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김사범, 2021시즌(기록은 영원하다)(1)
다음날 이어진 양키스와의 4차전, 꽤 험악한 분위기로 시작한 게임은 1회 초에 내 엉덩이에 공이 꽂히는 결과를 낳았고, 그 아픔을 환상적인 스윙으로 승화시킨 내 홈런에도 불구하고 1점차이의 아쉬운 패배로 끝이 났다.
2승 2패.
마지막 날 패배하고 나서 본 김병헌의 얼굴이 왜 그렇게 얄밉던지.
나중에 홈경기에서 꼭 갚아 줄 예정이다.
[타이거즈의 붐, 전반기 최다홈런 기록을 경신할 수 있을까?
- 양키스와의 4차전, 팀은 패배했지만 붐의 홈런 기록 도전은 계속됐다. 7회 투런 홈런으로 54경기에서 30개의 홈런을 기록 중인 붐은…….]
최근 홈런을 몰아친 덕분에 언론은 내 홈런 기록을 가지고 난리다.
전반기 홈런 신기록도 신기록이지만 최소경기 40홈런을 이미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기자도 있을 정도니까.
81경기 39홈런.
82경기 40홈런.
각각 전반기 최다홈런과 최소경기 40홈런 기록이다.
모두 2001년 배리 본즈가 세웠던 기록.
‘도대체 2001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두 기록 중, 내가 신경 쓰고 있는 건 최소경기 40홈런이다. 어차피 전반기 홈런 기록은 따라오는 거니까.
“아직 많이 남았지?”
“많이 남았지. 우리 비행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
갑자기 몰려오는 지루함에 옆자리의 케이시에게 남은 시간을 물어봤지만, 돌아온 건 아주 정확하게 사실을 꼬집어 주는 케이시의 대답이다.
‘페이스와 좀 친해지더니 변했어. 어떻게 사람이 변하니?’
괜히 어릴 때 본 광고 카피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태블릿으로 시선을 돌렸다.
[2001년 본즈와 2021년 붐, 심층분석.]
[약물로 이루어진 기록이 언급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리그를 압도했던 타자와 압도하고 있는 타자를 비교한다.]
하나 더, 내 홈런 기록을 가지고 난리 치는 만큼, 그 전 기록 보유자인 본즈와의 비교도 심심찮게 이뤄지고 있다.
[본즈, 붐의 홈런 행진에 입을 열다.-단독]
이 양반, 마이너에서 기록을 세웠을 땐 별 반응 없더니, 이젠 좀 반응을 하네?
[-……활약을 이어 가고 있는 붐에 대한 코멘터리를 부탁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불멸의 기록에 도전했던 선수들은 아주 많다. 가장 최근엔 크리스 데이비스가 있었지. 하지만 그게 어떻게 됐지? 후반기에 상대 투수들의 집중 견제를 받고 무너져 내렸다. 그가 그랬듯, 붐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낼 거다.”
“그가 선수 생활을 10년 이상 하고, 모든 걸 알게 될 때쯤엔 나와 비교하는 것을 허락하겠지만, 아직 2년 차인 애송이와 비교당하는 건 자존심이 상한다.”]
‘이 양반도 참 대단하네.’
그도 나도 일종의 치트를 가지고 있다. 물론 종류는 다르지만.
그런데 그런 치트를 쓰고도 어떻게 저렇게 당당하지? 약물이 없었다면, 그가 저런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을까?
그와 나의 차이점은 나는 현대의학 그리고 과학으로 절대 설명 불가능한 것이라는 거고, 본즈는 밝혀졌다는 거다.
이런 내 특별함 때문에 다른 선수들에게 미안하거나, 가책을 느끼지는 않지만, 적어도 저 사람처럼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을 비난하진 않을 거다. 절대로.
그게 내 선수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이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니, 잠이나 자야겠다.’
꽤 인정받는 신문사에서 난 기사이니만큼, 아마 곧 반응이 오겠지.
얼마나 지났을까.
