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김사범, 2020시즌(포스트시즌과 뉴욕)(2)
[2회에도 양 팀 투수의 호투가 이어집니다.]
[J.A. 햅 선수와 뷰 버로우즈 선수 모두 사이좋게 볼넷 한 개씩을 주고받으며 이닝을 마무리했습니다.]
[아,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지금 이 경기만큼 주목을 받고 있는 매치업이죠? 보스턴과 클리블랜드의 경기에서 점수가 났다고 하네요.]
[더블헤더 첫 경기를 마친 현재, 아메리칸리그의 상황은 중부지구는 디트로이트가 1위에 올라섰고, 동부지구는 양 팀 간 승차가 없습니다. 오늘 경기하는 네 개의 팀 모두 물러날 곳이 없어요.]
[뉴욕의 스코어는 0:0, 보스턴의 스코어는 1:0으로 클리블랜드가 앞서고 있습니다.]
[이 경기가 끝나고 어떤 결과가 만들어질지 정말 궁금하네요. 앞으로도 타 구장에 다른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회 말, 양키스의 공격이 끝나고 우리가 공격할 시간이 왔다.
3회 초. 타순은 8번 포수 제임스 맥켄부터 이어진다. 사실 수비와 튼튼한 몸 말고는 그다지 강점이 없는 선수라 기대가 되진 않는다.
바로 그때.
퍽!
[아, 몸에 맞는 공이 나왔네요!]
“폴리!”
내가 말 안 해도 케이시가 알아서 커트해 줬다. 상황도 상황이고, 전혀 고의라고는 볼 수 없는 몸에 맞는 공이었다.
……사실 내가 보기엔 멕켄이 몸을 무리해서 집어넣은 것 같다.
그리고 이어서 타석에 들어선 9번 키브라이언 헤이스. 2할 8푼 대의 나름 괜찮은 타격 성적을 보여 주는 솔리드한 3루수.
“볼!”
초구부터 존에서 확연하게 벗어난 공을 뿌리는 J.A. 햅.
결국 초구에 이어 2구, 3구도 볼 판정을 받았다.
좋아. 뭔가 흐름이 좋다.
“타임.”
아…….
아쉽게도 양키스의 포수인 게리 산체스가 바로 타임을 부르며 마운드로 향했다.
“이건 좀 아쉽네요. 그쵸, 미기?”
“그렇네. 그 성질 급하던 녀석이 이젠 마운드에 올라갈 줄도 알고. 세월이 참 많이 흘렀군.”
은퇴가 가까워지는 아저씨들의 특징은 사소한 일에서도 세월의 흔적을 찾아낸다는 거다.
잠시 후, 짧은 대화가 도움이 된 건지, 흔들리던 투수의 제구가 갑자기 다시 잡혔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리고 공 세 개로 셧아웃.
저게 미국산 롤러코스터의 위엄인가? 투구 내용이 위아래로 요동치는 게 어마어마하다. 내가 양키스의 팬이었다면 어지러움에 벌써 화장실로 달려갔을지도 모른다.
[9번 키브라이언 헤이스 선수가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다음 타석은 1번 이삭 페레데스 선수.]
[이제 빅리그 2년 차 선수인데 타율이 3할 2푼대, 출루율은 4할에 가깝습니다. 리드오프로서 아주 잘해 주고 있어요.]
대기타석으로 나서며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이삭을 믿는다.’
‘나는 이삭을 믿는다.’
‘이삭은 절대 병살을 치지 않을 것이다.’
딱!
설마?
[이삭 선수, 초구를 쳤습니다! 이 공은 유격수 방향으로! 병살 코…… 공이 튕겼습니다!]
이삭의 타구가 유격수 정면으로 향하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공이 그라운드에서 튕긴다. 한 번, 두 번, 세 번?
대시를 하면 충분히 숏바운드로 처리할 수 있던 타구를 병살을 위해 기다린 것 같은데, 불규칙 바운드가 됐다.
“이삭! 뛰어! 뛰어!”
나는 나도 모르게 이삭에게 외치고 있었다.
[디디 그레고리우스, 당황하지 않고 몸으로 막은 뒤 2루로 송구! 아웃! 1루엔! 송구를 포기합니다. 타자 주자는 세이프!]
[느린 그림을 보면 나오지만, 내야 안쪽 잔디와 흙의 경계선에 맞으면서 불규칙 바운드가 나온 것 같아요. 이건 몸으로라도 막아 낸 게 다행입니다.]
[드디어 타석에 들어서는 김사범 선수!]
투아웃 1루, 어제까지만 해도 배트를 거꾸로 잡고 타석에 들어서 볼까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왜?
나를 상대하지 않을 게 뻔하니까.
