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김사범, 2020 시즌(vs 코리 클루버)(1)
화창한 어느 봄날, 나는 습격을 받았다.
“와, 실제로 보니까 더 크시네요. 반갑습니다. MBN의 김철민 PD입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김사범입니다.”
“아직 다른 촬영팀은 합류하지 못했어요, 워낙 급하게 잡혀서. 구단 측에서도 홈경기가 아니면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아……. 네.”
“일단 제가 가져온 장비로 간단한 인터뷰 먼저 진행하겠습니다. 요즘은 개인 인터뷰 때는 간단하게라도 메이크업을 하는 편인데, 괜찮으신가요?”
“아뇨,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정신줄을 놓고 있다 보니 작가로 보이는 여성분의 화장 쿠션이 내 눈앞에까지 와 있었다. 화장 쿠션, 맞나?
“사실 이게 예전부터 에이전트를 통해서 요청했던 프로거든요, 저희 프로 보신 적 있나요? ‘나의 3일’이라는 프로그램인데.”
“제가 TV를 안 봐서요.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럴 수 있죠. 그렇게 노력을 하셔서 지금 위치까지 도달하신 거잖아요? 간단히 설명해 드리면…….”
전혀 간단하지 않은 설명이 이어졌다. 요약하자면 배우, 가수, 스포츠 스타, 정치인, 명장 등 사회 저명인사들의 3일을 밀착 취재한다는 내용인데,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포맷이다.
“갑자기 컨펌이 나고 촬영 기간이 잡혀서 조금 불안하실 수도 있는데, 걱정 마세요. 사범 선수가 프로이시듯 우리도 이쪽의 프로거든요.”
“네, 괜찮습니다. 그럼 뭐부터 하면 되죠?”
“뭘 하실 필요 없어요. 이미 카메라는 돌고 있으니까요.”
언제? 어떻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모르겠다. 포기하자. 포기하면 편해.
내 앞에 있는 4명이 뿜어내는 기이한 열기를 이해하기에는 정신도, 몸도 지쳐있다.
1승 3패, 레드삭스와의 4연전에서 얻은 성적이다. 1승도 마지막 경기에서 연장전 끝에 내 2루타로 낸 1점을 꾸역꾸역 막아서 올린 승리다.
돌아오는 길에 짐의 전화를 받고 얼마나 당황했던지. 그의 추진력에 너무 놀라서 만약 짐이 내 앞에 있었으면 들어서 디트로이트강에 던졌을 수도 있다.
“……죠, 어떠신가요?”
“네?”
“아, 메이저리그에 올라와 아주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계시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내 기분이라.
“음……. 지금 같은 상황을 보통 꿈만 같다고 하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도 지금이 꿈같은데, 뭐랄까, 꿈이면 참 아쉽고, 짜증 날 것 같은 기분?”
“어떤 의미죠?”
“꿈이든 뭐든, 제가 지금까지 한 노력은 거짓이 아니니까요. 보상받지 못하는 노력은 정말……. 아,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겠는데…….”
“비참하다?”
“비슷하지만, 좀 더 바닥을 긁는 기분이에요. 아무튼, 그래서 노력한 만큼 이뤄지는 지금이 너무 행복해요.”
스스로가 하루하루 발전한다는 기분은 늘 새롭고, 짜릿하다.
그렇지 못한 나날을 겪어 봤기 때문에.
“그렇군요. 메이저리그에 콜업 되시면서 많은 부분이 바뀌었죠?”
“뭐, 다른 선배님들이 하신 말씀하고 비슷한 거 같아요. 깨끗한 라커룸, 깨끗한 구장. 환경적인 면에서는 크게 나아졌죠.”
“그 외에는 뭔가 달라진 게 없나요?”
“경기 내적인 면에서도 달라졌죠. 메이저에서 많은 경기를 뛴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마이너 때는 로테이션에 따라 두어 경기는 날로 먹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메이저에 올라와서는 방심할 수가 없어요. 절 상대하는 모든 투수가 사냥꾼이거든요.”
“사냥꾼이요?”
“방심하면 물어뜯겨요. 그건 상대 투수들도 마찬가지지만.”
무심코 시계를 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음, 좀 더 해야 하나요? 이제 슬슬 구장에 가야 할 시간인데.”
“아뇨, 아뇨, 괜찮아요. 일단 인터뷰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나중에 또 하면 되죠. 아, 오늘 상대하는 팀이 클리블랜드? 맞나요?”
“네. 맞아요. 예전에 추신서 선수가 뛰었던 팀.”
“아, 좋네요. 제가 급하게 오느라 확인을 못 했는데, 상대 투수가 혹시…….”
“코리 클루버. 아마 맞을 거예요.”
