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 지옥에서 죽지 않는 법 (1)
일반적인 공략팀 헌터는 ‘전투’에 특화되어 있어서 육체적으로 강한 게 최우선이다.
그렇기에 육체를 단련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헌터가 되어 몬스터와 싸울 수 있지만,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특수한 능력을 갖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초월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던전이 아닌, 일반적인 사회에서 살던 사람도 갑자기 능력을 갖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특수계 헌터들은 보통 자신이 원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능력을 갖게 되어 헌터 세계로 입문하는 경우가 많다.
“두… 두 가지 특수계를 갖고 있다고요?!”
“그래. 엄청난 인재지.”
들어본 적도 없다.
애초에 두 가지 특수계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도 지금 처음 알았다.
심윤성 아저씨의 말처럼 인재라는 말이 딱 맞는군.
공략팀은 반드시 통신계와 치유계가 필요한데, 그걸 한 사람이 모두 해결해 준다면 그보다 반가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인재를 고생시키지 말라고.”
이신예는 나에게 다가와 짐을 내 어깨에 걸치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아까는 직접 들고 가신다면서요!”
“마음이 바뀌었어.”
인재고 뭐고, 성격은 최악이군.
힘을 잔뜩 찍은 덕분에 무거운 짐을 나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보통 치유계나 통신계는 체력과 정신력 소모가 크지 않나요? 혼자서 두 개를 다 하려면…….”
“그래서 신예가 인재라는 거지. 두 가지를 하면서도 남들만큼 하니까, 혼자서 2인분을 책임지고 있잖아.”
확실히 대단하긴 하다.
같은 공략팀이었던 석준이도 항상 특수계 능력을 쓰고 나면 금방 지치기 일쑤였는데, 저런 연약해 보이는 몸으로 두 배의 일을 해낸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S급 헌터라는 건 그런 거지. 남들만큼 하면 안 되는 곳이니까.”
“남들만큼 하면 안 되는 곳…….”
심윤성 아저씨의 말을 나도 모르게 되뇌고 있었다.
한 가지 분야에서 정상에 올라간다는 건 역시 보통 범주로는 되지 않는 건가.
“저기 보이지? 저기가 A-2 구역이야. 다른 녀석들이 오기 전에 미리 캠프를 만들어 두자고.”
“네!”
막사는 간단하게 설치가 가능한 구조라서, 둘이서도 빠르게 만들 수 있었다.
베이스캠프 자리를 잡는 것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프로인지 알 수 있었다.
높은 위치라 주변 지형이 잘 보이고, 빠르게 아래층으로 후퇴할 수 있는 도주로까지 확보되어 있었다.
“일단 임시로 바리케이드 좀 만들어 볼까.”
“도와드릴게요.”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서 심윤성 아저씨가 가지고 있는 도끼로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쿠웅-! 쿵!
도끼가 나무를 후려칠 때마다 숲이 울릴 정도로 큰 굉음이 터져 나왔다.
다른 건 몰라도, 힘은 엄청난 분이군.
“베이스캠프 근처에 쌓아서 간단한 벽을 만들 거야.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놈들에겐 제법 쓸 만하거든. 그리고 나무는 잎이 이렇게 생긴 녀석이 제일 좋아. 다른 나무에 비해 불에도 잘 견디고 튼튼하지.”
“오…! 그렇군요.”
조금 터프한 아저씨긴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다.
이런 곳에서 매일 싸우면 피곤하고 지쳐서 부정적으로 변하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바쁜 와중에도 뭐라도 내게 하나씩 가르쳐 주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의 그런 노력에 미안하고 고마워서라도 까먹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하아암. 다들 밥 먹고 해.”
이신예가 하품을 하며 말했고, 멀리서 나무를 들고 오던 우리는 반색했다.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서 아침에 먹은 수프로는 버틸 수 없었으니까.
[최현 Lv.25
체력: 2550/2550 마나: 250/250 기력: 17/30
힘: 78 민첩: 34 지능: 34(사용 가능 포인트:4)
라이프 : 604개]
리치왕을 쓰러뜨리고 25레벨로 올랐다.