“모두 일어나서 퇴근을 준비하자고!”
스튜어트의 쾌활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디트로이트에 거의 다 왔는지, 좌석 위의 안전벨트등이 켜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비행기에서 내려 핸드폰을 켜자마자 미친 듯이 진동하는 핸드폰.
-아버지
거 봐, 벌써 반응이 오잖아.
[사범아, 잘 지냈냐?]
“네 아빠, 잘 지내셨어요?”
[잘 지냈다. 방금 전에 기사가 뜨기 전까진.]
“무슨 기사요?”
한국 기자들의 재빠른 손놀림이 빛을 발한 거 같다.
[그 약쟁이 새끼가 저주를 퍼부었다며?]
“아, 봤어요. 별로 신경 안 써요.”
[내가 그 녀석 선수 시절을 지켜봐서 아는데, 아주 인성이 글러먹은 놈이야. 신경 쓰지 말고 너의 길을 가면 된다.]
박사장님의 팬이셨던 아버지는 본즈를 아주 싫어하신다. 왜 그런 진 모르겠지만.
[그리고…….]
“네, 말씀하세요.”
[아빠로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난 네가 그 녀석의 기록을 넘어서 줬으면 좋겠다. 부담이 갈 테지만…… 솔직한 마음이야.]
“알겠어요. 저도 그럴 생각이에요.”
[그래, 알겠다. 부담 줘서 미안하고. 알지? 내가 왜 이러는지?]
“음…… 어릴 때부터 항상 그러셨으니까…….”
[그래. 몸 상태는 괜찮고?]
“아주 좋아요.”
[엄마하고 하별이에게 연락 좀 해라. 요즘 전화가 뜸하다고 섭섭해해.]
“아, 바로 할게요. 네.”
내 생각엔, 아버지가 본즈에게 뭔가 돈을 빌려줬거나 사기를 당하신 게 분명하다. 아니면 이런 반응이 나올 리가…… 아, 어머니.
- Let's get it boom! boom! boom!
아이고 여사님, 아무리 아들이 좋아도 50이 넘으신 분이 컬러링을 이렇게 화끈한 음악으로 해 놓으시다니…….
[여보세요?]
“엄마, 저예요.”
[전 김사범이란 사람 모르는데요?]
큰일 났다. 이 정도면 두 달은 넘게 가는데…….
“엄마 아들, 엄마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아 똑똑한 머리로 메이저리그를 폭파하고 있는 김사범 모르세요?”
[아, 그 김사범? 알지.]
휴.
“전화 자주 못 드려서 죄송해요. 아빠하고 같이 계세요?”
[아니, 니 아빠는 요새 나랑 놀아 주지도 않는다.]
“왜요?”
[왜긴, 니 자랑할 데가 많아서 그러지. 질리지도 않나 봐. 전화도 자주 안 하는 나쁜 아들인데, 그치?]
“아하하하…….”
[내가 하도 이상해서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뭘 그걸 곰곰이 생각까지 하세요?”
우리 어머니. 아주아주 촉이 좋으신 분이다.
내가 왜 전화를 안했는지 분명 알고 계실 거다.
[너 여자 생겼지?]
“네…… 네?”
[평소에 이틀이 멀다하고 전화하던 아들이 전화를 자주 안 한다는 건, 거의 백 퍼센트 확률로 여자가 생겼다는 거지.]
“어…….”
[나는 외국인에 대한 편견 없다 그냥 너 좋아하고, 착하면 돼.]
“음…….”
[나중에 시간 나면 데려와라. 한국 구경시켜 주게. 나는 외국인 처자가 한복 입은 게 그렇게 이쁘더라.]
“네…… 물어볼게요…….”
그렇게 어머니의 촉에 탈탈탈 털린 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엄마는 대단하다. 모든 걸 다 아시지.’
나이 서른이 넘도록 난 아직 어머니의 손바닥 안이다.
