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패했다?”
“네… 네 개의 전선 모두 패했습니다.”
보고를 들은 사마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병사를 바라보았다.
이게 몇날 며칠을 달려온 자신에게 할 소린가.
제나르 흑마탑에 도착한 사마르는 국경을 하루거리에 앞두고 뜻밖의 소식을 접하고 말았다.
그것은 사라센의 패배.
압도적인 승리를 예상했건만, 결과는 정반대로 돌아왔다.
어째서 진 것일까.
아케른 말고는 막을 방법이 없었을 텐데.
이번 사라센 원정은 아케른을 묶어 둔 채 나머지 국경을 모조리 함락시키는 작전이었다.
심지어 선전포고조차 없던 기습이 아니었던가.
“아케른에서 지원 병력이 나왔던 모양입니다.”
“그러면 아케른은?”
“보호 마법을 뚫지 못하고 퇴각했습니다.”
거듭되는 병사의 설명에 사마르의 표정은 더욱 험하게 일그러졌다.
“지원을 나갔다면 더욱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저희도 그게 의문입니다.”
아케른의 병력으론 주위의 모든 성을 다 지켜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불가능하도록 마법 부대를 계산하여 배치시켰다.
지원을 나오는 순간 모두가 공멸하도록.
하지만 아케른의 마법사들은 모든 성을 향해 지원을 나갔고, 남아 있는 인원으로 보호막을 유지했다.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결과에 사마르는 두통을 느끼며 의자를 찾았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병력이 있었던 것일까.
그럴 리 없다.
아케른 성의 병력들은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충분히 파악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전쟁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시작과 동시에 보호 마법을 부수며 모든 전선을 승리로 장식했어야 했다.
“적의 기사 중에 7성급 이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케른에 7성급 이상이 있었다?”
“네. 그 외에 6성급 이상으로 느껴지는 놈들 또한 몇 명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케른 성에는 확인되지 않은 존재들이 있었다.
지원을 나갔음에도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았던 마법 부대와 정체불명의 고위급 기사.
그냥 7성도 아니고, 7성급 이상으로 추정된다는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불현 듯 떠오르는 초조함에 사마르는 속 입술을 깨물며 방안을 서성였다.
사라센 제국의 네자르 황제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시작부터 꼬인 전쟁의 방향을 무슨 수를 써서든 돌려야 했다.
“쯧…….”
깊어 가는 고민에 사마르는 쓰게 혀를 찼다.
28년 전 브라함에서 그랬듯, 황제란 족속과 자신은 애초에 악연일지도 모르겠다.
또 이런 식으로 흘러가니 말이다.
“알함브라와 수비드, 그리고 바빌리안 흑마탑에 서신을 넣어라.”
“뭐라고 할까요.”
“각성에 들어갈 마석 삽입량과 제어 한계를 확장시키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사마르는 병사에게 새로운 명을 내렸다.
강화 인간 시술에 변화를 주란 얘기였다.
보다 강한 자극을 주어 각성을 서두르게 하는 것.
“괜찮겠습니까? 자칫하다간 안정화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신경 쓸 것 없다.”
염려를 전하는 부하의 말을 사마르는 단번에 일축했다.
어차피 싸움에 지면 모든 것이 날아갈 터. 사마르는 이기기 위한 방법부터 찾기 시작했다.
“그냥 내가 나서면 될 것 같은데.”
결국 지켜보던 바스코가 입을 열었다.
통칭 38호라 불려왔던 남자.
“당연히 나서야지. 하지만 자네의 몸은 하나가 아닌가. 홀로 점령하기엔 브라함이 꽤 넓은 땅이라네.”
그에 사마르는 한숨을 내쉬며 바스코의 말에 대답했다.
놈이 원하는 게 뭔지 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스코가 원하는 건 그저 질퍽한 살육일 뿐.
전장에 풀어놓는 순간부터, 놈에 대한 통제는 물 건너갈 터였다.
결국 풀어줘야 할 때가 오겠지만, 그때는 결정적인 순간이어야 하지 않겠나.
“기왕 물어뜯을 거면 탐스런 놈을 골라 먹자는 얘길세.”
“탐스런 놈이라… 그렇지. 잘근잘근 물어뜯고 싶은 놈이 있긴 하지.”
“조금만 기다리게. 곧 만나게 될 테니까.”
끓어오르는 바스코를 달래며 사마르는 연구실로 향했다.
