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김사범, 2022시즌(치국(治國))(1)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이며, 야구에서의 기록은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수치화시키고, 그 순위를 매겨 한 선수의 가치를 측량하는 데 사용된다.
한 시즌에 162경기, 한 경기에 보통 4타석. 정말 간단하게 계산해 보면 전 경기를 출장하는 팀 내 주전 선수의 경우 648타석 정도를 소화한다는 뜻이며-포지션마다, 주로 출장하는 타순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이는 세이버메트리션이라 불리는 통계학 덕후들이 한 사람을 숫자로 분석해 내기에 충분한 숫자다.
선수로서의 가치가 곧 돈이 되는 프로스포츠 시장에서 그 가치를 결정한다는 건 꽤 중요한 일이며,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판단을 내보이는데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특히. 요즘처럼 모두의 예상대로 다들 들어맞을 시기에는.
[타이거즈, 김사범을 스카우트한 담당자를 단장 자리에 앉혀야 한다.
- ‘재미없는’ 메이저리그, ‘지루한’ 경기.
불과 3, 4년 전만 해도 젊은 사람들이 인터넷상에서 습관처럼 내뱉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올 시즌, 타이거즈의 경기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바로 폭탄을 몰고 다니는 한 선수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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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잔인하게도 경기당 0.6개가 넘는 공을 담장 밖으로 넘기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경기당 0.8번의 도루를 기록하며 상대방을 ‘불태우고’ 있다.
아주 간단하게, ‘낭만주의’적인 스탯만 이야기해도 115경기, 66홈런-88도루, 아쉽게도 타율은 4할 미만으로 떨어졌지만 3할 9푼대를 유지하며 언제든지 그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 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으며, 이미 타점은 142개를 기록하며 자신의 커리어 하이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물론 다른 타격 지표도 마찬가지지만!).
최근 몸쪽으로 날아온 공에 옆구리 부상을 입어 15일 DL에 등재된 붐의 복귀가 예정된 내일, 미네소타 트윈즈와의 경기에서 최연소 200-200을 달성할…….]
“제기랄! 뭐? 200-200?”
미네소타 트윈스의 젊은 감독, 로코 발델리가 보고 있던 스마트폰의 화면을 끄며 괜히 짜증을 냈다.
2019년, 그가 선임되면서 프런트와 함께 그린 그림은 이게 아니었다.
‘부족한 투수들이 메이저 레디가 되는 해인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달려야 했는데…….’
로코 발델리가 생각하기엔 분명 계획대로 잘 나가고 있었다. 2019년까지는.
비록 마지막에 힘이 부쳐 와일드카드 승부에서 떨어지고 말았지만, 많은 유망주를 메이저리그에 올려 시험해 본 결과 꽤 단단한 마운드를 구축하는 데도 성공했었다.
‘이 빌어먹을 놈만 아니었다면…….’
하지만, 2020시즌이 시작되자마자 그가 꾸던 영광된 미래는 모래성처럼 부서져 갔다.
여전히 단단한 투수진의 인디언스, 그리고 갑자기 튀어나온 몇몇 유망주가 그야말로 ‘미친’ 활약을 보여 준 타이거즈. 그 두 팀에게 가로막혀 전혀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 자신의 팀.
곧 인디언스는 떨어져 나갔지만, 이번엔 어느새 리빌딩의 끝이 다가온 화이트삭스가 지구 2위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이번 시즌이 지나면 계약도 끝난다. 여기서 승부를 걸어야 해.’
타깃 필드, 감독실의 불은 밤늦게까지 꺼지지 않았다.
* * *
“오늘은 4번으로 나설 거야. 괜찮은가?”
“네, 물론이죠.”
내가 없는 동안 이삭과 라테가 1-2번을 맡아 아주 좋은 활약을 펼쳐줬다. 덕분에 3번과 4번을 친 라미레즈와 프레디 프리먼은 신나게 타점을 쓸어 담았고.
사실, 나도 3번보단 4번이 좀 더 편하다.
조금 올드한 생각일 수도 있긴 한데…… 그냥, 멋있잖아. 4번 타자.
그렇게 론과의 짧은 면담이 끝나고, 라커룸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워-우! 붐! 이젠 괜찮은 건-가?”
“물론이죠, 클리어. 쌩쌩해요. 사실 일주일 전부터 쭉.”
“다행-이군!”
사실, DL에 등재될 만큼 큰 부상은 아니었다.
뼈에는 이상이 없었고, 옆구리 쪽 근육이 조금 다쳤을 뿐이니까.
