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이놈 몰라 보게 강해졌구나!”
해머를 휘두르는 나를 보며 빅터는 감탄을 연발했다.
콰직! 콰각! 콰앙!
그도 그럴 것이, 빅터의 기억 속에 남은 나의 마지막은 암석 골렘과 사투하던 풋내기에 불과했다.
숙련도는 고작 1,000을 넘어설 때였고, 비교 대상은 5성이었다.
그러니 빅터의 입장에선 동명이인처럼 느껴질 터.
콰앙―
쩌저적!
“그새 또 늘었네…….”
최근까지 함께했던 에스카마저 놀란 눈을 하며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것이냐?”
빅터는 말도 안 되는 나의 성장에 흥분을 넘어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당연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이름만 같을 뿐.
7성과 칼을 맞댄 나의 무위는 에스카의 실력도 이미 넘어섰다.
숙련도는 말해 무엇 할까.
평균 수치가 3,500을 넘어섰으니, 골렘을 두들기던 그때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겉모습까지.
누더기를 걸치고 다니던 잘생긴 노숙자는 멋들어진 경갑을 착용한 벽화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지만…….
좌우지간 거칠 것 없이 성장하며 약점마저 극복했다.
이제 나의 해머는 자를 수 없고, 오러가 없는 불편함 따위 더 이상 문제되지 않았다.
“허허… 이 녀석.”
나를 향한 빅터의 감탄은 그칠 줄 몰랐다.
부아아악―
이렇게 빠르고.
콰콰콰쾅!
이렇게 강렬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목마르다.
숙련도 한계 수치 1만에 이제 겨우 3,500. 절반도 못 왔지만 그래서 더욱 기쁘다.
성장할 가능성이 저렇게 많이 남았으니까.
“술은 에스카를 지원하고 별과 부족장은 전방으로 넓게 산개!”
대형을 지정한 뒤 그대로 농성에 들어갔다.
작전은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뿐.
힐끔거리는 빅터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눈앞의 적에만 집중했다.
묻고 싶은 말이야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나중에.’
지금은 아니었다.
행여 원치 않는 얘기라도 나온다면 그땐 답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 지나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지난한 싸움의 흔적은 이곳의 지형마저도 바꿔 놓았다.
평지와 고랑이 높낮이를 바꾸었고, 마수의 사체는 작은 언덕을 이루며 켜켜이 쌓여 갔다.
뜨거운 한낮의 햇볕을 지나 황금빛에 물드는 오후.
“꽃이 피었어요!”
놀라움에 가득 찬 로제의 외침이 길고 긴 싸움의 끝을 알리며 낭랑히 울려 퍼졌다.
* * *
마른나무에 빛이 맴돌며 백광의 꽃이 피어났다.
나무 주위로 시작된 광휘의 파동은, 조금씩 범위를 넓히며 빛의 결계를 만들어 냈다.
그 범위가 10보에 이르렀을 때.
“여긴 어디로 이어지는 거죠?”
거대한 밑동 앞으로 좁은 토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이 좋아 토굴이지 그냥 구멍이었다.
계단?
그런 거 없다.
야생의 향기가 가득한 이 수직 토굴은 벽면을 타고 이어진 나무뿌리가 유일한 이동 경로였다.
심지어 깊기는 또 얼마나 깊은지,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서는 가늠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저 나무뿌리 아래가 성력의 제단이다. 이곳에 있는 결계는 머지않아 사라질 테니 서둘러야 모두 내려갈 수 있을 게다.”
말을 마친 빅터는 토굴 입구로 다가가 마력 등을 꺼냈다.
짧은 가죽 끈을 동여매 목에 걸고는…….
“먼저 내려가마.”
그대로 몸을 날려 수직 토굴 아래로 사라졌다.
뒤를 이어 에스카가 준비를 하고 있었고, 베르와 반투족은 다음 순서를 기다리며 짐을 챙겼다.
모두가 부산하던 그때.
