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김사범, 2022시즌(제가(齊家))(1)
[다시 시작된 붐의 홈런 행진. 그의 한계는 어디인가?]
[반환점을 돈 시즌, 아메리칸 리그는? ‘붐’의 시대.]
[81경기 52홈런 - 68도루, 50-50? 그건 붐에게는 너무 쉬운 일.]
[현재 185홈런 - 188도루. 최소경기, 최소시즌 200-200 달성자?]
[올스타 팬 투표 결과 발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붐, 3842만 842표로 역대 1위 등극.]
[AL 올스타 팬 투표에서 4명의 1위를 배출해낸 타이거즈.]
[이삭 페레데스, ‘첫 올스타. 영광이다. 부모님이 매우 좋아하실 것.’]
[홈런-홈런-홈런-홈런, 타석에 선 그를 피하지 않을 때 벌어지는 일. NL 올스타, 12-2의 스코어로 AL 올스타에게 참패.]
[사무국, 내년부터 붐의 홈런 더비 참가 여부를 고민하고 있다고 밝혀. 팬들은 부정적인 반응.]
올스타전이 끝나고, 오랜만에 본 수리와 함께 나선 드라이브.
예전보다 많이 밝아진 도시를 배경으로, 우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시즌도 어느새 반이 지났네. 내일 또 원정이지?”
“그렇지. 탬파베이하고 4연전……. 가기 싫다.”
“듣기엔 좋은데? 많이 늘었어. 가르침 보람이 느껴지는 아주 좋은 학생이야.”
내가 연애를 안 해서 그렇지, 일단 시작만 하면 이렇게 잘 할 수 있다.
쉽잖아? 그냥 가끔 이렇게 칭찬해 주고,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그럼 되는 건데. 이걸 왜 어렵다고 하는지. 참.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기 표정만 봐도 알겠다. 음…… 그럼 내가 숙제를 하나 줄게.”
“숙제?”
“이번 원정, 7연전이지?”
“그렇지.”
“이번 원정이 끝나고, 내가 지금 아~주 원하는 물건을 가져와 줘.”
물건? 아주 원하는 거?
“그게 뭔데?”
“그건 비밀. 내가 이렇게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아무튼. 잘 고민해 봐. 만약 정답을 맞추면…… 나도 엄청난 선물을 줄게.”
“음…… 그래.”
퀴즈게임이네.
그것도 나한테 엄청 유리한.
‘이제 수리 취향 물건은 다 아는데, 너무 쉬운 거 아냐? 어?’
아, 수리가 나한테 선물을 주고 싶었나 보다.
근데 딱히 명분이 없으니 이렇게……. 어쩐지, 이렇게까진 안 하려고 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됐는데, 이제야 좀 알 거 같다.
짧은 시간, 모든 걸 눈치챈 난 수리를 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재미있겠다. 내 선물 잘 준비해 놔. 난 무조건 맞출 거 같으니까.”
“글쎄, 못 맞출걸?”
* * *
“세잎! 세잎!”
[아, 후반기 첫 경기부터 디트로이트 타이거즈가 좋지 못한 경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너무 휴식이 길었던 걸까요? 제이슨 폴리 선수가 자랑하는 체인지업이 가운데로 계속 몰리고 있네요.]
탬파베이와의 첫 경기,
내내 1루로 걸어 나가다 오늘 경기의 사실상 마지막 타석에서 겨우 홈런을 친 내 활약으로 스코어는 2:1이 됐다.
그리고…… 9회 말에 올라온 폴리는 연속 안타로 아웃카운트를 한 개도 올리지 못한 채 동점을 허용했다.
“챌린지, 다 썼나?”
“7회 1루에서 쓴 게 마지막이었지. 아깝네. 이번 건 아웃 같았는데.”
투수 코치가 마운드에 잠시 올라온 틈을 타, 이삭과 대화를 나눴다.
“페이스가 챌린지를 요청했다는 건 자신이 있었다는 거니까.”
“근데 페이스가 챌린지 횟수를 잘못 알고 있다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아?”
“분위기 때문이겠지. 뭐, 그런 실수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말을 들으며 글러브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내는 이삭.
“아무튼, 붐, 집중하자. 내가 볼 땐 폴리가 혼자서 해결하지 못할 거 같은데.”
“너나 집중해. 나보다 한 발 더 뛰어야 한다는 거 잊지 말고.”
부모님이 내게 주신 선물 중 가장 돋보이고, 자랑스러운 건 이삭보다 큰 키다.
이삭의 저런 분한 얼굴을 볼 때마다…… 늘 짜릿하고, 항상 새로우니까.
‘큭큭, 표정 보니 엄청 삐졌네. 경기 끝나고 또 달래 줘야겠어.’