하지만 팀은 역사상 최고 규모의 계약을 맺은 스타플레이어를 불안정한 상황에서 뛰게 하고 싶지 않았고 -내가 빠진다고 당장 위험한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시즌 후반에 살짝 퍼지는 패턴을 또 보여 주기 싫었던 내 의지와 합쳐져 나는 2주간 푹 쉬게 된 거다.
‘저번처럼 내구가 오를 줄 알았는데, 이 정도로는 안 되는 건가?’
물론, 쉬고 싶다는 이유 하나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푹 쉬면서 알게 모르게 쌓인 피로도 확 풀었고, 수리와 함께 텍사스에 가서 필, 아니 장인어른을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살이 좀 올랐나? 맨날 웃고 다니다가 부상을 당하더니, 절박함이 사라진 거 아냐?”
“우리 정도 됐으면 이제 절박함보단 더 나은 감정으로 야구를 해야지, 꼬마야.”
살이 오르긴, 하루에 만 칼로리 이상 안 먹으면 유지할 수도 없는 몸인데.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지 계속 투덜대며 시비를 거는 이삭을 ‘꼬마’란 단어 하나로 물리치고, 천천히 장비를 꺼내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떠오르는 의문 하나.
“야, 이삭.”
“왜? 멀대.”
“멀대라기엔 좀 근육…… 아니다. 폴리는 어디 갔어? 원래 지금쯤이면 와서 멍청한 소리를 해야 할 타이밍인데?”
“폴리? 몰라. 어제부터 느낌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달고 살던데. 어디 처박혀서 예언자 놀이나 하고 있겠지.”
흐음.
복귀 경기에 참 불안한 징조일세.
* * *
경기가 시작되고 나서야 난 내가 느낀 불안감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퍼억!
“볼!”
[브루스다 그라테롤, 김사범 선수의 몸쪽 깊숙한 곳으로 초구를 던졌습니다.]
[97마일의 투심 패스트볼을 몸쪽으로 과감하게 붙였습니다. 김사범 선수도 깜짝 놀라 급하게 몸을 피했어요.]
[이번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선발로 던지기 시작한 선수인데요, 음…… 과하게 공격적인 성향을 가졌죠?]
[베네수엘라 출신의 선수인데, 게임에만 들어가면 아주 공격적으로 변하기로 유명하죠. 방금 보신 것처럼 공 끝이 좋은, 최대 구속 100마일까지 나오는 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가 주 무기입니다.]
오랜만에 경기에 나섰기 때문에 첫 타석은 버리더라도 조금 오래 공을 지켜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나오면 내가 또 가만있을 순 없지.
[1회, 이삭 페레데스-라테 헤미체-호세 라미레즈 선수를 삼진으로 잡았던 그 공 말씀이시죠?]
[네, 맞습니다. 디트로이트 선수들도 분명 슬라이더가 올 거라고 알고 있었을 거예요,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슬라이더를 던지는 확률이 70%가 넘는 투수니까요. 그렇지만 한 명도 맞춰 내지 못했습니다.]
[김사범 선수가 좋은 타구를 보여 주기 위해선 그 슬라이더가 나오기 전에 타격을 하는 게 중요하겠군요.]
[하하, 맞습니다.]
“쉬익!”
마치 복서의 호흡 같은 기합과 함께,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내 몸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또?’
만약 이게 조금 전과 같은 투심 패스트볼이라면, 크게 피하지 않는 이상 몸에 맞을 거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또다시 몸쪽 투심 패스트볼을?’
조금 민망하지만, 나 정도의 타자를 세워 놓고 두 개의 공을 연속으로 비슷한 코스로 던진다는 건…… 자살행위지.
내 직감은 지금 여기서 몸을 피할 필요가 없다고 외치고 있다.
펑!
“볼!”
역시나, 마치 사이드암 투수의 슬라이더처럼 엄청난 횡 변화를 보이며 존으로 향하는 공.
그나마도 너무 깊어서 그런지 볼이 선언됐다.
“이런 패턴은 너무 많이 봐서 익숙한데, 다른 건 없어?”
타격 자세를 다시 잡으며 포수에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리고…….
[아, 김사범 선수! 외야 펜스를 향해 배트를 쭉 뻗습니다!]
[이건…… 예고 홈런인가요?]
[하하하, 두 개 연속으로 들어온 몸쪽 공에 김사범 선수가 많이 화가 났나 보네요.]
[그럴 만도 하죠, 부상자 명단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도발의 효과는 굉장했다!