여기서 라이프 파워를 쓴 탓에 남은 라이프 개수는 604개.
적지 않은 개수지만, 스킬을 쓸 때마다 라이프가 줄어드니 최대한 많이 확보해 두고 싶었다.
간만에 스테이터스를 확인하니 처음으로 기력이 소모된 게 보였다.
게이트 안에서는 딱히 기력을 쓸 일이 없어서인지, 죽으면 원래대로 회복한 탓인지 기력이 이렇게 줄어 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오오……!”
“이 냄새는… 설마!”
“라면이야. 요리하는 건 귀찮거든.”
당당하게 말하는 이신예가 얄밉긴 했지만, 지금 라면은 내게 굉장히 반가운 음식이었다.
한국 사람으로서 라면을 2년 가까이 먹지 못했다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조심스럽게 김치가 있는지 물어보려다가, 이신예한테 된통 욕을 먹을 거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형씨! 라면이라면 설마…. 그……!”
“맞아. 그때 말한 그 음식이야.”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붓고 기다리는 시간이 이렇게 행복할 줄이야.
“나도 줘! 나도 준다고 했잖아!”
“지금은 안 돼. 여기 헌터들한테 사냥당하고 싶은 거야?”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발렌과 소곤대는 걸 들었는지 신예가 수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아…. 하하…. 아무것도 아니에요.”
게이트 밖으로 나와서 한 번도 발렌을 꺼내 주지 못한 건 나도 미안하긴 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잠깐이라면 괜찮겠지.
“야! 화장실 가는데 라면은 왜 가져가?!”
뒤에서 들려온 이신예의 말을 무시하고 서둘러 캠프에서 멀어졌다.
커다란 나무를 등지고 자리에 앉아서 발렌을 앞에 소환했다.
“오…. 오랜만에 자유군.”
“아무리 그래도 오크를 친구라고 소개해 주는 건 위험하니까 자주 꺼내 주긴 힘들 거 같아.”
“하하. 괜찮다고 형씨. 나도 안에서 다 보고 있으니까 이해해.”
“사과의 의미로는 조금 부족하지만, 이건 너 줄게.”
“정말이야?!”
가지고 나온 컵라면을 발렌에게 건네주었지만, 발렌은 컵라면을 이리저리 훑어볼 뿐이었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먹는데?”
“일단 뜨거우니까 조심해. 젓가락은 당연히 쓸 줄 모르겠지?”
“…그게 뭔데.”
발렌은 잠시 라면 냄새를 맡다가 그대로 손으로 면을 건져 먹기 시작했다.
“아… 안 뜨거워?!”
“뭐? 오크 가죽은 인간이랑 다르다고. 이 정도쯤이야.”
라면을 음미하던 발렌의 표정이 굳어졌고,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별로야? 역시 너무 맵나?”
“아니…. 형씨! 세상에 왜 이렇게 맛있는 게 있다는 걸 알려 주지 않은 거야. 흐윽…. 흑……!”
울 정도냐?!
감동한 발렌은 라면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단숨에 국물까지 해치우는 발렌을 보고 흐뭇해서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컵라면은 내게도 양이 적은 편이었으니 발렌의 배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용기를 핥고 있는 그의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조금만 참아. 나중에 여기서 나가면 배터지게 먹게 해 줄 테니까.”
어쨌든 그가 맛있게 먹어 줬다는 것만으로도 썩 기분이 좋았다.
“약속이라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래그래.”
발렌이 다시 펫 시스템으로 돌아갔고, 그가 먹어 치운 컵라면 잔해만 들고 캠프로 돌아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신예가 따가운 눈총을 보내왔고, 애써 못 본 척 쓰레기를 치웠다.
“화장실 가면서 라면 가져가는 애는 네가 처음이야.”
“라면을 불면 맛이 없잖아요. 하하…….”
멋쩍게 웃으며 최대한 빨리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잠시 후 유지한 아저씨와 민혁이 돌아왔고, 두 사람도 이신예가 준비해 둔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점심을 굶은 꼴이 되어 버려서 두 사람이 먹는 모습만 보고 있는 건 상당히 고역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안 좋은 거 같다.”
