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쾅! 콰콱! 빠아악!
상하좌우, 맹공이 쉴 틈 없이 이어지고.
끄르르르르…….
이름 모를 거대 원숭이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때를 맞춰 다가오는 빅터.
“잘했구나.”
무슨 바람인진 몰라도 순수하게 칭찬을 먼저 말했다.
“속도를 제압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 그것은 상대의 타이밍을 빼앗는 것이다.”
타이밍을 뺏는다.
즉, 상대의 공격을 읽고 미리 움직인다는 말이다.
“패링에 당하게 되면 상대는 자신의 리듬과 밸런스를 잃어버리게 되지.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는 비기 중 하나다.”
빅터의 말을 곱씹으며 나는 해머를 올려쳤다.
[올려치기 숙련도 3/10,000]
그리고 내려찍는다.
[내려치기 숙련도 570/10,000]
휘둘러진 관성을 이용해 몸을 회전시켰다.
뻗어 나가는 원심력을 붙잡아 수평으로 내질렀다.
[휘두르기 숙련도 362/10,000]
비로소 완성된 기본기 3종.
이제야 나는 체계적인 둔기술에 한걸음 다가섰다.
‘좋았어!’
입꼬리가 절로 귀에 걸렸다.
씰룩거리는 얼굴을 주체할 수가 없다.
“뭘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게냐. 저리 가서 전리품이나 챙겨 오너라.”
“전리품이라뇨?”
“놈들이 차고 있던 수갑과 족쇄 말이다.”
그런 게 있었나?
나는 의뭉스런 표정을 지으며 숲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대충 이쯤이었나.
놈들이 나타난 수풀에 도착해 귀찮은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그렇게 어슬렁거리던 나는.
‘내려놓던 게 이건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짙푸른 덩어리를 찾아냈다.
적당히 다듬은 형태를 보자니 영락없는 수갑과 족쇄였다.
“사슬만 있으면 완벽했는데.”
그 하나가 부족한 용도불명의 물건이었다.
장신구로 쓰기엔 구질구질하고, 장비로 사용하기엔 뭔가 애매한.
여하튼 전리품을 수거하기 위해 나는 허리를 숙여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뭐야 이거?”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워 든 수갑을 떨어뜨렸다.
“왜 이렇게 무거워?”
떨어진 수갑은 과하다 싶을 만큼 무거웠다.
들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무게가 납득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사슬도 없는 수갑이 이렇게 무거운 이유가 뭘까.
‘일단 크기는 한데…….’
거대 원숭이에게 맞춘 수갑이니 크기가 다른 건 당연한 일이다.
하나 그 차이가 이런 무게로 온다?
말도 안 된다.
왜 말이 안 되냐면, 지금 들고 있는 수갑 한 짝의 무게가 해머와 맞먹기 때문이다.
“들고 오라니까 뭐 하고 있는 게냐.”
기다리던 빅터가 멍해진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딱한 표정을 지으며 수갑을 집어 들었다.
“중력석이다.”
“중, 뭐요?”
“크기에 비해 무게가 어마어마한 놈이지. 착용해라.”
“이걸요?”
“그래.”
짐 끄는 말로 시작하더니 이번엔 거대 원숭이다.
“굳이 착용해야 할 이유가… 크기도 안 맞잖아요.”
“이유는 마차 대신이고, 크기는 적당히 맞추면 된다.”
말을 마친 빅터는 수갑을 붙잡아 한 번에 우그러뜨렸다.
“어?!”
“놀랄 것 없다. 무겁기만 할뿐 재질 자체는 연한 놈이다.”
빅터의 말에 족쇄를 들어 힘을 주었다. 역시나 부드럽게 휘어지며 형태를 갖춰 간다.
“구리보다도 연하네요?”
“중력석을 정제하면 연성을 띈 중철이 만들어진다. 이것들이 중철로 만든 물건이지.”
생전 처음 듣는 소리다.
고블린 로드에게 얻은 검도 그렇고, 바깥 세상에 나오니 내가 모르는 금속이 갑자기 두 개나 늘었다.
“마경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재료다. 다른 곳에선 구할 수 없는 것이니 잘 챙겨라.”
쇳밥 좀 먹었다고, 희귀 재료라고 하니 관심이 가긴 한다.
사용 용도는 여전히 미심쩍지만 말이다.
“이렇게 감아 두면 되나요?”
나는 양팔과 두 다리에 수갑과 족쇄를 착용했다.
고개를 숙여 바라보니, 영락없는 탈주자의 모습이다.
“그래. 그 상태 그대로 잠잘 때, 일어날 때, 밥 먹을 때, 똥 쌀 때 등등… 아무튼 한시도 몸에서 떼어 놓지 말거라.”
“언제까지요?”
“필요 없어질 때까지다.”
갑자기 답답해진다.
마차는 쉬는 시간이나 있었지.
이 물건은 휴식이 없다.