연애를 시작한 후로, 사람 마음이 은근히 들여다보인다. 예전엔 왜 이걸 눈치채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아무튼, 이제 다른 잡생각을 떨쳐 내고 타석에 들어온 타자에 집중해야 할 시간이다.
‘바이달 브루한? 힘은 없는 녀석이니 조금 더 타이트하게 잡고 있어야겠네.’
2루에 있는 주자를 묶어 놓기 위해 살짝씩 페이크 모션을 취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사이 간만에 긴 사인을 주고받는 우리 배터리.
‘폴리는 웬만하면 고개를 젓는 법이 없는데…….’
살짝, 아주 아슬아슬하게 기분 나쁜 느낌이 들 때쯤.
따아악!
표정만 봐도 기분을 알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생겼다.
[바이달 브루한! 홈런입니다! 끝내기 투런포!]
[아, 제이슨 폴리 선수의 블론 세이브가……. 4월 18일 이후로 처음이네요. 1점 차의 터프한 상황이긴 했습니다만…….]
풀시즌 홈런 기록이 10개가 안 되는 타자에게 커다란 끝내기 홈런을 맞은 마무리 투수라.
오늘 저녁도 꽤 뜨거운 불판이 될 거 같다.
그렇게 경기가 끝나고.
세인트피터즈버그에 뚫어 놓은(?) 제법 괜찮은 식당에 다들 모였다.
한 명 빼고.
“폴리는?”
“생각 없대. 그냥 우리끼리 먹으라는데.”
마무리 투수가 끝내기 홈런 한 방 맞을 수도 있지, 겨우 그거 가지고…….
“웬일이래? 오늘 충격 좀 받았나 본데?”
“드디어 생각이란 걸 하게 된 거지.”
“그럼 이제 쭉 못하겠네?”
“아마도? 생각 없이 던지는 게 장점이었으니까.”
오늘따라 이삭과 케이시의 호흡이 아주 잘 맞는다.
저런 걸 보고 축구에서는 티카티카라고 하던가?
“음…… 사실 폴리 말인데.”
무표정한 얼굴로 걱정스럽게 폴리를 부르는 페이스.
“오늘 경기가 끝나고, 축 쳐져 있길래 위로를 하려 말을 걸었다.”
“좀 많이 쳐져 있긴 했지.”
괜히 미안하니까 자기가 더 오버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별말 안 했는데.
시즌 초반에 케이시 승리 날려 먹었을 때도 그랬었으니까.
“갑자기 날 보고 새로운 구종을 익혀야겠다고 하더군.”
새 구종?
“새로운 구종?”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모른다. 그냥 그 말을 하더니 공부해야겠다고 하면서 떠났으니까.”
확실하다. 뭔가 있다.
“뭔가 있네. 아니면 그렇게 멍청한 말을 할 리가 없지. 아무리 폴리여도.”
내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손을 들며 말하는 시미즈.
“저…… 사실…… 요즘 라테도 이상해요…….”
라테?
걔는 왜?
“뭐가?”
“요즘…… 두 마디 이상 말을 나눈 적이 없어요……. 이전엔 자기 말 잘 들어준다고, 최고라고 했으면서…….”
어, 그건 문제네.
라테가 하루에 두 마디 이상 하질 않는다고?
요즘 덕아웃이 조용하더니, 그거 때문이었나?
“요즘 성적이 떨어졌잖아. 저번 경기 때는 우타자인데도 플랫이 선발로 나섰고.”
“음…….”
“체력의 한계가 찾아올 때도 됐지. 여기 있는 우리가 특이한 거지, 라테가 약한 건 아냐.”
162경기. 시즌이 시작되는 3월 말~4월 초부터 10월까지 거의 매일 경기를 하는 메이저리그의 특성상 시즌의 절반쯤 온 지금 시점에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 우리가 특이한 거지.”
케이시도, 이삭도, 폴리도, 나……는 시즌 후반에 좀 힘들긴 하지만. 시미즈와 페이스야 뭐, 이미 프로 무대에서 실적을 쌓고 온 케이스니까.
“말은 좀 많아도 다듬으면 좋은 선수가 될 녀석이야. 여기서 나가떨어지기에는 좀 아쉽지.”
그 재목보다 1살이나 많은 이삭 페레데스 옹께서 말씀하셨다.
아무튼, 원래 더블A에서 뛰던 선수를 트레이드해 와서 메이저에 올린 거니까. 적응이 잘 안 됐을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단장, 생각보다 대책 없이 막 지르는 스타일이네?’
우리가 빠른 콜업에도 불구하고 좋은 활약을 보여주니까, 일종의 ‘뽕’에 취한 거겠지.
그리고 라테는 자칫 잘못하다간 그 ‘뽕’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고.
“폴리도, 라테도. 조금 더 신경 써 줘야 할 것 같다. 물론 우리는 지금도 잘 나가고 있지만, 더 잘해야 하니까.”
페이스의 말이 맞다.
82경기 61승 21패.
