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 블랙라벨 (4)
붉은색 도마뱀은 등에 달린 날개로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난 샐러맨더야. 나도 이곳에서 만들어진 존재지.”
“샐러맨더라면 그……?”
“맞아. 신화에서 나오는 불의 정령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게 바로 나거든.”
몇 번이나 나를 중심으로 돌던 샐러맨더는 그제야 멈추며 말했다.
“실험용으로 만들어진 것뿐이지만.”
“그럼 너 대체 몇 살이야?”
“몰라. 엄청 오래됐는데 하루하루 세진 않았으니까.”
샐러맨더를 보고 있으니 블랙 라벨을 인간이 만들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보다 나랑 계약하자.”
“계약? 갑자기 뜬금없는 단어가 나왔는데?”
“사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
내 머리 위에 내려앉은 샐러맨더는 지쳤는지 몸을 축 늘어트렸다.
“인공 몬스터인 내가 살아가기 위해선 계약한 인간의 기력이 필요해.”
“그럼 지금은 누구랑 계약한 건데? 오랜 시간 혼자 살아왔던 거 아니야?”
“마지막에 계약했던 인간의 기력으로 버티고 있는 거지. 사실 너희가 이곳에 오기 전까진 내내 잠들어 있었거든.”
스스로 봉인시켜서 에너지를 비축한 건가?
“계약은 서로 좋은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너에게 기력을 나누어 주면 난 뭐가 좋은데?”
“정이 없는 인간이네. 불쌍한 도마뱀 한 마리를 위해 나눠 줄 기력도 없다는 거야?”
“아무 계약서에나 도장 찍지 말라고 배웠거든.”
사실 어느 정도 기대는 하고 있다.
이름부터 샐러맨더니까 불 속성의 마법을 다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몬스터와의 전투에서 불은 여러 방식으로 쓸 수 있으니까.
“말했듯이 난 실험체라서 엄청난 화력의 불을 만들진 못해. 쓴다고 해도 금방 지쳐 버리거든.”
“뭐야. 그럼 난 계약할 이유가 없잖아.”
“너희 ‘엑스’에 대한 정보를 얻으러 온 거지?”
엑스?
그러고 보니 발렌이 연구 일지를 읽어 줄 때 자주 나왔던 단어다.
문장을 보면 블랙 라벨을 말하는 것 같은데.
“여기서 만들어진 몬스터의 이름이야?”
“이름이라기보단 이름이 없어서 그렇게 불린 거지. 어쨌든 나랑 계약하면 엑스를 쓰러뜨릴 방법을 알려 줄게.”
“……!”
샐러맨더의 말에 놀라며 고개를 흔들어 떨어뜨렸다.
다시 공중을 날아다니는 샐러맨더를 보고 다급히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방법이 있어?”
“있지. 계약만 해 준다면 알려 줄 거야.”
블랙 라벨만 처리할 수 있다면 계약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그것도 그렇네. 좋아, 그럼 내가 널 믿도록 하지. 급한 건 내 쪽이니까.”
샐러맨더는 예상과 다르게 흔쾌히 한발 물러섰다.
아직 샐러맨더와의 계약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따라와.”
앞장서서 날아가는 샐러맨더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어떤 것 같아? 함정일 가능성도 있잖아.”
“밑져야 본전이지. 위험한 상황이어도 라이프 한 개 정도 소모한다고 치면 걸어 볼 만한 도박이야.”
발렌의 말대로 샐러맨더가 블랙 라벨과 한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정말 블랙 라벨을 처리할 방법을 알고 있다면 도박은 대성공이다.
긴 통로를 따라 날아가는 샐러맨더에게 물었다.
“원래 이곳에서 연구하던 조직은 없어진 거야?”
“결과적으로 엑스에 대한 연구는 성공했지만, 그건 현재의 관점으로 봤을 때 얘기지. 사실상 그때 당시엔 실패나 다름없었어.”
확실히 10년으로 계획했던 연구가 30년이 지나도 성과가 없다면 실패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구 일지가 연구 시작부터 30년 후가 마지막 기록이지만, 블랙 라벨은 그 후로 한참 뒤에야 깨어났으니까.
“자연스럽게 한둘씩 조직에서 떠나갔고, 이곳은 그렇게 방치되어 버린 거야.”
“이 정도의 구조물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조직의 규모가 상당했던 것 같은데.”
