른 이유가 있나?”
“지금 모습을 지속해서 보여 준다면 당연히 사범이가 주전이 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실력 외에 다른 요소들 때문에…….”
“팀 내 융화 말인가?”
“네, 지금 주전으로 뛰는 3학년들 중 태연이를 제외하고는 사범이와 척을 지고 있습니다. 수비진을 이끌 유격수로는 치명적입니다.”
“음, 자네들. 1학년 때 사범이를 기억하나?”
“네. 기억합니다. 1학년 때는 굉장히 인상 깊었으니까요.”
“그토록 오만하게 행동했음에도 1학년 중에 그 녀석의 말을 허투루 듣는 녀석이 있던가?”
“……?”
“내가 그 녀석을 직접 데려온 건 그 오만함과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네. 자기에게 확신이 있는 선수는 주변 선수들까지 그 영향력을 받아 날뛰게 하지. 당장 2년간 몰락해서 그 믿음이 흐려졌지만, 지금 기세로는 곧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스타가 될 놈이라면 응당 그래야지.”
“스타요?”
“그래, 그저 그런 선수가 아닌 스타. 그런 눈빛을 가진 녀석들은 비웃음쯤은 가볍게 부숴 버리고 자기 자리를 찾을 거라네. 아무튼, 이건 내 의견대로 하도록 하지. 이번 시즌 주전 유격수는 김사범이야.”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으로는 타순과 투수진을…….”
* * *
“흡!”
의식을 집중해서 내려간다. 한순간이라도 집중이 흐려져 잡고 있던 복압을 놓친다면 허리에 치명적이다.
“후!”
상체의 앞, 쇄골과 어깨 근육으로 지탱하고 있는 바가 출렁이는 게 느껴진다. 몇 걸음 앞으로 가 스쾃트랙에 바를 올려놓다.
‘야구 하지 말고 파워리프트 선수로 나서 볼까?’
245KG, 프런트 스쾃을 하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무게이다.
‘중량급 역도 선수 정도 되려나? 이 이하는 몸에 부하가 안 걸리니…….’
잔뜩 성나 있는 하체를 살살 풀어 주고 있다 보니 밖이 소란스러운 게 느껴진다.
“라인업 떴다!”
“이번이 마지막 연습경기지? 사실상 주전이겠네?”
“당연하지! 빨리 가 보자!”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이제 진짜 새로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