더군다나 이 흉물들의 무게는 상상을 초월한다.
“으윽…….”
이렇게 말이다.
“와 씨… 이거 못 걷겠는데요?”
마치 사지에 해머가 매달린 기분이랄까.
마차를 끌 때와는 다른, 몸 전체가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근력 키우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으니 요령 부리지 말고 계속 착용해라.”
빅터의 당부와 함께 우린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았다.
“우와아…….”
걷는 것 자체가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했다.
마차가 끄는 것이라면, 이것은 마차를 들고 가는 상황이다.
“고작 그거 걷고 땀을 그렇게 흘리는 게야? 쯧쯧… 원숭이만도 못하니 써먹을 데도 없겠구만.”
“이게 무슨 팔찌인 줄 아시나. 직접 해 봐요. 그런 말이 나오는가.”
뭔가 억울한 마음에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하나 빅터는 덤덤히 대답했다.
“이미 하고 있지 않느냐?”
“하긴 뭘 해요. 옆에서 잔소리나 안하면 다행이… 어라?”
빅터의 두 발엔 이미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양 손목은 물론이요, 칼자루에도 휘감겨 있었다.
“스승님은 왜?”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네놈 거니까.”
“헐… 굳이 챙기지 않으셔도 되는데 뭐 하러 사서 고생을…….”
“왜? 하나 더 줘?”
미친 영감탱이.
저 무거운 걸 들고 아무렇지도 않게 걷고 있었다니.
몸 안에 오러가 넘치는 모양이다.
“끄윽…….”
“끙끙거리지 말고 뒤나 잘 살펴라. 벌써 뭐가 달라붙었구나.”
빅터의 말에 돌아본 후위의 풍경.
두 발로 걷는 돼지 몇이 슬금슬금 우리의 뒤를 쫓고 있었다.
“오크?”
“맞다. 오크다.”
“그런데 색깔이 왜 저래요?”
본디 오크란 놈들은 돼지와 같은 피부색을 하고 있다.
한데 저놈들은.
“붉은 오크다. 이곳 마경에만 서식하는 변종이지.”
시뻘건 피부에 생김새도 험악했다.
비교해 보자면 집돼지와 멧돼지의 차이랄까.
피부색뿐만 아니라 솟아난 어금니의 크기도 두 배는 큰 듯했다.
“싸워야 하는 거죠?”
“그래야겠지.”
“이 몸을 하고요.”
“물론이지.”
그래. 이것도 다 수련의 일환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지 않나.
지금은 힘들지만 결국 보상받을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저 영감탱이와 대련을 해서 삼신기를 마구마구…….
문제는 당장 죽게 생겼다는 건데.
“환장하겠네.”
양손에 걸친 수갑의 무게만 이미 해머 두 개다. 아니, 그 이상이지.
거기에 진짜 해머를 들고 휘둘러야 하니 몸이 견뎌 내질 못한다.
“끄으으읍!”
“뭐 하냐, 그러다 맞아 죽겠구나.”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공격은커녕, 해머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쭉쭉 빠져나가는 상황이다.
“정 힘들면 수갑을 빼든가.”
그러고 싶은 맘이야 굴뚝같지만 그래선 안 될 것 같다.
저 빈정거림에 넘어가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다.
‘97번이나 남아 있다고!’
끔찍하지만, 어쩔 수 없다면 깔끔하게 가는 거다.
내게는 아직 97번의 기회가 남아 있으니까.
추잡하게 생을 연명하느니, 다시 시작해 몇 배로 갚아 주면 된다.
“도와주랴?”
“시끄러워요!”
나는 사용 가능한 모든 힘을 모아 자세를 잡았다.
그러곤 다가오는 붉은 오크를 향해 묵색의 해머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후우웅…….
느긋하게 허공을 가르는 커다란 해머.
끄르륵?
놈들의 표정에 의아함이 번져갔다.
이렇게 느린 공격이라니.
무슨 수작인지 파악하려 애쓰는 모습이다.
‘젠장…….’
이제 와서 보니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꾸웨웨익!
아무튼 망했다는 거다.
쾅! 쾅! 쾅! 쾅!
또 처맞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아침부터 일진이 사나웠다.
눈 뜨자마자 영감에게 죽도록 얻어맞았고, 이후론 거대 원숭이, 이번엔 돼지까지…….
‘확 풀러 버려?’
수갑만 풀어내면 이깟 돼지 새끼들, 붉은 색이건 파란색이건 다 잡아 족칠 수 있다.
하지만 안 된다.
한 번 무너진 각오 따위, 언제든 쉽게 무너진다.
처음이 어려운 법.
수갑과 족쇄를 차는 순간 나는 약속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 필요 없어질 때까지다.
애초에 수갑과 족쇄는 강해지면 필요 없는 물건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버틴다.
꾸웨웨엑!
거세져가는 붉은 오크의 공격을 이를 악물고 견뎌 냈다.