통로의 벽을 손으로 쓰윽 만지며 말했다.
던전 내부에 이런 지하 건물을 만든다는 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할 테니까.
“던전 고층에선 희귀한 광물을 쉽게 얻을 수 있으니까. 그걸로 돈을 벌었지.”
13층까지 공략한 이후로는 가격이 많이 내려갔지만, 먼 과거엔 광석들의 가격이 엄청났다고 한다.
저층에서도 적은 양밖에 구할 수 없는데, 수요가 많으니 당연히 비쌀 수밖에.
구할 수 있는 공략된 층이 많아지면서 가격은 자연스럽게 조정되었다.
하지만 샐러맨더의 말처럼 그때 당시엔 고층에서 얻은 광석을 팔면 돈을 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거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야?”
샐러맨더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통로를 걷고 있었다.
그동안 몇 개의 갈림길을 지나왔는지도 잊어버릴 정도로 복잡한 미로의 형태였다.
샐러맨더가 안내해 주는 게 아니라면 절대 찾을 수 없겠는걸.
“자, 다 왔어.”
“여긴 어딘데?”
샐러맨더가 멈춘 곳은 새까맣게 칠해져 있는 철문 앞이었다.
“잘 들어. 엑스는 무적의 존재로 만들어진 몬스터야. 실제로 누구도 엑스를 죽이는 건 불가능해. 오직 한 가지 방법뿐이지.”
“그 방법이 이 방 안에 있다는 거지?”
“정답이야.”
망설이지 않고 화도로 손을 가져갔다.
잠시 숨을 고르고 철문에 묶여 있는 쇠사슬을 향해 단숨에 휘둘렀다.
쌔엥- 촤르륵!
가볍게 사슬이 베어지며 바닥에 흘러내렸다.
“일부러 이런 곳에 숨겨 둔 거야. 엑스는 이걸 지키기만 하면 무적의 존재니까.”
“…안엔 뭐가 있는데?”
“‘가디언’. 이 녀석 역시 인공 몬스터야. 엑스에 비하면 약하지만, 그래도 보통 놈은 아니지. 이 가디언의 핵이 바로 엑스를 쓰러뜨릴 수 있는 무기야.”
그럼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는 없지.
힘차게 철문을 안으로 밀었고, 묵직한 철문은 조금씩 틈이 벌어졌다.
구구구궁!
안으로 열린 방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화륵!
샐러맨더가 힘을 주자, 그의 주변에 불길이 일어나 내부를 밝혔다.
“…저게 가디언?”
“그래. 놈을 쓰러뜨리고 핵을 뺏으면 돼. 할 수 있다면 말이지.”
“불안하게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돌로 만들어진 조각상 같은 가디언은 둥근 형태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찌잉.
우리가 들어온 걸 알아챘는지 갑옷과 눈 부분이 하얀빛을 내뿜었다.
“말했지만, 쉽게 쓰러뜨리긴 힘들 거야.”
“그건 두고 봐야지!”
놈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걸 보고 바로 달려들었다.
뭔지는 몰라도 어쨌든 제대로 공격해 오기 전에 죽여 버리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거잖아.
부웅-!
“…! 뭣?!”
정확히 검은 놈의 목을 노리고 쏘아졌다.
그런데 검이 닿기 전에 스스로 떨어져 나간 놈의 목이 공중에 붕 떠 있었다.
빠악!
그대로 공중에 있던 머리통이 내 머리에 박치기를 해 왔고,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자세가 흐트러졌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놈의 거대한 대검이 횡으로 그어졌다.
“발렌!”
다급히 발렌을 소환했고, 내 앞에 나온 발렌은 대검으로 놈의 공격을 받아 냈다.
쩌엉-!
검 두 자루가 맞부딪히는 소리라곤 믿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굉음이었다.
한참을 밀려난 발렌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그가 힘으로 밀리는 건 거의 본적이 없었기에 가디언이 얼마나 괴력을 가졌는지 단번에 실감할 수 있었다.
“머리통만 떨어지는 게 아닐지도 몰라. 관절마다 분리가 된다면 베는 건 힘들겠는데?”
“정답이야. 가디언은 모든 부분이 분리돼서 개별적으로 움직일 수 있지.”
“그걸 왜 지금 말하냐고!”
샐러맨더에게 버럭 화를 낸 다음 다시 화도를 놈에게 겨눴다.
