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번슈타인에 도착한 나는 적의 최후방으로 진격해 마법 부대를 유린했다.
방식은 이전과 똑같았고, 결과 역시 다르지 않았다.
강화 인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우왕좌왕하며 기병의 창칼에 허망하게 쓰러졌다.
최후방의 이변을 확인한 적들의 대응 또한 같았다.
대략 1천에 이르는 적의 기병이 우리의 뒤를 쫓았고, 놈들을 이끌어 지나왔던 늪지대로 도주했다.
달릴 곳이 마땅치 않은 진창이 가득한 곳.
마른땅을 찾아 달리던 나는 결국 부대를 멈춰 세웠다.
갈 곳이 없었다.
놈들은 막다른 길에 다다른 우릴 보며 추격에 박차를 가했다.
200대 1,000의 불리한 상황.
달려오는 놈들을 보며 나는 미소와 함께 수신호를 전달했다.
때를 같이해 섬광이 번쩍였고.
파지지직!
뒤를 따르던 1천의 적 기병은 화염 쓰나미에 사라졌다.
이후의 전쟁 상황은 카렌과 비슷한 방식으로 흘러갔다.
번슈타인으로 보낸 마법사들은 성내의 마법사들과 합세한 뒤 광역 마법으로 역습을 시작했다.
결과는 대학살.
마법 부대가 전멸한 사라센의 병사들은 보호 마법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날아오는 마법에 직격 당했다.
멀뚱히 서서 죽음을 기다리는 형세였으니, 전쟁의 흐름은 카렌과 동일했다.
하지만 놈들의 피해는 더욱 컸다.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수준.
카렌에서 돌아온 테오가 마법의 조준점을 변경한 탓이었다.
적들이 도망칠 방향을 내다보며 예측 시전을 했고, 발동 시간과 맞물린 놈들의 이동은 완벽하게 마법의 범위로 향했다.
살고자 했던 그들의 의지는 스스로 죽을 곳을 찾아간 셈이었다.
이어진 백병전의 향방이야 말해 뭐 하겠는가.
대형을 잃은 적의 병력은 닭장 속의 닭처럼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곳 역시 강화 인간은 있었으니까.
놈들의 인원이 많았던 만큼, 아군의 피해 역시 만만치 않았다.
카렌의 경험을 살린 테오는 강화 인간 부대를 먼저 섬멸하려했다.
하지만 놈들의 위치는 최전방이 아니었다.
덕분에 놈들의 대다수가 마법의 포화를 피해 나갔고, 백병전을 통해 위력을 드러냈다.
추정되는 아군의 피해만 대략 2,500명 이상.
허둥대던 적의 병사들이 강화 인간들과 합세해 반격에 나선 탓이었다.
전멸에 가까운 대승이었음에도 웃지 못했던 건 이 때문이었다.
120명이 조금 넘는 강화 인간 부대의 가공할 위력.
소수 정예라는 말이 이보다 어울릴 순 없었다.
장담하지만.
나와 반투족, 그리고 테오의 지원이 없었다면 피해의 규모는 두 배 이상 늘었을 것이다.
아니, 고작 120명의 강화 인간에게 보병단이 전멸당하는 끔찍한 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천인장이란 호칭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말 그대로 1만의 병력 중에 10명뿐인 게 천인장이고, 놈들은 동일한 무력을 가진 사람을 120명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그들과 상대할 수 있는 병력은 겨우 10명.
나머지 110명의 강화 인간은 토끼 사냥을 하듯 일반 병사들을 도륙 냈을 것이다.
[번슈타인 대승.
아군의 피해 규모 2,500∼3,000명.
사라센군 궤멸.
지원 병력은 아케른으로 이동.]
전장을 승리로 이끈 나는 베르에게 메신저를 전달하고 아케른으로 향했다.
작전은 동일했다.
켄드릭의 기병까지 합류해 적의 후방을 타격하려 했으나 의미 없는 계획이 되고 말았다.
“퇴각일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적들의 퇴각이 이미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차분한 켄드릭의 대답에 나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추격할 생각입니까?”
전쟁을 시작할 것인지 말이다.
“아니요. 의미 있는 결과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에 켄드릭은 관망을 선택했다.