* * *
경기 전, 코메리카 파크.
사이영.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승인 511승을 기록한 전설적인 투수. 메이저리그에선 그를 기리기 위해 매해 리그 최고의 투수에게 사이영상을 수상한다.
코리 클루버는 세계에서 가장 야구를 잘한다는 사람들이 모인 리그에서 제일 잘 던지는 상을 2번이나 수상한 선수다.
여기 내 앞에서 해바라기씨를 종류별로 박살 내고 있는 폴리와 달리.
“킴, 저 사람들 누구야?”
“모국에서 온 사람들, 나 TV에 나온다.”
피식 웃으며 대답하는 폴리
“나도 맨날 TV에 나와. 여기 있는 아무나 잡고 물어봐라, TV에 안 나오는 사람 있나.”
아, 그렇지. 나도 맨날 나오지.
“너는 맨날 나오는 게 아니지. 지고 있을 때만 나오잖아. 내가 맨날 나오는 거고.”
“아…….”
장단을 못 맞춰 주는 저급한 청중에겐 팩트로 응징을.
그렇게 울먹이며 해바라기씨를 씹는 폴리를 내버려 두고 관중석의 제작진에게 다가갔다.
“별로 재미없으시죠? 아직 본격적으로 운동하려면 시간이 좀 남아서…….”
“아뇨, 괜찮습니다. 어차피 오늘은 맛만 보는 건데요. 상대 팀에서 에이스 투수를 낼 줄 알았으면 카메라라도 좋은 걸 챙겨 오는 건데……. 급하게 알아보고 있으니까 경기 전까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하하하,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아뇨,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죠. 방금 팀 동료분하고 이야기하시던데, 혹시 내용을 알려 주실 수 있나요? 동료분 표정이 너무 웃겨서 궁금해지더라고요.”
“아, 그 친구는 제이슨 폴리라고 저랑 마이너 때부터 같이 뛰던 선수예요. 맛있는 간식 먹고 헛소리하길래 한마디 했더니 저러네요.”
“하하, 무척 사이가 좋으시네요. 어? 어어? 이쪽으로 달려오는 거 같은데요?”
“같이 달리자는 거겠죠. 잡히기 전, 아니 같이 뛰어야겠네요. 좀 이따 봬요!”
지금 잡히면 카메라 앞에서 죽는다. 확실하다.
이런저런 소동 끝에 본격적으로 경기 전 세션이 시작됐다.
저번 시리즈의 기억은 어디 갔는지 이곳저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누군가는 위닝 멘털리티가 사라진 팀이라 하겠지만 나는 지금의 분위기가 좋다.
우리 팀 같은 젊은 팀에게 필요한 건 당장의 결과가 아닌 경험과 자신감이니까. 그런 면에서 론은 참 좋은 감독이다.
“헤이 대즈, 어제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갔어? 하이라이트 보니까 마지막 공은 공하고 글러브 사이가 2m는 떨어져 있던데?”
“론, 그만 해요. 라이트에 가려져서 그런 거예요.”
“외야수들이 늘 하는 핑계지. 다른 변명이었으면 그 턱에 내 주먹이 꽂혔을 거야.”
“알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죠.”
중견수인 대즈와 론 감독이 배팅 케이지 앞에서 나누는 대화다.
론이 말한 타구는 중견수 뒤로 완전히 넘어가는 타구였다. 그걸 잡았으면 대즈 카메론이 아니라 윌리 메이슨이었겠지.
누구나 편하게 농담하고, 받아 주는 분위기. 선수들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실수가 주는 중압감을 벗고 더 나은 플레이를 위해 몸을 던진다.
“드디어 잡았다.”
얘처럼 안 받아 주는 애 빼고.
* * *
코메리카 파크.
우와아아아!
관중들이 뿜어내는 함성 사이에서 두 남녀가 이야기하고 있다
“아직이야? 근처 스튜디오에서 빌려 준다며!”
“지금 근처에 차가 너무 밀린대요!”
“아니 여긴 퀵 없어? 오토바이 같은 거 타면 되잖아!”
“여기 디트로이트예요!”
붐! 붐! 붐! 붐!
어디에선가 시작된 소리가 관중석을 뒤덮는다.
만족스럽지 않은 장비로나마 그 광경을 담는 김PD.
그런 그의 등을 누군가 톡톡 친다.
“이거 방송이에요?”
“네? 아 네. 방송 촬영 중이에요.”
“인터넷? TV? 타이거즈를 촬영하러 온 거예요?”
“킴을 촬영하러 왔어요. 등 번호 99번.”
갑자기 환호하는 남자.
“와아악! 지금 저기 있는 붐의 나라에서 온 거예요? 이거 봐요!”