그렇게 전화가 끝나고,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내게 주어진 호실로 발을 옮기고 있을 때, 또 다른 연락이 왔다.
우우응.
짐? 이 늦은 시간에 웬 메시지?
[그 멍청이를 놀리는 인터뷰 안 할래요? 아주 극렬한 ‘안티 본즈’ 기자들로만 회장을 가득 채워 줄 수 있는데.]
이 양반이.
[안 해요.]
[왜요?]
[어차피 그 기록은 내 기록이 될 텐데, 신경 쓸 필요 있어요?]
[하하하, 역시 사범답네요. 푹 쉬어요 :)]
이런저런 일들로 가득한 하루가 지나고, 드디어 호실에 도착한 나는 내일을 위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샤워는 하고 자야 하는데…….’
‘내일 경기가…… 팀 트라웃…… 아니 에인절스…….’
* * *
다음 날. 애너하임에 온 나는 트라웃과 오타니를 만날 수 있었다.
“요즘 핫하던데? 디트로이트 시에서 아주 유명해졌겠어.”
“아…… 뭐, 야구를 보는 사람들은 다 알지 않을까요? 근데 뭐, 디트로이트는 하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서…….”
“아직 모르고 있나 보네? 팀에서 안 알려 줬나?”
“네?”
“하하핫, 아직 모르고 있나 봐.”
트라웃이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타이거즈에서 제일 잘나가는 선수긴 하지만 뭐, 아주 유명하진 않을 텐데. 애초에 야구가 늙다리들이 좋아하는 스포츠라는 인식이 박힌 동네인데.
“나중에 원정 끝나고 가서 봐요. 나도 SNS에서 우연히 본 건데……. 아, 그러고 보니 그거 사범의 계정이었는데?”
옆에 있던 오타니가 뭔가 힌트를 던져 줬다.
“궁금하면 확인해 보고, 근데 그냥 직접 가서 보는 게 나을걸? 나라면 그러겠어.”
트라웃의 말을 끝으로, 우린 의례적인 파이팅을 나눈 뒤 각자의 덕아웃으로 헤어졌다.
‘짐이 뭔가를 한 거야. 분명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엔 ‘섹시스타 사범’이 내게 준 정신적 데미지가 너무 컸다.
뚜르르르.
[사범?]
“또 뭐 했어요?”
[그게 무슨…… 아, 그건가? 근데 그건 팀 차원에서 요청한 거라 제 선에서 처리한 건데요?]
“이상한 거 아니죠?”
[‘섹시사범’ 사건처럼요? 아니에요. 오히려 대단한 거죠.]
“지금 알면 경기에 지장이 있을 거 같아요?”
[그건 아닌데……. 그냥 3일 뒤에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게 좋을걸요?]
“아까 트라웃도 그런 소리를 하던데, 일단 뭐, 이상한 게 아니라니 됐네요. 알겠어요.”
[우리 사이의 신뢰가 바닥을…….]
말이 길어질 것 같길래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이제 경기에 집중해야지.
* * *
“아웃!”
심판의 아웃 콜에 덕아웃으로 들어와 폴리를 잡고 투덜대기 시작했다.
“아, 진짜 너무 안 맞는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해? 내가 분석 좀 해줘?”
“그냥 듣고만 있어. 아니 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배팅은 사이클이 있다. 그게 없다면 난 벌써 100홈런을 기록했을 테니까.
요즘 좀 잘 맞는다 했더니 슬슬 다시 배트에 안 맞기 시작하고 있다.
내가 아무리 다른 타자들보다 홈런을 생산하는데 유리하다고 해도 그건 어느 정도 배트에 잘 맞았을 때의 이야기지, 지금처럼 안 맞으면 의미가 없다.
‘배럴드 볼은 바라지도 않아, 적어도 공이 땅바닥으로 처박히지만 않으면 좋겠네.’
한참을 폴리를 잡고 투덜대고 있으니 미기가 내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냥 힘 빼고 쳐, 의식하면 더 안 맞아.”
“후, 알겠어요.”