하지만 오늘 경기는 팀 대 팀으로 광역 도발을 날린 상황. 과연 양키스에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아주 이를 갈고 들어오네?”
타석에 들어서자, 게리 산체스가 땅을 고르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좋아.
“루키 시즌에 이런 기록 세우기 쉽지 않잖아요. 저기 있는 저지의 기록을 넘진 못할 것 같지만.”
“하하, 자신만만하네. 디트로이트는 루키를 살살 다루나 봐?”
“그럼요. 저 같아도 이런 루키면 살살 다룰 텐데요.”
“너, 루키가…….”
“그만. 잡담은 경기가 끝나고 하지.”
내가 이래 봬도 매일 저녁 네 명이서 디스배틀을 하는 사람이야.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시도를.
‘후우, 집중하자.’
그래도 게리 산체스의 시도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내 집중력을 약간이나마 떨굴 수 있었으니까. 물론 정말 약간이어서 문제지만.
타석에 오른발을 깊게 박아 넣고, 내게 올 공을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투수가 던진 초구가 내게 향했다.
후웅!
“스트라이크!”
와우, 대기타석에서 많이 지켜봐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깜짝 놀랐다.
존 한가운데로 오다 뚝 떨어지는 싱커. 전광판의 구속은 91마일을 찍었다.
‘이건 거의 투심 아냐? 투심이라 보기엔 움직임이 심하긴 한데.’
마운드의 J.A. 햅도 사실 자존심이 상했을 거다. 1회, 첫 타석부터 고의사구라니. 팀 입장에선 투수가 무조건 질 거 같다고 말하는 거였으니까.
그래도 초구부터 전력투구로 던질 필요는 없잖아.
[아주 좋은 공을 던졌습니다.]
[와, 처음 볼 땐 실투인 줄 알았어요. 순식간에 확 가라앉는 아주 좋은 싱커였습니다.]
[이번 시즌 J.A. 햅 선수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싱커입니다. 시즌 초반 성적이 좋지 못하다가 싱커 비율을 높여 가면서 무서운 속도로 승리를 쌓았거든요?]
[흔히 말하는 싱커볼러로 변신한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싱커볼러라 불리는 투수들은 많으면 투구 비율의 70%, 80% 정도까지 싱커를 던집니다. 하지만 J.A. 햅 선수 같은 경우 많아도 30%를 넘지 않고 있어요. 아직 전문 싱커볼러라기보다는 싱커를 아주 잘 사용하는 투수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제구가 안 좋은 투수가 1-0에서 던질 수 있는 공은 뭐가 있을까?
그나마 제구가 되는, 자신 있는 공?
아니면 떨어지는 유인구?
상대가 장타력이 있으니, 다시 한 번 싱커?
생각이 점점 복잡해진다.
사인 교환이 끝난 뒤, J.A. 햅은 투구 동작에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 둘, 셋…….
“타임!”
마침내 투구 동작을 시작하려는 모습이 보일 때쯤, 나는 타임을 외치며 타석에서 나왔다.
투구 동작이 시작됐다고 볼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받아들여졌나?
다행히 받아들여진 것 같다.
[아, J.A. 햅 선수가 잠시 시간을 끌며 심리전을 걸자마자 김사범 선수가 타임을 외치며 타석을 벗어났습니다. 순순히 당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죠?]
타석에서 나온 김에, 체크스윙을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기록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타석에서 점점 더 쓸데없는 생각이 떠오른다.
‘미기가 했던 조언을 떠올리자. 머리를 비우고. 그저 공이 오는 대로 치는 거야.’
“타자, 타석으로.”
심판의 말에 다시 타석에 들어서서 루틴을 시작했다.
생각 없이. 정말 공이 오는 대로, 좋아 보이면 칠 거다.
“흐압!”
투수의 기합 소리와 함께, 언제나처럼 공이 홈플레이트를 향해 날아온다.
‘포심, 낮다.’
판단의 근거는 그저 내 눈이다.
그냥 놔두면 볼이 될 공. 하지만 내 본능은 그걸 거부했다.
‘세게, 띄운다!’
배트를 옆구리에 최대한 붙이며 넘어지기 직전까지 상체를 기울인다. 본래 레벨 스윙이었던 스윙의 궤도가 자연스럽게 어퍼 스윙으로 바뀌었다.
따악!
그런 내 스윙에 맞은 공이 하늘을 향해 높게 떠오른다. 좋게 봐줘도 외야 플라이로 끝날 거 같은 공. 타구를 바라보던 J.A. 햅이 천천히 덕아웃으로 걸어 들어가려 한다.
[김사범 선수, 쳤습니다! 높게 솟구친 공! 타구는 외야를 향해 높게 뜹니다! 좌익수, 뒤로! 뒤로!]