꼭 끌어안은 두 여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로제는 사색이 되어 바들거렸고, 도로시는 사색인 사람을 다독이며 같이 사색이 되어갔다.
신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두 사람은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자력으로 뛰어내리는 것은 불가능할 터.
차비를 마친 술을 불러 도로시를 부탁했다.
“내가?”
“응, 그나마 네가 도로시하고 친분이 있잖아.”
그에 술은 흔쾌히 수락하며 도로시에게 다가갔다.
나름 식사 준비를 하며 호흡을 맞춰 왔던 사이였다.
친하다고는 못 해도 의지할 만큼의 교류는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이제 남은 사람은 로제.
곁에 있던 별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와 로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말없이 자릴 옮겨 하강할 준비를 했다.
“흠…….”
시간이 없다던 빅터의 말은 사실이었다.
투명한 빛의 결계는 벌써부터 일렁이기 시작했고, 경계 너머의 마수들은 침을 뚝뚝 흘리며 다가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서두르자.”
재촉하는 나의 말에 부족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습을 감췄다.
이어질 순서는 별.
위태로운 결계를 바라보며 나는 초초하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런 나의 마음이 전해졌을까.
준비를 마친 별은 지체 없이 하강을 시작했다.
그 다음은 술과 도로시였다.
쌍도끼를 허리에 찬 술은 도로시를 업고 구멍 앞에 다가섰다.
지금 뛰어야 한다.
동시에 하강할 순 없으니 더 늦기 전에 출발해야 한다.
하지만 술은 내려가지 못했다.
필사적으로 매달린 도로시 때문에 녀석은 불편한 자세를 고치며 이리저리 고개를 뽑아내고 있었다.
사정은 딱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제 결계는 찢어지기 직전이니까.
“그냥 뛰어!”
내지른 고함과 동시에 술의 몸이 수직 토굴로 빨려 들어갔다.
남은 시간은 대략 10초.
그 정도 틈은 줘야 밑바닥에서 충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건 형편 좋을 때나 하는 얘기고!
“꽉 잡아요!”
완전히 벌어진 결계를 보며 나는 무저갱 같은 구멍에 몸을 날렸다.
들이닥친 마수의 앞발이 나의 머리 위로 지나갔고.
캬아아아악!
토굴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세상과 우리를 단절시켰다.
* * *
한참을 내려온 끝에 나는 바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우리의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하지만 나는…….
“흐으윽…….”
여전히 울고 있는 로제를 달래며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아직 매달린 모습 그대로니까.
심지어 로제는 등이 아닌 앞으로 매달려 있었다.
‘미치겠네.’
흐느끼는 로제의 숨결이 목 주변을 스치며 흩어졌다.
생소한 감각에 곤두서는 머리칼.
후각을 자극하는 화려한 향수의 내음은 로제의 체취와 섞이며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조용히 밀어내려 했었지만.
‘…….’
그대로 서서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울고 있는 로제의 모습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떨던 가녀린 모습.
귀족의 영애가 견디기엔 하강의 공포는 쉽지 않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가씨…….”
정신을 추스른 도로시가 로제의 등을 어루만졌다.
마치 어린 소녀의 등을 도닥이듯, 도로시는 천천히 보듬으며 로제의 감정을 진정시켰다.
“아우…….”
정신을 차린 로제가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났다.
채 들지 못하는 머리와 꼼지락거리는 두 손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부끄러움.
또는 민망함.
뭐 그런 비슷한 감정일 거라 생각했다.
“잘 견뎠어요.”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로제의 모험을 격려했다.
하지만 괜한 짓이었나 보다.
“하아…….”
바라보던 로제의 입에서 깊은 탄성을 흘러나왔으니.
“저 미소… 박제해 버리고 싶다.”
로제는 살벌한 말을 뱉으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누구?
“아가씨…….”
낌새를 알아챈 도로시가 조용히 로제의 팔짱을 끼었다.
성력의 재단은 멀지 않았다.