적의 마법 부대가 본진 중앙에 합류한 탓이었다.
단단하게 구성된 보호막과 빈틈없는 대형.
마법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면, 오히려 반격당할 확률이 더욱 큰 상황이었다.
“일단 성으로 복귀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여 우리는 아케른 성으로 되돌아갔다.
* * *
“카리프 님,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사라센과 브라함이 결국 한판 붙어 버린 모양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하르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숨넘어가듯 소리쳤다.
그에 카리프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패었고.
“아, 제가 노크를 깜박했군요.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문밖으로 나간 자하르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들어오며 전쟁의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라센이 당연히 이겼어야 하는데, 브라함의 초동 대처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모든 전선에서 승리했다더군요.”
말이야 덤덤히 전하지만 사실 내용은 놀랄 만한 얘기였다.
사라센의 전력을 보았을 때 브라함의 패배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 전쟁은 기습이 아니던가.
아케른을 제외한 나머지 성들은 사라센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
한데 모든 전선에서 승리를 거뒀다니.
소식을 접한 자하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었다.
그리고 그는 쾌재를 불렀다.
복수의 기회가 찾아왔으니까.
“사라센 피해가 상당했다고 하니, 브라함은 역공을 시도할 것 같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겠지.”
이후 전망을 묻는 자하르의 말에 카리프는 간단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당연한 수순이 아니겠나.
시간을 지체할수록 브라함의 역공 기회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역시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그렇다면 이참에 참전하십시오.”
하지만 자하르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내딛었다.
“숟가락을 올리는 거죠. 브라함이 남서쪽으로 올라올 때 우리는 북서쪽으로 내려가는 겁니다.”
타인의 기회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는 얘기였다.
솔깃할 수밖에 없는 제안.
“병력은?”
의미를 파악한 카리프의 대답은 망설임 없이 본론으로 이어졌다.
“마론 후작이 만들어 준 병력이 있잖습니까.”
“그들과의 계약은?”
“어렵게 생각할 게 뭐 있습니까. 파기하면 됩니다.”
그에 카리프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하르를 바라보았다.
어느 때 보면 천재 같고, 또 이럴 때 보면 생각 없는 놈처럼 보인다.
계약을 파기하라니.
마론 후작을 도와 아리안을 점령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사라센에 복수하는 게 이들의 계획이었다.
한데 여기서 배신을 하면 남은 계획은 어쩌자는 말인가.
“굳이 시간 써 가며 힘들게 갈 이유가 없잖습니까. 아리안보다 더 큰 놈들이 우리 편이 됐는데 말이죠. 적의 적은 곧 아군인 법. 이참에 갈아타서 확실하게 사라센을 점령하는 겁니다.”
그러나 자하르는 이번에도 역시 예리하게 틈새를 파고들었다.
예전의 카리프라면 비겁하다며 일축했을 터.
하나 배신으로 얼룩진 그의 삶은, 명분과 의리가 얼마나 덧없는지 잘 알고 있었다.
“노이 녀석과 놈의 부하들이 이미 강화 작업을 했잖습니까. 반크스에게 투서 한 장만 보내면 알아서 처단해 주겠지요. 아마 득달같이 달려들어 마론 가문을 해치울 겁니다. 더군다나 역모의 정황이 있으니, 최소 삼족은 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뒤탈 없이 계약은 깔끔하게 파기되는 겁니다. 사실 번거롭게 그럴 필요도 없지만요. 그냥 잠적해도 되지만 혹시 모를 귀찮음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놈의 가문을 없애려는 것뿐입니다.”
지금 자하르는 가장 빠른 길을 카리프에게 제시하고 있었다.
명예와 도리 따위가 아닌 실리.
“재미있겠군.”
“잘 생각하셨습니다.”
돌아앉은 카리프를 향해 자하르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 * *
복귀한 아케른의 상황은 복잡했다.
비록 무력 충돌은 없었지만, 이후의 전개에 대한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 탓이었다.
반격이야 당연한 것이고.
문제는 본래 목적인 흑마탑 무력화와 본격적인 사라센 정벌 중에 무엇을 선택할지였다.
사안의 중요함이 평행을 이루는 바.
반나절이 넘도록 이어진 긴 회의는 잠시 휴식을 맞이했다.