유지한 아저씨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에 담배를 물었다.
“A-8 구역을 맡고 있던 팀이 전멸했어. 덕분에 A-10 구역의 팀이 두 곳을 처리하느라 손이 부족해.”
“전멸했다니…. 그게 무슨…….”
당황한 민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13층에서 활동하는 헌터는 대부분 S급 헌터들인데 그런 프로가 한 사람 당한 것도 아니고, 전멸했다는 건 확실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이트야. A-7 구역에 새로운 게이트가 발생했다.”
“게이트?!”
“밤에 그쪽에서 나온 몬스터들한테 기습당한 거 같아. 일단 자세한 사항 알려줄 테니까 신예는 길드에 보고해 줘.”
“알았어요.”
안전하다고 생각한 곳에 베이스캠프를 만들었는데, 바로 뒤에서 게이트가 생겨났으니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없는 던전에선 어쩌면 운이 가장 큰 실력일지도 모른다.
“연락하고 왔어요. 그런데…….”
이신예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시선을 돌리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쪽에서 게이트를 공략하라고 하던데요.”
“뭐?! 길마 자식, 자기 일 아니라고!”
주먹을 꽉 움켜쥔 유지한 아저씨는 당장에라도 누군가를 때려죽이러 갈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쪽 상황을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한다고?!”
“현재 13층 게이트를 공략할 만한 인원이 없다고 해요. 12층이랑 11층에 게이트가 다수 발생해서 그쪽으로 상위 헌터들을 다 보낸 거 같아요.”
“하아…. 미치겠네. 윤지한테 연락해서 이쪽으로 복귀하라고 해.”
게이트를 공략하는 건 결국, 예비 전력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어떤 게이트가 나타날지 모르는 게 던전이기에 이런 상황도 간혹 벌어지곤 한다.
던전에 서식하는 몬스터와 싸우면서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까지 신경 쓰는 건 무리다.
즉, 어느 한쪽을 먼저 처리해야 하는데, 당연히 게이트를 공략하는 게 우선이었다.
몬스터들에게 등 뒤를 내줄 수는 없으니까.
“다른 팀에게 여기 구역을 잠시 맡기고 우리가 게이트를 들어가야겠어. 최대한 빨리 공략하고 나오는 수밖에 없지.”
이미 공략한 구역에 게이트가 생겼다는 건 이 층에 있는 모든 팀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뜻이었다.
다른 팀도 자기 구역을 지키기 버겁지만, 게이트를 둘 수는 없으니 협력해 줄 것이다.
“…왔어요.”
항상 같은 표정의 차윤지가 돌아와서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가볍게 인사했다.
“좋아.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지금은 속도전으로 간다. 다들 체력 아낄 필요 없이 전력으로 해.”
“네!”
“알겠습니다.”
유지한 아저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신예가 손을 살짝 들었고,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다 좋은데, 이 사람은 어떻게 할 거예요?”
“…….”
정적.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엔 내가 있었다.
“확실히… 빠르게 공략하려면 우리가 누굴 지키면서 할 수는 없지.”
심윤성 아저씨의 말에 민혁이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여기에 두고 가는 것도 무리예요. 다른 팀도 2개 구역씩 맡고 있어서 아마 현이를 맡아 주는 건 무리일 거예요.”
중간에 껴서 민폐만 잔뜩 끼치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나 불편해서 고개를 떨궜다.
“아니, 괜찮아. 데리고 간다.”
“네?!”
유지한 아저씨의 말에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책임질게. 이 녀석 그렇게 못 쓸 정도는 아니거든.”
“흐음…….”
“뭐, 대장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긴 했다.
어차피 죽어도 살아나는 몸을 가진 나는, 누가 신경을 써 주지 않아도 크게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모두 못 미더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 그럼 바로 진입한다.”
그런 팀원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유지한 아저씨가 먼저 게이트로 걸음을 옮겼다.