이제 마운드 위의 투수는 거의 날 죽일 것처럼 바라보고 있다.
[브루스다 그라테롤 투수, 빠르게 다음 투구를 준비합니다.]
체인지업은 실투가 잦고, 커브는 영 시원찮다. 그렇다면 남은 건 투심과 슬라이더인데. 슬라이더가 90마일 가까이 나오다 보니 보고 치기엔 좀 까다롭다.
내가 배트로 가리킨 곳은 좌측 담장.
이 배터리가 순진하다면, 지금 내가 몸쪽 공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그러라고 배터박스 뒤로 조금 물러났고, 스탠스도 스퀘어에서 오픈 스탠스로 바꿨으니까.
‘머리에 잔뜩 열이 올랐으니 볼을 던지진 않겠지, 자존심도 꽤 있어 보이니까.’
바깥쪽, 존에 들어온다 싶으면 달아나는 슬라이더, 나간다 싶으면 투심.
왼발은 토탭과 레그킥 중간 정도까지, 내딛는 위치는 자연스럽게 살짝 안쪽으로.
그리고 바로 이어진 힙-턴, 배트는 끝의 끝까지 내지 않았다.
‘왔다. 슬라이더.’
고양이과의 맹수들이 숨기고 있던 발톱을 꺼내듯, 끝까지 숨겨 놨던 배트를 손목 힘을 이용해 강하게 휘둘렀다.
빠아아악!
이주 만에 느끼는 손맛.
내가 이 맛에 다시 야구를 하는 거지.
[김사범 선수! 브루스닫 그라테롤 선수의 변화구를 받아쳤습니다!]
[볼 것도 없네요. 넘어갔어요. 복귀 첫날부터 자신의 67호 홈런을 때려내는 김사범 선수입니다.]
[오늘 경기를 제외하면 시즌이 31경기가 남았는데……. 지금 페이스라면 본인이 세운 메이저리그 신기록 76개를 이번 시즌에 또다시 깰 수도 있겠네요.]
[타이거즈가 가지고 있는 시즌 최다승 기록도 경신될 수 있습니다. 오늘 경기에서 이긴다면 105승 26패, 지난 시즌 후반기의 뒷심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구 우승까지의 매직 넘버도 2게임으로 줄일 수 있죠.]
[김사범 선수가 2회 초에 쏘아 올린 한 개의 홈런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지, 끝까지 지켜봐 주십시오.]
- Let's get it, Boom! Boom! Boom!
오랜만에 들어보는 오리지널 붐-송이다.
홈구장이 아닌 원정구장이라는 게 조금 아쉽지만 뭐, 그래도 응원 소리가 들린다는 게 어디겠어?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베이스를 돌다 보니 어디선가 아주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와, 전투력 장난 아닌데? 한 방 맞고도 저런 눈빛이라고?’
마운드에서 굳이 몸을 돌려가며 나를 바라보는 투수, 이름이…… 브루스 그라테롤. 그래, 저 정도면 내가 기억해 줄 만하지.
‘저 정도면 다음에 또 만나도 피하지 않고 이 악물고 덤벼 오겠네. 공짜 쿠폰이 하나 더 생겼어.’
그런데 이상하다.
방금 전까진 저 녀석 하나만 날 노려보는 줄 알았는데…… 왜 한 명이 더 있는 것 같지?
* * *
미네소타 트윈스의 덕아웃.
“이봐, 필슨.”
“네, 감독님.”
“저 덩치만 큰 빌어먹을 자식이 다음 타석에서 또 똑같은 짓을 하면, 머리로 공을 던지라고 해.”
“네?”
미네소타의 투수 코치이자 수석 코치인 필슨 보네라는 너무나 어이없는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반문했다.
“못 들었나? 다시 한 번 말해 주지. 저. 녀석. 머리에. 공을. 던지라고.”
웃고 넘기기에는 너무나 진지한 그의 보스, 로코 발델리의 표정을 보며 필슨 보네라는 생각했다.
‘이 자식도 이제 끝이군. 시즌엔 어느 구단에 가야 하지? 제길, 이 커리어로 수석 코치직을 맡긴 어려울 테고. 후우.’
“대답 안 하나?”
“네? 아, 네. 알겠습니다.”
필슨 보네라는 이성을 잃은 로코 발델리에게 적당히 대꾸해 주며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한 경기에서 두 번이나 그러겠어? 그리고, 막상 그 상황이 되면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있을 거면서 왜 저렇게 성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