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대수림을 나온 우리는 가짜 시작의 마을을 지나 세비앙을 향해 가고 있었다.
추억을 걷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기억을 떠올린다는 건 시간을 거스르는 느낌이었다.
내가 지나쳐 온 길을 되돌아가며.
…이곳에서 그런 일이 있었지.
…여기에선 저런 일도 있었고.
묻어 두었던 추억을 꺼내 현실에 투영시키는 작업이었다.
이젠 돌아갈 수 없으니까.
그때의 기억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나의 마음을 두드렸다.
…는 개뿔!
“말 대신 마차를 끌었었죠!”
“네?”
“진짜예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나는 믿지 못하는 에스카에게 기구한 사연을 풀어놨다.
이족 보행 몬스터로 살아왔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 어라? 저건 무슨 짐승이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마차를 끌던 나를 보며 사람들은 신기한 표정을 지어 댔다.
심지어 그들은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에 더 크게 놀라곤 했으니.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진짜…….”
그날의 굴욕과 치욕을 견딘 나는 이토록 훌륭한 남자가 되어 고향 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여 나는 때 묻지 않은 어린 영혼에게 나의 위대한 서사를 들려주었다.
“고고한 아케른의 별 빅터 크로제의 제자이자, 아리안의 자작이며, 자유도시 리베의 용병왕 이반 님이라고요?”
무조건 외워서 앵무새처럼 떠들라고.
“오, 똑똑한데?”
의아한 표정을 짓는 스노우에게 나는 빅터에게 배운 주입식 교육을 그대로 써먹었다.
“무슨 자기소개가 이렇게 길어요?”
“귀족의 예법이라는 거지. 이 몸은 이제 평범하지가 않거든.”
빅터가 내게 주입시켰던 ‘1,000명에 홀로 대적한 검의 달인, 고고한 아케른의 별이자 헤모니아의 야수 카르간을 쓰러뜨린 저의 스승, 빅터 크로제입니다’와 같은 맥락이다.
나는 귀족이니까.
품위에 걸맞은 소개 정도는 당연히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저것은 처음 구상한 내용을 열심히 갈고 다듬어 낸 따끈따끈한 최종본이다.
“아케른에 가면 저 얘길 입이 마르도록 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미리 준비해 둬.”
“그걸 왜 제가 해요?”
“응? 그럼 누가해.”
“그걸 저에게 물으시면…….”
“이건 기회야. 이럴 때 줄 잘 서야 나중에 출세하는 거라니까?”
갸우뚱하던 스노우는 고개를 돌려 별을 바라보았다.
“언니도 저런 소개 있어요?”
“나는 없다. 저런 말장난은 세속인들이나 하는 것이다.”
“말장난이라니! 이건 엄연한 귀족의 예법이라고, 귀족. 어? 귀이족!”
하지만 별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고.
“쯧쯧…….”
빅터는 혀를 차며 내 곁을 지나갔다.
“쳇.”
질투에 가득 찬 저 뒷모습이라니.
나는 턱 끝을 치켜들며 빅터의 곁을 나란히 걸었다.
이제 우리는 같은 귀족이니까.
“고고한 아케른의 별 빅터 크로제의 제자이자, 아리안의 자작이며, 자유도시 리베의 용병왕 이반에게 하실 말씀은 없나요.”
“닥쳐라.”
그렇게 이상한 모습으로 걷던 나는 마음의 고향인 세비앙에 도착하였다.
* * *
그리웠던 촌구석 영지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성문을 지키던 경비대도 그대로였고, 나만 보면 환장하던 녀석들도 그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아아, 이반이다아!”
“오우거가 돌아와따!”
나를 발견한 꼬맹이들은 우르르 달려와 발작하듯 격한 반응을 보였다.
붙잡고 매달릴 수 있는 모든 곳에 달라붙어서는.
“보고 싶었어, 이반!”
“나두! 나는 엄마랑 같이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기다렸어!”
묻지도 않은 엄마의 소식을 친절하게 전해 주기 시작했다.
“이반이 가고 우리 엄마는 술이 엄청 늘었대!”