남자가 등을 돌려 입고 있는 저지를 보여 준다.
SA BEOM
99
뭔가 느낌이 왔는지, 카메라를 향해 손짓하는 김PD.
“김사범 선수의 저지네요?”
“제가 첫 번째로 샀을 거예요. 판매가 열리자마자 샀거든요.”
“왜요? 사범이 맘에 들었나 봐요?”
“그럼요. 맘에 들죠. 그가 팀에 콜업 된 이후 타선이 살아났어요. 지고 있더라도 뭔가 큰일을 해 줄 수 있는 타자죠. 전성기의 미기처럼.”
“그래도 팀의 성적이…….”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메이저리그 팀은 지금처럼 리빌딩을 할 때가 있으니까. 중요한 건 팀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죠. 그런 의미에서 국제 유망주 시장에서 붐을 스카웃한 건 팀이 옳은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뜻이에요.”
“아, 사범의 케이스로 그게 증명된 거네요?”
“그렇죠. 정확해요.”
김PD는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 남자에게 건넨다.
“여기 내 명함이에요. 밑에 보면 우리 프로그램의 인터넷 사이트가 적혀 있어요. 한 2주 뒤쯤 프로그램이 방영될 거 같은데 여기서 볼 수 있을 겁니다. 인터뷰 영상을 쓰고 싶은데, 괜찮아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이름이 뭐죠?”
“잭, 잭 앨링턴.”
* * *
“플레이 볼!”
오늘의 경기가 시작됐다.
오늘 우리 팀의 선발은 뷰 버로우즈. 불펜에 더 어울리는 선수지만 팀의 사정상 선발로 뛰고 있다.
그리고 몇 년째 윈나우 모드로 달려온 지구 1등 클리블랜드의 타선은 그를 쉴 새 없이 괴롭혔다.
선두타자부터 초구에 안타를 내준 버로우즈는 제대로 된 시작도 하기 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타선도 그렇고, 투수진도 그렇고. 아직 완성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알고 있던 선수들이 터져 줘야 하는데…….’
특히 투수진 같은 경우 올해 확장 로스터 때나 콜업 되어 내년에 완성된 모습을 보일 거다.
[아, 뷰 버로우즈 선수, 연속 타자 볼넷이에요. 최악의 시작입니다.]
[아직 아웃 카운트를 하나도 올리지 못했거든요? 심지어 타석엔 호세 라미레즈 선수입니다. 절대 쉬운 타자가 아니에요.]
[2018년 30-30, 그리고 2019년에도 홈런 한 개 차이로 30-30을 놓친 호타준족의 선수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대량실점을 할 수도 있어요.]
[막아야 합니다. 디트로이트의 불펜이 클리블랜드 타선을 상대로 버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요.]
[라미레즈 선수를 상대로 초구, 던집니다]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을 통과한 직구. 하지만 오늘 버로우즈의 상태를 말해 주듯 높게 날리는 공이었다.
2구와 3구는 볼. 카운트는 2-1, 타자가 아주 좋아하는 카운트가 됐다.
[버로우즈 선수. 4구를 던집니다! 아! 내야를 넘기는! 잡았어요, 김사범 선수가 공을 잡고 바로 3루에!]
“아웃!”
[클리블랜드에서 챌린지를 요청합니다. 방금 수비 장면은 정말 김사범 선수의 장점을 모두 보여 준 수비였어요.]
[타구 각도가 조금 낮았지만, 워낙 빠른 타구였거든요? 그 타구를 점프해서 잡아낸 뒤 땅에 발을 딛자마자 3루로 송구했어요. 그야말로 피지컬이 좋은 내야수가 보여 줄 수 있는 종합 선물세트였습니다.]
[챌린지 결과가 어떻게 될지 궁금한데요. 아. 아쉽게도 3루에서는 세이프 판정이 났습니다. 느린 그림으로 보시죠.]
[아, 3루수인 헤이스 선수의 발이 조금 떨어졌네요. 아쉽습니다.]
[그래도 그런 긴박한 상황에 3루 베이스로 바로 들어갔다는 건 대단한 거죠.]
[내야진 사이에서도 ‘이건 사범이 잡을 수 있어!’라는 공감대가 무의식중에 형성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베이스 커버를 저렇게 빠르게 들어갈 수가 없어요]
아쉽다. 조금만 더 송구가 정확했으면 더블플레이가 될 수 있었는데.
그래도 티는 내지 않는다. 경기 중 감정을 내비치는 건 덕아웃에서 해도 충분하다.
날 바라보며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헤이스와, 살짝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하는 버로우즈에게 시선을 맞추며 크게 외친다.
“원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