* * *
어둠은 더욱 깊어 이제 늦은 밤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케른의 연병장은 여전히 분주했으니.
“출정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적의 흑마탑을 점거하기 위한 빅터와 나의 부대가 출정을 앞둔 탓이었다.
“몸조심하세요.”
“네 몸이나 신경 써라.”
“이거 봐… 사람이 걱정을 해 줘도 타박이네. 나이 먹고 괴팍하면 보기 흉하거든요?”
“네놈만큼 이상하겠냐.”
“나만큼만 됐으면 벌써 손주를 봤겠죠. 스승님이 노총각인 건 다 이유가 있다니까요.”
“닥쳐라.”
늘 그랬듯 빅터와 나는 물고 물리는 말싸움으로 서로의 무운을 빌었다.
“아무튼, 필승.”
“죽지 마라.”
이렇게 말이다.
각자의 부대로 향한 빅터와 나는 몇 가지 상황을 확인한 뒤 성문으로 향했다.
출정의 시작은 빅터의 부대였다.
야음을 틈타 국경을 넘은 뒤에는 적당한 곳을 찾아 밤을 보낼 것이다.
이후론 목적지를 향해 각자도생.
10명씩 나눠진 부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출정을 진행했고, 어느덧 성문 앞엔 나와 반투족 3인, 그리고 테오와 겨울이 남아 있었다.
길이 아닌 길을 달려야 할 인원이었다.
우리들이 타고 있는 건 백색의 거대한 늑대와 붉은 멧돼지인 탓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 차례다.”
여전히 푸륵거리는 멧돼지 위에서 술은 때가 되었음을 알려 왔다.
“달릴 수 있겠어?”
“문제없다.”
아니, 내가 말한 건 멧돼지를 말하는 것이다.
연습한다고 올라탄 붉은 멧돼지는 술을 태운 채 성벽을 들이받으며 난리를 피웠었다.
그것을 어떻게 진압했겠나?
― 건방진 놈!
녀석의 등에 매달린 술은 삼겹살을 발라 버리겠다며 악착같이 버텨 냈다.
급기야 주먹이 오가는 난타전까지 벌어진 후에야, 멧돼지는 술에게 고개를 숙였다.
결국 매가 약이었다.
형제의 고난을 목격한 탓이었을까.
남아 있던 붉은 멧돼지들은 순순히 주인에게 등을 내주었다.
유달리 거친 모습을 보이더라니, 술이 길들였던 태풍이란 놈이 녀석들의 맏형이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이 기묘한 조합은 완성되었고.
아우우우우우우―
꾸웨에에엑!
괴상한 외침과 함께 우리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 * *
가장 마지막으로 출발한 우리의 행렬은 사라센의 국경 도시인 시에라를 지나 수드라의 곁을 지나고 있었다.
이대로 북쪽을 향해 달리면 목적지인 알함브라가 나온다.
예상되는 시간은 대략 6일.
하지만 우리는 5일 안으로 도착할 생각이었다.
이 전쟁의 승패는 이제 시간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사라센에선 손실된 강화 인간의 숫자를 회복하려 할 것이고, 브라함은 그 이전에 전쟁을 끝낼 생각이다.
브라함이 이긴 건 실력이 전부는 아니었으니까.
사실 이번 기습을 막아 낼 수 있었던 건 몇 가지 운이 크게 작용했던 탓이었다.
그 하나는 에르텔이란 기물이었고, 다음은 그것을 들고 온 나와 반투족이었다.
그 두 가지 대운이 브라함의 손을 잡아 주었을 때, 사라센은 전방위 공격이라는 악수를 두고 말았다.
최선의 방법이 최악의 결과로 돌아온 상황.
하지만 사라센의 계획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그들이 몰랐던 것은 에르텔과 나의 존재 여부였을 뿐. 그것이 아니었다면 아케른의 지원은 애초에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케른을 제외한 나머지 국경은 허무하게 무너졌을 터.
모든 국경을 전선으로 만들어 서로 간의 지원을 차단한 건 사라센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반전을 이뤄 냈고, 이제 같은 행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문제의 시작점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야 말로 브라함의 승리를 굳힐 수 있는 최선의 한 수였다.
‘최대한 빠르게 가야 한다.’
어둠을 달리는 나의 마음에 조급함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험로에 들어서자 녀석들은 진면목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어억?!”