타격 후 공을 지켜보고 있는 나도, 덕아웃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타구를 바라보고 있는 J.A. 햅도, 좌익수로 나서 타구를 잡으려 낙구지점을 가늠하는 스탠튼도 모두 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왜 안 떨어지지?’
[어어! 어어! 공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타구가! 좌측 담장을! 담장을! 넘었습니다! 김사범 선수의 투런 홈런! 시즌 47호!]
‘어……? 이게?’
뭐가 됐든, 나는 일단 1루를 향해 빠르게 달려 나갔다.
[와, 이 타구가 홈런이 될지 몰랐네요. 지금 화면에 나오지만, 타구의 발사각도가 47도거든요? 이 정도 발사각도면 보통 내야 플라이, 잘해도 외야 플라이입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47호 홈런을 47도의 발사각도로 쳐낸 김사범 선수입니다! 50-50까지 단 3개의 홈런만 남겨 놓고 있습니다!]
* * *
김사범이 47도 각도로 쏘아올린 47호 홈런이 담장을 넘어가는 순간.
양키스의 덕아웃이 움직였다.
“불펜에 준비하라고 전하게.”
“네? 아직 3회입니다. 지금 내리기엔…….”
“시즌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경기야. 언제라도 투입할 수 있게 준비해 놔야 해.”
“……알겠습니다. 그럼 누굴?”
“킴, 킴을 준비시키라고 전해.”
띠리리리.
아직 조금 이른 시간, 경기를 보고 있는 불펜 투수들의 대화를 제외하면 조용하던 불펜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네, 알겠습니다.”
덕아웃에서 불펜으로 통하는 전화가 울린 것으로 봐선 이번 경기는 불펜 투수들이 조금 이른 출근을 할 것 같다.
“킴, 준비하지. 다음 수비까지 충분히 몸을 풀어 놓으라는 지시야.”
“넵!”
아직 앳된 모습을 하고 있는 동양인 투수, 김병헌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글러브를 착용했다.
* * *
[김사범 선수의 홈런 이후, 아직도 3회 초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홈런 이후 카브레라 선수에게 2루타, 스튜어트 선수에게 홈런을 맞아 2점을 더 헌납한 J.A. 햅 선수, 다음 타자인 카스테야노스 선수에게도 볼넷을 내주면서 투아웃 1루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타임!”
[아, 양키스 벤치에서 누군가 걸어 나옵니다. 애런 분 감독이 직접 나오는 걸로 봐선 투수교체가 될 것 같습니다.]
[교체되는 투수는…… 아, 김병헌 선수입니다. 9월 확장 로스터에 콜업 된 김병헌 선수가 양키 스타디움에서 첫 등판을 하네요!]
[저번 주에 2경기 등판을 했지만 모두 원정이었죠? 2경기 4와 1/3이닝 무실점 4K, 볼넷 하나를 제외하고는 흠잡을 데 없는 투구를 보여 줬습니다.]
[원래 선발 투수 자원으로 분류된 만큼 이번 시즌에는 지금처럼 스윙맨으로 나서고 있죠? 스코어는 4:0입니다. 저희는 잠시 뒤에 뵙겠습니다.]
“너랑 같은 킴이네? 아는 사람이야?”
케이시가 폴리 같은 질문을 내게 던졌다.
“아니. 아는 사람은 맞는데 같은 성은 아냐.”
내 말을 듣고 있던 우리 팀 타자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공은 어때?”
“결정구는?”
“양키스에서 올릴 정도면 공이 꽤 좋은 거 같은데…… 뭐 아는 거 있어?”
김병헌에 대해 아는 거라……. 물론 나는 돌아오기 전에도, 그 후에도 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녀석이 저기 마운드에 서 있는 김병헌일 거라고 확신할 순 없다.
“포심 구속은 최고 99마일 정도, 팔 각도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아마 끝이 지저분할 가능성이 높아요. 변화구는…… 고등학교 땐 주로 커터와 체인지업을 썼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실제로 김병헌은 메이저리그 데뷔 전, 스프링캠프에서 커쇼에게 커브를 배워 한 시즌 만에 주 무기로 성장시켰다. 과거와 다른 구단에 소속된 지금, 김병헌이 어떤 공을 주 무기로 삼을진 미지수다.
그렇게 우리 팀의 덕아웃이 조금 소란스러워질 때쯤, 모두를 조용하게 만드는 소리가 들렸다.
뻐어억!
“붐?”
“네?”
“최고 구속이 99마일 정도라고 하지 않았어?”
“네…….”
“그럼 저건 뭐야?”
스튜어트가 가리킨 전광판에는 ‘102’라는 숫자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