그렇게 머리를 식힌 것도 잠시.
“마지막 보고서를 취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벌써 두 배로 늘었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시작된 회의는 양측의 주장이 맞서며 팽팽하게 이어졌다.
“제국군이 도착한 뒤에 점령을 시도하면 이동 시간만 몇 배로 늘어날 것입니다. 주요 흑마탑이 모두 6일 이상 거리에 있으니 거의 한 달은 돼야 도착하겠군요. 그사이 적의 흑마탑은 놀고 있을까요?”
첨예하게 대립하는 의견은 이것이었다.
점령을 시도하는 성에 강화 인간이 있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네 번의 전투를 통해 학습된 경험은 그들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니 주력부대가 자리를 이탈하면 안 됩니다. 100명을 상대하는 데 사망자가 1∼2천이 넘게 나오는 걸 보셨잖습니까. 백작님이나 이반 공이 없었다면, 피해는 몇 배로 늘어났을 것입니다.”
요점은 사라센에 남아 있는 강화 인간의 숫자가 얼마인가.
침입한 병력이 전부라면 추가될 인원을 막는 게 우선일 것이고, 감춰 둔 병력이 있다면 대항하는 게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적 병력의 충원은 점점 더 늘어나겠죠. 점령이 늦는 건 상관없지만, 흑마탑에 시간을 주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은 흑마탑을 무력화시키기로 결정 났다.
그러나 목표는 처음 세 곳이 아닌 수비드와 알함브라.
아케른과 가까운 제나르는 공격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제국군 합류 후 공성 마법전의 승리와 혹시 모를 강화 인간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따라서 아케른에 잔류하는 사람은 클레어 한 사람뿐.
빅터와 나는 본래의 목적지를 향해 오늘 밤 출발하기로 결론을 내었다.
하지만 몇 가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대량의 적을 마주했을 때의 해법… 남아 있는 마법구가 두 개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전하는 의미는 꽤나 깊고 무거웠다.
애초에 이 작전의 전제는 기습과 매복인 탓이다.
흑마탑을 기습해 기능을 마비시키고, 적 군대를 유인해 큰 타격을 주는 것.
이것을 위해선 마법구의 존재가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남은 것은 두 개뿐이니, 작전의 방향도 수정이 필요했다.
“이대로는 대규모 병력을 만났을 때 힘들어집니다.”
“그렇다고 출정 인원을 늘려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죠. 기백 명이 추가 돼봐야 어차피 군대를 상대할 순 없습니다.”
부관들의 논의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차라리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는 건 어떨까.
누군가 비슷한 의견을 내놨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성을 함락시키며 이동하지 않는 이상, 병참이 끊어지며 고립되기 때문이다.
하여 내려진 최종 결론은 작전의 축소.
빅터와 나의 목표는 흑마법사를 전멸시켜 흑마탑의 기능을 완전히 정지시키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그 대신 인근 군부대에 있을 강화 인간은 포기, 최대한 빠르게 습격하고 퇴각하는 것으로 임무를 변경하였다.
마법구는 각 한 개씩 나눠 소지하였고, 병력의 구성을 조금 더 늘렸다.
이제 남은 건 오늘 밤에 있을 출격뿐.
회의를 마친 나와 반투족은 마구간에 모여 붉은 멧돼지를 감상하고 있었다.
“호오… 그 며칠 사이에 부쩍 자랐네?”
마구간에 있는 돼지를 보며 나는 신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큰소리로 장담했던 술의 얘기처럼 녀석들의 크기와 모양은 며칠 전에 보았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벌써 이 정도라면 며칠 안에 탑승도 가능할 것 같다.”
술은 뿌듯해하며 새로운 탈것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원정에 소요되는 시간이 최소 12일이니, 오가는 동안 성장할 수 있을 거란 추측이었다.
무시하기도 그런 것이.
붉은 멧돼지의 크기는 이미 당나귀만큼 크게 자라 있었다.
성장 기간이 대폭 짧은 몬스터의 특징이랄까.
이대로라면 알함브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탑승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훈련이 돼야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술의 눈은 이미 빛나기 시작했고.
“좋아. 오늘부터 특훈이다.”
녀석은 안장을 뜯어 녀석들 크기에 맞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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