블랙 라벨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가디언과 싸우는데, 이거 가디언을 잡기도 쉽지 않겠는걸.
“안타깝게도 가디언은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없어. 오로지 실력으로 쓰러뜨려야 한다고.”
“좋아, 그럼 나도 실력 발휘 좀 해 볼까.”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스트레칭을 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우, 발렌 준비됐지?”
“언제든.”
라이프 파워와 더블 라이프 파워를 사용했다.
블랙 라벨과의 전투에서 쓰지 않길 잘했군.
파앙-!
베기 전에 놈이 스스로 분리한다면, 반응하기 전에 베어 버릴 수밖에!
쐐액!
단숨에 뿜어진 화도는 가디언의 팔을 깔끔하게 잘라 냈다.
“…?! 뭐야?! 정말 인간 맞아?!”
뒤에서 들려오는 샐러맨더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다음 공격을 이어 갔다.
당황한 듯 가디언이 뒤로 물러났고,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발렌이 놈을 공격했다.
쩌엉!
다시 한번 놈의 검과 발렌의 검이 맞닿았다.
버프를 쓴 상태라 발렌의 능력치도 상승했고, 지금은 발렌의 힘이 가디언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쿠웅!
힘을 견디지 못한 가디언이 옆으로 몸을 피했고, 발렌의 검이 그대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그리고 완전히 자세가 무너진 가디언을 향해 화도를 꽂아 넣었다.
1공식, 목란.
조금 떨어진 거리였지만, 목란은 정확히 놈의 머리통에 명중했다.
“자, 이제 끝난 거야?”
“어? 마… 맞아. 가디언의 가슴 쪽을 보면 핵이 있을 거야.”
당황한 듯한 샐러맨더를 보고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정말 너희 뭐야?! 가디언은 인간이 혼자서 쓰러뜨릴 만큼 약하지 않다고.”
“나도 있거든!”
샐러맨더의 말에 울컥한 발렌이 소리쳤다.
아랑곳하지 않고 발렌은 내 주변을 돌아다니며 물었다.
“사실 너도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야?”
“그럴 리 없잖아. 그보다 내가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왜 여기로 데려온 거야?”
역시 샐러맨더는 나를 죽이려고 함정을 판 건가?
“그건 미안해. 어쨌든 가디언은 이 방에서 나오지 않으니까 위험해지면 뒤로 도망가서 나랑 계약하게 하려고 했어. 내가 도와주면 이길 가능성이 있으니까.”
“결국, 계약이 목적이었구만.”
발렌의 말에 샐러맨더는 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속이려고 해서 미안해.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잘해 봐야 일주일이거든. 그래도 거짓말은 안 했어. 가디언의 핵으로 엑스를 공략할 수 있는 건 사실이야.”
샐러맨더와 대화하느라 까먹고 있었다.
서둘러 가디언의 가슴 쪽을 확인했고, 새하얀 빛을 뿜어내는 둥근 뚜껑이 보였다.
화도를 그 사이에 꽂아 넣고 강제로 떼어 내자 안에 있는 유리 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로 블랙 라벨을 쓰러뜨릴 수 있는 거야?”
“엑스를 블랙 라벨이라고 부르는 거구나. 맞아. 그 구체 안에는 하얀 안개가 담겨 있어.”
“하얀 안개?”
“엑스에게 그 안개가 닿으면 더 이상 물체를 통과하는 상태로 변하지 못해. 공격이 가능한 상태가 된다는 거지.”
유리로 된 동그란 구체엔 정말 안개 같은 하얀색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스스로 빛을 내는 신기한 안개는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아름답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 약속대로 이제 나와 계약해 줘.”
“형씨, 아직 이게 정말 블랙 라벨의 약점인지 모른다고. 그리고 이 도마뱀 자식은 우릴 속이려고 했어.”
발렌의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사실 그런 걸 떠나서 샐러맨더 자체의 힘에도 관심이 있다.
내가 가디언에게 질 걸 알면서도 자신의 힘이 있으면 이길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샐러맨더의 힘이 강하다는 거겠지.
그것만으로도 계약을 진행할 가치는 충분하다.
“계약은 어떻게 하는 건데?”
“형씨!”
“간단해. 내 꼬리를 먹으면 돼.”
“……?”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샐러맨더는 엉덩이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