좁은 통로를 지나자 너른 공동이 나왔고, 그 한가운데에 재단이 있었다.
‘음…….’
사실 재단이라기엔 좀 허술했다.
그냥 큰 돌 두 개 위에 길쭉한 돌을 올린 모양이니까.
대충 살펴본 우리는 각자 원하는 곳을 찾아 적당히 자릴 잡았다.
그리고 나는 빅터의 곁으로 다가가 대충 주저앉았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때.
“며칠 전에 아이작이라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의 이름을 서두로 나의 과거 찾기는 시작되었다.
“흠, 그게 누구더냐?”
“저를 대장간에 맡기고 사라진 사람이에요. 저를 살리려고 돈을 빌려 갔다던.”
“아… 그래 기억나는구나.”
빅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
에둘러 말할 게 뭐 있나.
“미리암이란 여인을 아세요?”
나는 어머니의 이름을 꺼내며 빅터의 반응을 살폈다.
여기서 모른다고 하면 끝이니까.
뭐라고 주절거린들 이어진 연결 고리는 덧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을 만나서 들었습니다. 미리암이란 여인의 죽음과 제가 태어나던 날의 비화를요.”
하지만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지금 무어라… 방금 미리암이라고 했느냐?”
빅터의 반응은 선명했고, 이름을 되물으며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은 그저 시작일 뿐.
“네. 황실 직속부대에게 죽임을 당한 그 미리암입니다. 스승님이 책임자로 계셨던 그 부대에게요.”
배경을 설명한 나는 사건 한가운데로 빅터를 끌어다 놨다.
그의 부대가 연관된 건 사실이었으니까.
지금 확인하고 싶은 건.
그들을 움직인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미리암이라니…….”
빅터는 말끝을 흐리며 깊은 충격에 빠져들었다.
누가 봐도 알 만큼.
빅터의 모습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정신없어 보였다.
마음에 걸렸던 건, 미리암의 죽음이 아닌 이름에 반응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뜻하는 게 무엇이겠나.
‘이미 알고 있었어.’
속단할 순 없지만, 빅터의 개입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미리암은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자신의 고향으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죽인 놈들이 쫓아와 마을 사람들을 도륙했죠.”
말을 잇지 못하는 빅터를 대신해 감춰진 사연을 이어 나갔다.
만삭의 몸으로 아이작과 도망치던 미리암의 마지막을.
자신의 목숨과 아이의 탄생을 맞바꾼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저는… 어머니의 생명을 담보로 태어난 몹쓸 놈이 돼 버렸습니다.”
“…….”
가늘게 떨리던 빅터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가라앉다 못해 허망해 보이는 빅터의 눈은 초점을 잃고 흐려져 갔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는 시작의 마을로 이어졌다.
“진의 집에 쓰여 있던 낙서들 기억하시죠? 저 친구 덕분에 낙서의 뜻을 알아 버렸습니다.”
부족장을 바라보던 나는 다시 빅터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었고, 굳게 닫힌 입술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저 무거운 감정의 근원은 뭘까.
놀라움에서 시작된 충격일까… 아니면 죄책감으로 시작된 번뇌인 걸까.
해답을 찾아가는 나의 질문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안 궁금하세요? 내용이 뭐였는지.”
“…….”
굳어 버린 빅터의 입은 이번에도 열리지 않았다.
멍해진 얼굴을 억지로 움직여 흐린 눈으로 시선을 맞출 뿐.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어질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겨진 비밀은 이제 하나.
“진, 그리고 미리암. 우리 사랑 영원히…….”
나는 조각난 단서들을 모아 한편의 이야기로 만들었다.
28년의 세월이 지나 완성된 기구한 두 사람의 사연.
“스승님이 알고 계신 이야기도 말씀해 주시죠.”
마주한 빅터를 보며 나는 덤덤하게 진실을 요구했다.
마침내 빅터는 입을 열었고.
“네가 그 아이였구나…….”
붉어진 눈시울로 나의 손을 마주 잡았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