반격할 수 없다면, 밀어내기라도 할 것이다.
남아 있는 힘을 쥐어짜 놈들의 몽둥이를 밀쳐 냈다.
그러고 한 걸음 내딛었다.
“돼지 새끼들이!”
다시 밀쳐 내고, 또 한 걸음 나아갔다.
하나 야속한 육체는 한계를 맞이했다.
후들거리는 팔다리는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고, 그러쥔 해머는 자꾸만 미끄러졌다.
마침내 마주한 저항의 끝자락.
“남자가 그 정도 근성은 있어야지.”
등 뒤로 들려온 칼칼한 음성과 함께 붉은 오크의 목이 허공을 날아올랐다.
“마음에 드는구나.”
빅터는 굵은 손으로 나의 어깨를 두들겼다.
“…….”
이겼다.
비록 붉은 오크에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
죽음의 공포를……
살고 싶다는 유혹을.
오늘의 나는, 인간의 본능을 뛰어넘은 것이다.
“이겼으니 전리품을 챙겨야지.”
빅터는 쓰러진 붉은 오크에게 다가갔다.
작은 나이프를 꺼내 그 앞에 쭈그려 앉더니.
서걱서걱―
턱! 턱!
능숙한 손길로 오크의 사체를 썰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그걸 왜 자르고 있어요?”
“왜는 녀석아. 먹으려는 게지.”
“네?! 몬스터를 왜 먹어요?”
아무리 먹을 게 없어도 그렇지.
마수의 고기를 먹는 건 이상하지 않는가.
“네놈이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게다. 이 붉은 오크의 고기는 특 등급 돼지고기보다 월등히 맛있다.”
“특 등급…….”
“특히 삼겹살 부분은 맛과 향이 끝내주지, 한 번 먹으면 그 고소함에 중독돼 버린다. 극상의 맛이다.”
“그래도…….”
찝찝하다.
사족 보행이라면 그나마 이해하는데, 두 발로 걷는 몬스터니 왠지 그렇다.
“뭐가 어때서 그러냐. 그저 두 발로 걷는 돼지일 뿐이다.”
하긴, 돼지의 변종 몬스터가 오크라는 건 이미 정설이다.
생각해 보면 돼지의 다른 종일뿐.
익숙하지 못한 내가 유난을 떠는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마경이다. 평범한 인간 세상의 관습과 상식은 통하지 않는 곳이지.”
빅터는 잘린 고기를 챙겼다.
그러고는 뻥 뚫린 들판을 향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같이 가요.”
들은 척도 안 하고 멀어지는 빅터.
“같이 가자구요!”
“이봐요!”
“어이!”
“야이 영감탱아!”
“허억!”
맹렬이 올라오는 오러를 보며 나는 잽싸게 몸을 날려 생존을 도모했다.
* * *
인간을 초월한 남자와 그것을 원하는 나.
어딘가 상식적이지 않은 두 남자의 조합은 어느 지점에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쯤 어딘데…….”
빅터는 주위를 살피며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뭘 찾는 걸까.
아무리 둘러봐도 특이점은 없었다.
보이는 건 뻥 뚫린 평야.
그리고 몇 걸음 앞에 놓인 까마득한 절벽뿐.
“흐음… 저쪽인 것 같구나.”
방향을 결정한 빅터는 성큼성큼 벼랑으로 다가섰다.
보고 있자니 괜스레 불안해졌다.
또 무슨 변태 같은 짓을 꾸미고 있는 걸까.
“이리 와 보거라.”
“왜요?”
“이리 오라고.”
“거기서 말해요.”
촉이 오고 있다. 다가서면 뭔 일 생길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하지만 갈 수밖에 없다.
“더 매달고 싶다고?”
계속 버티다간 무게만 늘어날 테니까.
살랑거리는 수갑을 보며 저항을 포기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오감을 바짝 세우며 빅터의 곁에 다가섰다.
“저기다.”
“어디요?”
“저기 보이지 않느냐, 거기가 우리의 목적지다.”
그러니까 거기가 어디냐고요?
가리키는 방향을 살펴봤지만, 특이점은 없었다. 눈앞에 있는 건 그저 텅 빈 허공뿐.
“아니, 거기 말고 저 아래를 봐라.”
채근하는 빅터의 말에 나는 시선을 내려 계곡 밑을 보았다.
보이는 것은 깎아진 벼랑과 흐르는 계곡물이 전부다.
도대체 무얼 보라는 건가.
“저쪽이요?”
“그래 저기 있잖느냐.”
“어디요?”
영감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느꼈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오소소한 감각에 뒤를 돌아본 그 순간.
“밑에서 보자.”
빅터의 커다란 손이 내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
기댈 곳 없는 기묘한 부유감.
“어어?”
주렁주렁 쇳덩이를 매단 묵직한 내 몸뚱이는…….
“야이 미친 영감탱아아아아아!”
하늘을 날고… 아니, 추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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