“우와! 우리 집이랑 똑같네?!”
그래 이거지.
이래야 세비앙이지.
정신없는 꼬마들의 환대를 받으며 그제야 나는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게 어디 꼬맹이들뿐이었을까.
“이야, 이거 누군지 몰라보겠는 걸?”
마주치는 사람마다 놀라며 반기니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후배님, 대장장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이런 내가 신기한 듯 베르는 계속해서 나의 전직을 확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뒤로는 꼬마들이 난리를 치고 있고, 양옆으로 늘어선 건물 창에선 홍조 띈 아낙네들의 손인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마주하는 남자들의 악수와 포옹이 이어지니.
성문을 통과한 이후로 우리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었다.
“황제가 와도 이 정도 반응은 아니겠는데.”
제국의 상징보다 더 큰 관심을 받던 나는 한참을 시달린 끝에야 대장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익숙한 대장간의 모습.
“아니, 갑자기 어쩐 일이냐?”
때마침 문을 나서던 데릭은 마주한 나를 보며 주름진 눈을 크게 키웠다.
“잘 지냈어요?”
“나야 별일 없이 잘 있었다만… 네 녀석은 신수가 아주 훤해졌구나.”
“크흠… 저야 뭐.”
나는 스노우를 바라보며 턱짓을 했다.
내 입으로 떠벌리기는 남사스러우니까.
“아… 여기가 고고한 아케른의 별 빅터 크로제의 제자이자, 아리안의 자작이며, 자유도시 리베의 용병왕이신 이반 님의 고향이군요.”
눈치 빠른 스노우는 맛깔나게 나의 소개를 읊어 댔다.
그에 데릭의 입이 크게 벌어졌고.
“…야 이 나쁜 녀석아! 이 어린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게야!”
데릭은 뭉툭한 손을 내밀어 나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완벽하게 망친 첫 번째 자기 소개.
“하긴 뭘 해요.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요.”
때와 장소를 봐 가면서 쓰자는 교훈을 안은 채 나는 그리움 가득한 대장간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오래간만에 들어선 대장간은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였다.
매캐한 용광로 냄새나 떫은 쇠 냄새도 마찬가지.
내가 사용하던 망치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여전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데 무슨 바람이 불어 예까지 온 거냐.”
“스승님의 영지인 아케른으로 가는 중이에요.”
방문한 까닭을 묻는 데릭의 말에 답하며 아직 전하지 못한 소식을 떠올렸다.
“그리고 얘기하셨던 그분 만났어요.”
나를 이곳에 맡기고 떠났던 남자.
“누구를 말하는 거냐?”
“아이작이라는 분이요.”
“오, 용케 찾았구나. 여전히 카슈타르에 있었던 모양이구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셨는데, 이런저런 도움을 받다보니 찾게 됐네요.”
나는 랑방에서 있던 일을 알려 주며 두 사람의 관계를 물어봤다.
“아이작 아저씨가 마을 후배였다면서요?”
“그랬지. 아이작이 10대 초반이었을 때 내가 마을을 떠났었다.”
돌아온 대답은 아이작의 말과 크게 다를 것 없었다.
사실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고.
내가 궁금한 건 두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였다.
“그러면 저의 어머니도 알고 계시겠네요?”
아이작의 고향 선배라면 어머니와 동향이라는 얘기니까.
“너의 어머니? 글쎄다. 누구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데릭은 내가 누구의 자식이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어린 나를 맡아서 묵묵히 키워 왔을 뿐.
“같은 고향 사람인 미리암이에요.”
“허허… 미리암이 너의 어미였단 말이냐?”
사실을 알게 된 데릭은 놀란 눈으로 나에게 반문했다.
“어쩐지 네 녀석 얼굴이 낯설지 않더라니…….”
그러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보상도 없었을 텐데도 데릭은 그 긴 세월동안 영문도 모른 채 나를 키워 왔던 것이다.
“…….”
나는 품안에 손을 넣어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데릭의 손 위에 말없이 올려놨다.
“이게 뭐냐.”
“…보답이요. 지금 말고 나중에 열어 봐요.”