이젠 내가 아니라도 제법 강력한 타선이니까. 그냥 맘을 놓고 있……기는 개뿔.
그게 안 된다!
하나라도 더 안타를 치고 싶다.
더 세게, 더 정확히, 더 빠른 타구로 저 담장을 넘기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매 타석마다.
게임이 진행되고, 트라웃의 홈런과 오타니의 홈런으로 선취점을 올린 에인절스의 뒤를 우리가 따라가고 있는 형국이다.
“나이스 배팅! 닉!”
5번으로 출장하고 있는 닉의 적시타. 우리 팀 답지 않게 홈런은 아직 없지만, 점수는 동점이 됐다.
그리고 마침내 8회가 되서야 나는 가까스로 좋은 타구를 날릴 수 있었다.
4타수 1안타 1홈런 1타점.
경기 결과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홈런이었지만, 그래도 기분 전환을 할 정도는 됐으니까.
5:3, 우리는 승리했다.
* * *
다음 날.
오타니가 라인업에서 빠졌다.
‘무슨 일…… 아, 내일 투수로 나오는 날이구나.’
어제 마지막 타석에서 홈런을 때린 게 기분전환이 됐는지, 1회 초부터 기분 좋게 홈런을 날릴 수 있었다.
‘이제 32홈런, 앞으로 8개.’
점점 쌓여 가는 기록을 보며 흐뭇하던 것도 잠시, 내게 불운이 닥쳐왔다.
“크흡!”
트라웃의 도루 시도를 막기 위해 베이스 커버를 들어가는 것까진 좋았다.
스파이크와 루 사이에 종아리가 끼기 전까진.
[아, 김사범 선수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대 좌타자용 시프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삭 페레데스 선수가 아닌 김사범 선수가 베이스 커버를 들어온 것 같은데, 스텝이 조금 엉켰던 것 같네요.]
[화면으로 봐선…… 피가 나고 있는데요. 큰 부상이 아니길 빌겠습니다.]
아픔이 가시고 상처 부위를 보니 다행히 뻐가 다치거나 한 거 같진 않다.
꽤 길쭉한 상처가 생기긴 했지만.
“바로 교체하겠네.”
팀 닥터와 같이 나온 론을 막고 싶었지만, 그럴 새도 없이 난 팀 닥터의 부축을 받아 그라운드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 이 정도 다친 건 괜찮은데…….’
론의 강권에 교체되자마자 간 병원에서 검사 결과, 다행히 꿰맬 필요까지도 없는 가벼운 찰과상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스파이크에 찢어진 거라 파상풍 주사를 피할 순 없었지만.
“으흡!”
창피해서 티를 내진 않았지만, 다쳤을 당시보다 주사를 맞는 순간이 더 아팠다.
[키브라이언 헤이스, 공을 쳤습니다. 트라웃이 앞으로 나와서 잡아냅니다]
[에인절스가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면서 3:2로 승리했습니다. 타이거즈 입장에서는 1회 붐의 교체가 아쉬웠던 경기였습니다.]
숙소로 사용하는 호텔로 돌아가는 길, 팀의 패배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붐, 괜찮아?”
“어, 그냥 가벼운 찰과상.”
뭘 하고 있었는지 몰라도, 로비에 있던 이삭에게 괜찮다는 말을 하고 론의 방으로 향했다.
“붐, 왔나? 이야기는 들었네. 그래도 내일은 일단 벤치에서 시작하지.”
“네? 전 괜찮은데요.”
“내가 괜찮지 않아. 아직 전반기도 마치지 못한 상태인데, 쓸데없이 상처를 키우고 싶진 않네.”
론이 평소와 다른 강한 태도로 내게 말했다.
“네…….”
“걱정 말게, 경기 후반, 힘이 필요할 땐 언제든 타석에 나갈 수 있을 테니. 나도 붐의 상태가 어떤지 정도는 잘 알고 있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내 의견을 고집할 순 없지.
“물론,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