메이저리그에서 제일 잘난 팀이 더 잘나지기 위해선 사소한 것 하나마저도 주의 깊게 살펴보며 나아가야 하니까.
* * *
어제 밤, 폴리-라테 회담 이후, 우리는 암묵적으로 각자의 담당을 정했다.
나는…….
“폴리, 뭔 일 있어? 어제도 던지고 오늘도 던질 건데 웬 불펜피칭이야?”
폴리 담당이다.
“아, 붐. 마침 잘 왔네, 가서 타석에 서 봐.”
“뭐?”
이건 뭐야?
앞뒤 다 잘라먹고 무슨 타석에 서래?
“내가 방금 슬라이더의 끝을 본 거 같아. 크리스가 알려 준 그립인데, 내가 봐도 움직임이 무시무시해.”
불펜의 마운드 뒤에 서 있던 나를 타석으로 밀어넣는 녀석.
‘이렇게 원하는데……. 적당히 보고 죽여준다고 칭찬해 주면 되겠지.’
어차피 경기에서 던질 공을 정하는 건 거의 페이스다. 여기서 내가 좀 띄워 줬다고 컨트롤을 못할 사람은 아니니까.
“빨리 가 봐, 20개만 던진다고 했단 말야. 자, 배트는 이걸 쓰고.”
투구 폼을 찍기 위해 불펜에 가져다 놓은 카메라 거치대를 내게 들려주며 손짓하는 녀석.
그걸 들고 타석에서 타격 자세를 잡는 내 모습이 좀 웃겼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공을 기다렸다.
“너무 놀라지 마!”
그리고 시작된 폴리의 투구.
나는 습관적으로 투구 폼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패스트볼을 던질 때보다 폼이 느려.’
‘팔도 낮아졌군.’
‘공은…… 터널이 거의 없…….’
퍼억!
‘슬라이더라며……. 아…… 미친 황소새끼가…….’
폴리가 슬라이더랍시고 티 내며 던진 공은…… 정말 단 1cm도 변하지 않고 패스트볼보다 더 올곧고 반듯한 궤적을 그리며 내 옆구리를 가격했다.
“붐! 괜찮아?”
숨이 안 쉬어진다.
“왜 안 꺾였지? 분명 크리스가…… 아, 붐! 정신 차려!”
이 자식은 내가 숨이 안 쉬어지는데 옆에서 자기 공만…….
“야, 진짜야? 잠깐만, 잠깐만!”
심지어 날 놔두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숨이 안 쉬어져서, 산소가 부족해서 그런가 점점 감기는 눈.
바로 그때, 내 귓가에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부…… 크리…… 그…….”
‘나도 엄청난 선물을 준비해 놓을게.’
“슬라…… 안 꺾…… 어…….”
‘기대해도 좋아. 정말 엄청난 선물이니까.’
수리. 수리.
그리고 수리가 주는 선물.
내가 그걸 못 받고, 아니 못 보고 이렇게 갈 순…….
“이런 거 저런 거!”
순간 눈이 확 떠지며 호흡이 돌아왔다.
난,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다.
“붐! 괜찮아?”
어느새 눕혀져 있는 내 시야에 가득 들어온 크리스의 얼굴.
‘그렇게 달려가더니 데려온 게 크리스?’
“아…… 음…… 후우. 괜찮아요. 갑자기 숨이 안 쉬어져서.”
“후, 다행이군. 빨리 팀 닥터에게 가봐. 지금 시간이면 아마 출근해 있을 테니까.”
“그래야겠어요.”
반쯤 몸을 일으키자, 저쪽 구석에서 쭈뼛대며 다가오는 폴리가 보였다.
‘그래도 사람이긴 한가 보네, 저렇게 미안해하는 걸 보면.’
“미안해요.”
어쭈? 꼴같잖게 정중한 말투?
이젠 내 몸에 소름을 돋게 해 죽이려는 수작일거다.
“괜…….”
“크리스, 마지막 순간에 확 채지 못해서 크리스의 슬라이더 같은 무브먼트가 안 나왔어요. 아, 그렇게 열심히 알려 줬는데.”
“응? 으응, 일단 붐을 옮기자.”
그럼 그렇지.
한번 소대가리는 영원한 소대가리다.
아니, 소대가리도 지금 상황에서는 내게 먼저 뭔가 말을 건네는 게 맞다는 걸 알 거다.
정상적인 소대가리라면.
폴리를 응징하려 몸을 일으키고 있다 보니, 갑자기 뭔가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잠깐, 정상?’
좀 단순한 면이 있긴 해도 폴리는 꽤 정상적인 녀석이다.
애초에 그렇지 않았다면 벤치클리어링마다 미친 듯이 우우 대며 날뛰는 녀석과 친해지려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크리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다 마주친 폴리의 눈은…….
그야말로 ‘광우(狂牛)’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