주머니에 들어 있는 건 반짝거리는 금화 20개였다.
이걸로 그 수고로움에 대한 보상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요.”
나는 데릭의 손을 붙잡은 채 옅은 미소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싱거운 녀석.”
역시나 데릭은 투박한 표정으로 모른 척 지나치려 했다.
그런 사람이다.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아 오해받기 좋은 사람…….
하지만 그 누구보다 깊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한동안 아케른에 있을 테니 가끔씩 들릴게요. 도움 필요한 일 생기면 연락 주시고요.”
“일 없다.”
퉁명스레 답한 데릭을 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로 향했다.
하지만 나는.
‘뭐지?’
뒤통수를 찌르는 기묘한 감각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었다.
이 느낌은 분명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찝찝하고 불쾌한 감각이었다.
“왜 그러는 거냐?”
영문을 모르는 데릭은 의뭉스런 얼굴로 나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무엇이었을까.
다른 시선이 있을 리 없는 이곳에서 나는 낯선 기척을 느꼈다.
“흠…….”
뚜렷한 증거를 찾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대장간 입구로 향했다.
순간 싸늘한 냉기가 나의 몸을 스치며 지나갔고.
‘뭐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러나 수상한 느낌은 거짓말처럼 흔적을 지우며 자취를 감췄다.
모든 것이 사라진 평범한 상황.
“왜 그러는 게야?”
채근하는 데릭의 성화와 함께 의심은 거기에서 멈춰야 했다.
그저 나의 착각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이만 가 볼게요.”
마지막 인사를 마친 나는 일행들과 합류하여 아케른으로 향했다.
* * *
브라함 남부에 위치한 오지의 마을.
오가는 인적조차 드믄 이 마을 한편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 한 채가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다.
속칭 쓰레기장이라고 불리는 곳.
로이드는 이곳에 수준 이하의 능력자들을 따로 모아 관리했다.
하잘 것 없는 능력이라 써먹을 곳은 없으나 존재 자체로는 의미가 있으니까.
이곳에 모인 폐급 소환자들은 비루한 자신의 능력을 탓하며 죽지 못해 사는 삶을 힘겹게 이어 가고 있었다.
하나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적어도 에비오라는 남자에게는 이곳을 벗어날 희망이라는 것이 생겼다.
“차, 찾았습니다!”
골방에 처박혀 있던 에비오는 소리를 지르며 관리자에게 달려갔다.
“찾았습니다! 리와 카이 형제를 죽였던 그놈을 찾았습니다!”
“그게 사실이야?!”
“틀림없습니다. 방금 확인했습니다!”
그에 관리자는 허겁지겁 로이드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비오의 얼굴이 흥분과 기대로 상기되어갔다.
이 쓰레기장을 벗어나는 것도 이젠 시간문제니까.
찾아온 기회를 잡은 자신을 자축하며 에비오는 두 눈을 번뜩였다.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설마 이대로 다시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요?!”
“글쎄? 내 생각엔 추적 임무를 맡기실 것 같은데. 어차피 너 말고는 대안이 없는 상황이니까.”
돌아온 관리자의 말에 에비오는 주먹을 쥐며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이곳을 벗어난다.
영문도 모른 채 소환된 지 어언 1년.
능력을 확인한 낯선 이들은 에비오를 끌고 와 이곳에 감금시켰다.
그리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자신이 있는 곳이 쓰레기장이었다는 것을.
‘빌어먹을…….’
그렇게 에비오는 우리에 갇힌 돼지처럼 덧없는 하루를 보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강제 노동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죽이거나, 쫓아내지도 않았다.
그저 하릴없이 먹고 자는 것뿐.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놈들은 빵 한 덩이와 맹물로 모진 생명을 이어 가게 했다.
하지만 그 짓거리도 이젠 끝이 보인다.
“잘해 봐. 로이드 님은 능력 있는 사람에겐 엄청 후하시거든.”
이제 나는 이곳을 나갈 테니까.
개 같은 시간을 보상받을 수만 있다면 뭘 해도 상관없는 에비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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