물 만난 고기란 이런 건가.
길이 아닌 곳을 달리는 펜리르는 오히려 신나 보였다.
즐긴다고 해야 하나.
위태로운 바위와 계곡을 타 넘는 펜리르의 모습은 녀석의 태생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그것은 풍 형제들도 마찬가지.
펜리르의 뒤를 따르는 멧돼지들 역시 날렵한 움직임으로 험로를 누볐다.
저 모습을 보고 누가 돼지를 떠올리겠나.
아직 성체가 아니었음에도 녀석들의 체격과 힘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따라서 행군 시간은 엄청나게 단축되고 있었다.
“와, 벌써 수드라의 끝자락이네.”
길은 험하지만 빙 돌아가지 않고 주파했기 때문이었다.
이 속도로 달리면 4일 안에 도착할지도.
생각지 못한 이들의 질주에 우리의 여정은 예정에 없던 쾌감에 빠져들었다.
“으으으윽!”
이렇게 말이다.
가파른 내리막을 내달릴 때면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안장 손잡이를 거칠게 움켜잡았다.
“꺄핫핫!”
착지 후에 찾아오는 이 통쾌한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저릿한 순간이 지나자 겨울은 소리를 빽빽 지르며 즐거움을 드러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
아니, 거친 바위산을 달리고 있는 우리 모두는 본분을 망각한 채 시원한 질주에 온몸을 맡겼다.
그렇게 첫날이 지나가고, 둘째 날도 지나 늦은 밤이 되었을 땐, 알함브라와 하루 반 거리인 모하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날았다’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
도시 외곽의 인적 없는 곳을 찾아 밤을 보낼 자리를 마련했다.
그렇게 마주 앉은 우리는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 대화에 접어들었다.
오늘의 주제는 나의 검술… 아니, 둔기술에 대한 의문이었다.
“빅터 할아버지는 땅이 뒤집히고 멀리 떨어진 바위도 부신다잖아요.”
“응. 그 영감님이 칼을 좀 무식하게 쓰지.”
“말을 들어 보니까 보통 7성급이 되면 빅터 할아버지처럼 된다던데, 아저씨가 쓰는 건 한 번도 못 봐서요.”
요점은 이거다.
빅터처럼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건지, 아니면 못 하는 건지.
하지만 이것에 대한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할 수 없어.”
“왜요?”
“오러가 없거든.”
대지를 가르고 원거리에 있는 물체를 베는 건 힘이 아닌 오러 때문인 까닭이다.
안타깝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
“아직까진 그래.”
미묘한 여운을 남기며 겨울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건 무슨 뜻이에요? 오러가 없어서 안 된다면서요.”
“응, 오러는 없지. 하지만 다른 거라면 준비 중이니까.”
말을 마친 나는 눈앞에 떠 있는 글자에 시선을 맞췄다.
[시스템 재설정 99%…….]
투기와 마나를 합친 새로운 기운은 탄생까지 이제 1%를 남겨 두고 있었다.
“다른 거라면 그대의 스승이 말했던 기운을 말하는 건가? 부모님이 사용하셨다는 걸 들은 것 같네만.”
“거기서 한번 더 바뀌는 거지.”
흥미를 보이는 별의 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머지않아 현실로 다가올 미지의 힘.
솔직히 기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에게 있었다는 그만큼만, 오러와 비슷한 무언가라도 된다면 부족해도 좋으니 상관없을 것 같았다.
뭐가 됐건 지금보단 나을 테니까.
“여기서 더 강해진다면 정말 볼 만하겠군.”
주억거리는 별의 말처럼 조금 더 나아지길 바랄뿐이었다.
그럴 거라 믿고 있었는데.
[시스템 재설정 완료.]
[변경된 설정 적용 중…….]
막상 때가 다가오자 감춰 둔 기대감이 미친 듯이 솟아올랐다.
큰 걸 바라지 않기는 개뿔.
꿀꺽…….
떠오른 문자를 바라보던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터져 주기를!
본색을 드러낸 솔직한 나의 마음은 오러와 투기를 뛰어넘는 미증유의 힘을 간절하게 바라고 원했다.
마침내 재설정 과정이 종료되었고.
[활성 에너지 마나와 비활성 에너지 투기를 융합하여 원기로 통합하였습니다.]
원기라는 이름의 기운이 나의 몸을 휘돌기 시작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